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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할머니들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다니..."

[해외리포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희망과 절망

등록|2009.09.29 14:31 수정|2009.09.29 15:47

▲ 호주 연방 국회의사당 상공에 비행기 연기로 그려진 나비와 길원옥 할머니. ⓒ 신상현

"할머니들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만드는 이명박 대통령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모르겠다. 이 대통령이 2010년에 일왕을 초정하겠다는 얘기를 듣고, '쉼터'의 할머니들은 방으로 들어가 몸부림치면서 울부짖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을 하면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나의 모든 것을 유린당했다. 그 나이에 매춘으로 돈 벌러 갔다고 일본은 주장하고 있는데, 이쯤에서 과거사를 청산하자고 말하는 이명박씨가 대한민국 대통령 맞나?"

태평양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지난 8월 호주를 방문했던 길원옥(82) 할머니다. 길 할머니는 최근 독일 방문을 취소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고 한다.

9월 23일 오후, 서울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쉼터'로 전화를 걸었다. 지난 8월, 호주 의회를 상대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호주지부(이하 호주 앰네스티)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호주 친구들(FCWA, 대표 송애나) 등과 함께 벌였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호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884차 '수요 집회'에 참석하고 쉼터로 돌아왔다는 길 할머니는 그보다도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언행에 더 흥분한 상태였다. "치욕의 역사를 절대 그런 식으로 덮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5일 <연합뉴스>·일 <교도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2010년 한일 강제합병 100주년을 맞아 아키히토(明仁) 일왕 방한을 추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겐 분노, 하토야마 총리에겐 축하

"하토야마 유키오님, 우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입니다. 하토야마 총리님, 총리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총리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편지를 올립니다. 위안부 문제를 사죄와 배상으로, 평화적이고 확실하게 해결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거듭 총리취임을 축하드리며 마치겠습니다." - 하토야마 총리에게 보낸 축하편지, 2009년 9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76명)

반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최근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신임총리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할머니들이 편지를 보낸 사연을 자세하게 듣고자, 일본군 만행을 법적으로 응징하기 위해 경북대학교 법대에서 국제법을 공부한 이용수(81)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할머니는 2007년 2월 15일, 백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힌 호주 시민권자 얀 오헤른(86) 할머니와 함께 미국 하원 청문회에 참석한 바 있다. 그 이후 이 할머니와 오헤른 할머니는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일본군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심정적 연대를 이어왔다. 김군자(83) 할머니까지 포함해 세 명의 피해 할머니들은 생생한 증언으로 미 의원들과 여론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미국 하원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1998년, 이용수 할머니가 하토야마 일본 총리(당시 민주당 간사장)와 악수하는 모습. ⓒ 정대협 제공

- 피해자이신 이 할머니께서 하토야마 일본 총리의 취임을 축하하는 게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1998년에 일본에서 하토야마 민주당 간사장을 만났어요. 그 당시는 일본의 민간기구(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가 나서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던 때였습니다.

나는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기 전에, 민간에서 주는 배상금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어요. 내 얘기를 정중하게 듣고 있던 하토야마 간사장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성실하게 답변했어요. 2000년 일본 방문 때도 하토야마 총리와 통화했습니다."

- 정치인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답변하지 않나요?
"하토야마 총리는 진실하고 인간미가 있어 보였어요. 총리가 됐으니까 중대한 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래서 생존 할머니들과 함께 축하편지도 보냈어요."

- 호주 의원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 촉구 결의안 채택을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호주가 일본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지만 호주 의원 여러분, 나이가 많은 우리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일본이 사과할 수 있도록 빠른 시일 안에 결의안을 채택해 주세요. 한국에서 이용수가 엎드려 빕니다."

- 오헤른 할머니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많습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호주의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줍시다. 보고 싶습니다."

▲ 국제사면위원회 호주지부가 주관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희망의 나비 날리기 캠페인(상)과 18000마리 이상의 나비가 날았다고 보고(하)한 엠네스티 호주 지부 웹사이트. ⓒ 엠네스티호주지부


호주 하늘에 새긴 "일본은 사과하라"

지난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낯선 땅 호주에서 감동과 실망을 동시에 맛봐야 했다. 감동의 순간은 이랬다.

"일본은 사과하라(Japan Say Sorry)"

8월 12일, 호주 정치의 심장부 연방의사당 하늘에 비행기가 하얀 연기구름으로 쓴 글자다. 그 위에는 나비 한 마리가 역시 연기구름으로 날아올랐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호주지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서 마련한 행사의 퍼포먼스였다.

"우리가 의사당 하늘에 날려 보낸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피해를 본 여성의 숫자가 20만 명에 이릅니다.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세 미만이었고 12살짜리 소녀도 있었습니다.

