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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올 추석에도 나 혼자 차례상 차리리?

[추석진담①] 며느리 안 된다면, 너라도 팔 걷어붙여야지

등록|2009.10.01 17:48 수정|2009.10.02 11:18
며칠 전 성묘 갔을 때의 일이었다. 조상님들께 예를 마치고 음식을 먹을 때 올케가 "형님, 이 탕국 드셔보세요. 우리 아들이 끓인 거예요" 한다.

"어디, 이 국을 진짜 조카가 끓인 거야? 어려웠을 텐데. 정말 맛있다. 간도 잘 맞고. 그런데 어쩐 일로 조카가 국을 다 끓였어?"
"내가 나갈 일이 있어서 갔다 와서 하려고 했는데 얘가 어떻게 하는 거냐기에 가르쳐주었더니 이렇게 끓여놨어요. 가끔 이렇게 도와주니깐 아주 편해요. 조카도 주방일 잘 도와주지요?"

"도와주긴 뭘 도와줘. 지가 먹은 것도 치우지 못하고 거실, 컴퓨터 앞, 식탁, 여기저기 안 늘어놓는 데가 없어. 그런 애가 뭘 도와주겠어. 일거리나 안 만들어주면 다행이지."
"얘는 명절에 전도 잘 부쳐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아이가 조카(대학교 3학년)가 끓였다는 국을 한 숟갈 푸더니 "야, 너 무도 아주 예쁘게 썰었다"라고 하면서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본다. 자기가 보기에도 잘 끓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속으로 '아들, 너도 잘 보고 들었지?'라고 생각했다. 조카가 끓인 국 속의 무는 가지런하고 일정했다. 웬만한 여자보다 나았다.

▲ 서울 을지로 4가 중부시장에 장을 보러나온 주부들. 지난해 추석 자료 사진. ⓒ 이승훈


집안일 모르쇠 아들... 결혼하면 달라지려나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 아들이 집안일을 아주 잘 도와줄 것처럼 보이는가 보다. 하지만 직장이 멀어 1~2주에 한 번씩 오는 아들이 집안일을 도와줄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 역시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도와달라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디 이젠 그것이 아예 생활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딸아이가 그 애의 방을 보더니 "엄마, 얘 방이 왜 이래? 꼭 전쟁터 같네" 한다.

"뱀이 허물 벗은 것 같지? 걔가 벗어 놓은 옷은 어떤 것이 빨래할 것인지, 입을 건지 나도 잘 모른다. 어떤 때는 입어야 할 옷을 빨기도 해." 내 대답이었다.

"엄마가 얘한테 일을 시키지 않아서 버릇이 나빠졌어."
"그렇잖아도 결혼하면 싫든 좋든 집안일을 해야 할 텐데 지금부터 뭐 하러 시키냐. 너도 결혼 전에는 설거지 한 번 안 하고 갔잖아."

"엄마, 여자하고 남자하고 다른 점이 바로 그거야. 여자들은 결혼 전에 집안일 하나 안 했어도 결혼하면 달라지는데, 남자들은 안 달라져. 집안일을 그렇게 안 하던 아이가 결혼하면 집안일 할 것 같아? 아마 만날 싸울 거다."
"아무리… 지가 결혼하면 달라지겠지."

하긴 라면도 내가 끓여주다 보니, 아들은 "엄마, 이번에는 무를 넣고 끓여줘. 냉장고에 보니깐 양배추 있던데 양배추 좀 넣고 끓여줘"라며 갖은 주문을 다하곤 한다. 이런 아들인지라 추석에 일을 도와준다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어차피 없는 동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해서 며느리라도 빨리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아들은 서른 둘 나이임에도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 듯하다. 명절 같은 때, 며느리라도 있으면 오순도순 말동무라도 할 수 있어 조금은 덜 힘들 텐데.

▲ ⓒ 정현순


말만 "엄마 도와줄까?"... 접시 들고 TV 앞으로 가는 아들

그런 아들에게 올해 초에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다. 결혼은 됐고, 여자 친구만이라도 올 안으로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아들도 그때는 나름대로 괜찮다 싶었는지 그런다고 하더니 만 아직까지 함흥차사이다. 요즘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되레 "독립한다!"고 으름장을 놓아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는 명절 때만 되면 실컷 자다가 일어나서 "엄마 내가 도와줄 일이 뭐 없을까?"하고 슬슬 주방으로 나오곤 한다. 그땐 이미 내가 일을 다 마쳤을 때다. "이제 와서 그런 말하면 뭐하니? 엄마가 다 했는데"라고 하면, 아들은 껄껄 웃으면서 부쳐놓은 전을 접시에 담아 또다시 TV 앞에 앉기가 일쑤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추석에도 영락없이 혼자 장보고 음식 장만까지 다해야 할 것 같다. 명절마다 되풀이 되는 일. 기제사 때에는 3가지의 전을 부치고 세 가지 나물을 무치지만 명절이다 보니 고사리, 도라지, 숙주, 시금치, 무나물 등 5가지를 무치고, 전도 마찬가지다. 산적, 조기, 탕 등 차례 음식 외에도  딸과 사위, 손자, 동생과 올케, 조카 등 손님들이 오면 먹을 찌개와 반찬 등 손길이 이만저만 많이 가는 게 아니다. 명절 음식은 여기저기에서 충분히 먹었을 테니 칼칼하고 얼큰한 음식을 몇 가지 더 장만해야 한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간단하게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차례 상차림을 하고 나면 왠지 초라하고 먹을 것도 없는 것 같아 식구들한테 괜히 미안해진다. 해서 이왕 하는 거 푸짐하게 하자로 다시 바뀐 것이다.

내 나이 곧 환갑... 내년에는 꼭 결혼해라, 아들!

그래도 명절 연휴동안 혼자 주방에 들어가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일이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장 두 번 갔다 오고, 추석김치만 담가 놓은 것이 전부인데 온 몸이 여기 저기 쑤시는 것 같고, 벌써부터 지친다. 앞으로 할 일은 태산만큼 남아있는데. 나 홀로 명절음식 만들기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이번 명절에는 아들아이가 도와주려나.

그나저나 아들아, 부탁이 있다. 엄마 나이 내일 모레면 환갑이다. 이젠 기운도 빠져서 예전 같지 않단다. 엄마친구 아들이 너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결혼하는 것을 보니깐 어찌나 부럽던지. 하니 올 추석에는 네가 많이 도와주고, 내년에는 꼭 결혼해서 명절에 음식도 같이 만들고 말동무 할 예쁜 처자 한 명 만들어다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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