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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한자말 덜기 (83) 시작 3

[우리 말에 마음쓰기 756] '기어오르기 시작', '햇볕 쬐기 시작', '한번 시작한'

등록|2009.09.20 13:26 수정|2009.09.20 13:26

ㄱ. 기어오르기 시작

.. 경찰 아저씨들은 뭔가 잠시 생각하더니 사다리를 가져와 벽에 세우고 삐삐를 끌어내리려고 한 사람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  《아스트리드 린그렌/김인호 옮김-말괄량이 삐삐》(종로서적,1982) 32쪽

 '잠시(暫時)'는 '잠깐'이나 '한동안'으로 다듬습니다. '가만히'나 '곰곰이'로 다듬어도 어울립니다.

 ┌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
 │→ 기어오르려 했다
 │→ 기어올랐다
 │→ 기어오르기로 했다
 └ …

 한자말 '시작'이 쓰이는 자리를 살피면, 꼭 보조용언 노릇을 한다고 느낍니다. 보조용언으로는 토박이말 아니고는 쓰이지 않는 우리 말 흐름을 돌아본다면 어이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새롭다 할 만한다고 여기는 분이 많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말도 발돋움해야 한다'고 외치는 분들께서.

 나라밖 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분들이 으레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당신님들이 보기에 서양 말투나 일본 말투 가운데 재미있는 말투가 있어, 이런 말투를 우리 말투로 고스란히 담아 보고 싶다고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재미있을 뿐더러 우리 말을 살찌우지 않겠느냐 느끼는 말투를 살며시 풀어놓지 않느냐 싶습니다. 또는, 아직 번역 솜씨가 뒤떨어져서 어줍잖게 옮겨내기도 하고요.

 그래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한자말 '시작'을 이 땅 사람들이 언제부터 쓰게 되었는가를. 옛날부터 이 땅 사람들은 한자말 '시작'을 쓴다고 할 때에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고 있었는가를. 올바른 말씀씀이는 무엇이고, 창작이나 번역을 하는 이들이 맡을 몫은 무엇인가를.


ㄴ. 햇볕을 쬐기 시작했어요

.. 메뚜기는 커다란 바위 꼭대기로 나와 대담하게 햇볕을 쬐기 시작했어요 ..  《다시마 세이조/정근 옮김-뛰어라 메뚜기》(보림,1996) 10쪽

 '대담(大膽)하게'는 '두려움을 털고'나 '두려움을 잊고'나 '두려워하지 않고'나 '당차게'나 '다부지게'나 '씩씩하게'로 손질해 줍니다.

 ┌ 햇볕을 쬐기 시작했어요
 │
 │→ 햇볕을 쬐고 있어요
 │→ 햇볕을 쬐기로 했어요
 │→ 햇볕을 쬐게 되었어요
 └ …

 메뚜기 자기를 잡아먹는 짐승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숨어만 지내던 메뚜기가 큰마음을 먹고 바위 꼭대기에 나앉았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는데 이제부터 처음으로 대놓고 햇볕을 즐기면서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떳떳하게 살기로, 씩씩하게 살기로, 다부지게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메뚜기를 잡아먹는 두꺼비나 뱀이나 새나 사마귀가 보자면 참 건방진 녀석으로 보일 수 있고, 얼토당토않거나 어리석은 녀석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뚜기는 언제까지나 눌려 지내고프지 않습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ㄷ. 한번 시작한 일은

..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은 꼭 이루고 말아요. 형들도 내가 새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이 되는 걸 보았잖아요." ..  《세실 모지코나치,클레르 메를로 퐁피/백선희 옮김-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산하,2009) 38쪽

 '변(變)했다가'는 '바뀌었다가'나 '되었다가'로 다듬고, "사람이 되는 걸"은 "사람이 되는 모습을"로 다듬어 줍니다.

 ┌ 한번 시작한 일은
 │
 │→ 한번 한 일은
 │→ 한번 하기로 한 일은
 │→ 한번 붙잡은 일은
 │→ 한번 마음먹은 일은
 └ …

 처음을 잘 잡아도 끝까지 못 가는 수가 있습니다만, 처음을 잘 잡으면 끝마무리까지 잘 되곤 합니다. 처음을 잘못 잡아도 끝까지 가는 수가 있습니다만, 처음을 잘못 잡으면 끝까지 힘들거나 엉터리가 되기 일쑤입니다.

 처음 우리 생각을 나타내는 자리에서 어떻게 말하고 글쓰느냐에 따라서 뒤따르는 낱말과 말투가 달라집니다. 처음부터 야무지게 잘 다스린다면 나중까지도 야무지게 잘 잇곤 하지만, 처음부터 얄딱구리하게 놓아 버린다면 나중까지도 얄딱구리함이 그치지 않곤 합니다.

 ┌ 한번 칼집을 뽑았으면
 ├ 한번 칼자루를 쥐었으면
 └ …

 말과 글만이 아닙니다. 우리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처음을 어떻게 맺어 놓느냐에 따라 그 뒤 흐름과 마무리가 달라집니다. 처음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여도 뒤늦게라도 마음을 다잡고 바로세우는 때가 있는데, 우리가 우리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걸으려 한다면, 처음부터 엉망진창이 아닌 즐겁고 슬기로운 길로 접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구태여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헤매면서 애먼 나날을 흘러보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느껴요.

 그래도 사람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에, 애먼 나날을 이래저래 흘려보내고 난 다음 제자리를 찾기도 합니다. 떠돌고 헤매는 나날이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끼는 눈을 찾기도 합니다. 치이고 밟히고 꺾이고 하는 나날을 겪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옳고 싱그럽고 따사로운 햇살을 찾기도 합니다. 아직은 섣부르고 멍청하고 얄궂다 하여도, 앞으로는 제 넋과 얼을 살뜰히 차리면서 기쁘게 말과 글을 어루만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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