이런 실상을 알리고, 2차 세계대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돌려주자는 목적으로 전국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거기에서 얻은 여론을 연방의사당으로 보냈고요. 종전 64년인데, 아직도 유린당한 인권에 대한 사과를 기다리는 할머니들을 위한 청원서였습니다.

무려 18000통의 청원서가 접수돼 케빈 러드 총리실로 보냈습니다. '희망의 나비' 11000통은 호주 앰네스티 웹사이트로 참여했고, 7000통은 청원서에 서명하는 방식으로 작성됐습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호주지부 캠페인 코디네이터, 해나 하보로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도 한국에서 초청됐다. 길 할머니는 그날, 호주 주재 일본대사관 앞 시위에 참석한 다음 의사당으로 옮겨서 호주 시민들이 작성한 청원서를 의원들에게 전달했다. 청원서에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호주 의회 결의안 통과를 바라는 호주 국민들의 마음이 담겼다. 이날 길 할머니가 호주 의원면담 때 증언한 피해 진술은 너무도 생생해 의원들마저 숙연해지게 했다.

그러나 호주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호주 의원들의 답가(答歌)는 실망스러웠다.

▲ 2009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호주 방문. ⓒ 윤여문


일본 눈치 보며 '위안부 결의안' 미루는 호주의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를 권고한 'HR 121'이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지 2년이 지났다. 이어서 네덜란드, 영국, 캐나다, EU, 대한민국, 대만 등의 의회에서도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UN 인권조약기구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라고 일본 정부에 권고했다.

호주에서도 스트라스필드 시의회(한인 최초의 권기범 시장이 주도)와 라이드 시의회 등에서 결의안을 채택해 국제연대에 동참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결의안을 통과시킬 것으로 예상했던 호주 의회는 결의안을 여러 차례 부결시키면서 미적거리고 있다.

호주 상원은 '위안부' 결의안 채택여부를 놓고 수정안 투표 한 차례를 포함하여 5차례의 투표를 실시했다. 2006년 8월 첫 투표에 이어 2007년 2월(찬성 34-반대 36), 2007년 9월(34-35), 2008년 수정안 투표(32-34) 등이 모두 아슬아슬한 표차로 부결됐다.

그런데 2009년 8월 19일에 실시된 투표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됐다. 찬성 7, 반대 37, 기권 22표. 녹색당 5명 전원과 군소정당 2명이 찬성표를 던졌을 뿐, 보수정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이 반대에 투표하고, 그동안 찬성으로 일관했던 노동당이 기권으로 돌아서서 나온 결과다.

투표 결과를 보도한 호주국영 abc 방송은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중국 정부와 삐걱거리는 노동당 정부가 외교적으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일본 정부에 큰 부담을 느낀 것으로 분석된다"면서 "그동안 일본 정부 당국자의 끈질긴 물밑 로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녹색당 소속 핸슨-영 의원의 발의로 상정된 이번 결의안은 "성(性) 인권유린에 따른 전적인 책임 인정, 범죄행위에 대한 공식 사과, 피해자나 직계가족에 대한 보상, '위안부'에 대한 학교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일본 정부에 촉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길원옥 할머니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결의안을 채택할 것으로 기대했던 호주의회가 여러 번 결의안을 부결시켜 실망스럽다"며 "2009년 안에는 꼭 통과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 컵케이크 위에 만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나비'와 종이나비에 쓰인 염원. ⓒ 윤여문 등


할머니들 "목숨 붙어있는 한 진실 알리겠다"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특히 '생명이 붙어있는 한 어디서든 진실을 알리겠다'는 말씀을 듣고 많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이 있다. 하루 빨리 할머니들에게도 광복이 오기를 간절히 빈다."

지난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 시드니 후원의 밤'에서 <호주한인포럼> 김학재 대표가 한 말이다.

한 달여가 지난 9월 25일, 김학재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일언반구도 사과하지 않는 일왕을 '천왕'이라고 호칭하면서 초청한 MB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맞느냐?"면서 "더욱이 '한일 병합' 100주년을 즈음하여 초청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라고 성토했다.

김 대표는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왜 그렇게 대 일본 문제들에 굴욕적인지 모르겠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전제되지 않는 방한은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라면서 "청와대 하늘 위에 호주 연방의사당 하늘에 썼던 다음과 같은 스카이라이팅 메시지(skywriting message)를 똑같이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은 사과하라!(Japan Say Sorry)"

잃었던 빛을 되찾았던 광복(光復) 64주년, 그러나 할머니들에게 진정한 광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 호주 연방 국회의사당 하늘에 비행기로 쓴 글씨 '일본은 사과하라(Japan Say Sorry)' ⓒ 윤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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