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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분단과 군사 독재에 상처입은 거장, 윤이상

등록|2009.09.18 20:21 수정|2009.09.18 20:21

▲ 윤이상 작곡가 ⓒ 윤이상평화재단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 훨씬 더 추앙받는 존재다. 70년대에 이미 '현존하는 유럽의 5대 작곡가'로 꼽혔으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괴테 메달 등을 수상했다.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에서는 44명의 '사상 최고의 음악가'를 선정해 음악당 로비에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도 윤이상 선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윤이상 선생은 동양의 음악사상을 서양음악에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최초의 작곡가였으며, 아시아인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였다.

'천재'라는 수식으로도 표현이 부족한 그의 업적은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교향곡 '예악', 오페라 '심청', 희곡 오페라 '나비의 꿈',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민족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등 15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으로 남아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조국의 분단으로 인해 오욕과 상처로 얼룩져 버렸다.

향년 78세로 타계할 때까지 윤이상 선생은 사랑하는 고국땅을 밟지 못했으며, 죽어서도 선생을 둘러싼 정치적 계산은 가시지 않아 고인의 비운… 회한을 더욱 사무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에 선비 윤기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출생지는 '통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리는 편이다. 원래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20년에 통영으로 이사를 왔다고도 하고 출산 당시 어머니가 친정인 산청에 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선생 또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고 장터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부인인 이수자 여사에게 전함으로써 출생지에 관한 논의는 일단락됐다. 통영이 윤이상 선생의 고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선생이 자란 곳이 통영이고 또 조상의 뼈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었다.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윤이상 선생은 음악에 소질을 보이며 열세 살부터 작곡을 시도하는 등 작곡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후 아버지를 설득해 오사카 음악학원과 이케노치 도모지로에게 작곡을 배웠고, 1940년대부터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이 되자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와 음악을 계속했다. (당시 통영에 있던 학교들의 교가를 대부분 작곡했다) 1948년부터는 부산, 서울 등에서 활발한 강의와 작품활동을 펼쳤으며 1956년 현대작곡기법을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 1966년 대관현악곡 '예악'으로 국제적인 음악가가 됐다.

"나는 정치적인 음악가가 아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중앙정보부가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의 유학생과 교민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한 사건)'으로 대표되는 윤이상 선생의 인생역경은 서울소환, 사형선고, 자살시도, 구명운동, 국외추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윤이상 선생은 생전 "북한에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것이 내 임무"라거나 "나는 정치적인 음악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음악을 사랑하고 갈구하던 그가 또 하나 사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이었을 터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했으며, 이후 평생을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념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한 윤이상.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하나 된 조국이 아니었을까.

윤이상 선생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러한 예술가를 포용하기에 한없이 좁고 얕다. 지난 2006년에는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종식시키기 위해 확대해석됐다고 발표했으며, 2007년 9월 14일에는 이수자 여사가 40년 만에 입국하기도 했으나 정권이 바뀐 이후 모든 것이 원위치됐다.

희망적이던 '윤이상 음악당'은 반쪽도 아닌 1/3 규모의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지어진다. 윤이상 선생을 음악가로 여기지 않고 정치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이들이 아직도 많아 고인의 예술혼에 생채기를 낸다. 선생의 흉상조차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창고에 갇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배출해 낸 세계 정상의 작곡가를 기리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 통영 도천동에 조성 중인 '윤이상 테마공원' ⓒ 통영시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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