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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폭탄' 맞은 필리핀 "깨끗한 물이 필요해"

[현지취재] 42년 만의 최악 홍수, 필리핀 퀘존 시티를 가다 - ②

등록|2009.10.01 12:20 수정|2009.10.01 12:20

▲ 태풍 피해를 입은 실랑안 바랑가이의 모습. ⓒ 고두환


도시의 생리가 그럴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대체로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다.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를 통과하는 넓은 도로를 지나서 실랑안 바랑가이(Silangan Barangay : 실랑안 행정구역)로 들어가는 길은 태풍이 오기 직전에 진행하다 멈춰버린 도로 보수 공사 탓에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원래 좁은 길에 큰 트럭 한 대라도 지나갈라치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이 심심찮게 도로에 묶이니 구호물자를 실고 들어가는 트럭 기사들은 조그마한 틈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100여 명의 사상자(현재까지 30여 명 사망, 70여 명 실종)가 예상되는 실랑안 바랑가이, 바랑가이 홀(Barangay Hall : 동사무소) 옆에 마련된 임시 분향소에는 말을 떼지도 못한 아이의 시체부터 동네를 오랫동안 지키던 할머니의 시체까지, 30여 구의 시신이 곱게 화장을 하고 누워 있었다.

참혹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해복구 작업을 하는 필리피노의 모습을,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부모를 잃은 아들의 마음은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방송국에서 중계 나온 카메라가 끊임없이 그들 앞을 맴돌고 있었지만, 리포터는 적어도 그들에게만은 인터뷰할 생각을 쉽사리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 실랑안 바랑가이 공동분향소. ⓒ 고두환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필리핀 일간지 <데일리 인콰이어러>는 실랑안 바랑가이의 아르만도 엔다야(Armando Endaya) 의장의 말을 인용해 "이 틈을 이용해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가격을 보통 가격의 두 배로 올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지난달 30일(수) 인터넷을 통해 보도했다.

시장의 공급과 수요 법칙은 그곳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 지난 30일(화) 밤, 급하게 실랑안 바랑가이를 방문한 수녀들은 결국 자신들이 먹으려고 남겨둔 생수 한 병까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말았다. ⓒ 고두환


여기저기 부족한 물자, 너도나도 혼란스런 실랑안

가옥 800여 채 침수 및 붕괴 그리고 수천 명의 수재민들. 이들은 실랑안 바랑가이 안의 학교와 교회 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실랑안 초등학교(Bagong Silangan Elementary School)에 임시로 세워진 수재민대책본부(Evacuation Center)에서는 밤 10시가 될 때까지 저녁을 줄 수가 없었다. 대책본부의 스태프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2시간 전에 도착하기로 한 트럭이 아직까지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네요. 사람들이 계속 와서 밥을 언제 주냐고 물어보는데…."

30여 분 후, 늦은 저녁이 도착했다는 대책본부의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저녁 식사 트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양은 충분했는데, 초창기 구호품이 들어올 때 부족했던 경험을 사람들은 자꾸 상기하는 듯싶었다.

한편, 한꺼번에 들이닥친 물 때문에 문제가 된 실랑안 바랑가이는 또 다른 물 문제를 겪고 있었다. 사람들이 먹을 물, 씻을 물, 빨래할 물, 집을 정리할 물 등 깨끗한 물을 찾을 길이 없는 탓이다.

"수녀님, 물 한 병만 더 주시면 안돼요?"

식수를 가지고 급하게 이 지역을 방문한 수녀들은 급기야 자신들이 먹으려고 남겨둔 생수까지 아이들에게 주고 떠났다. 곳곳에 널려 있는 쓰레기와 퍼져 있는 악취, 물로 인해 벌어진 또 다른 물 문제로 사람들은 수인성 전염병을 우려하고 있었다.

물자가 들어온다지만 옷가지나 이불 공급도 문제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입고 있던 옷을 더러운 물에 빨아서 곳곳에 널고, 공공장소에 대피한 사람들조차 맨바닥에 누워 자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물자가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긍정적이라고 해야 하는지, 낙관적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내 마음이 삐뚤어지기만 한 건지. 대책본부의 스태프가 여러 곳을 두리번거리는 내게 다가와 미소 지으며 그런 말을 건네자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늦은 밤. 청년조직 'BSYF'가 활동하는 모습. 미리 조사한 지역을 대상으로 구호품을 가른 뒤 단전 지역에 촛불을 이용해 구호물자를 넣어주고 있다. ⓒ 고두환


튼튼한 청년조직이 정부가 못다한 일을 보완한다

200여 명의 사망자, 50여만 명의 이재민.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무지막지한 피해 상황과 비교적 빠른 대응으로 대책을 꾸리고 있는 필리핀 정부의 움직임에 재해지역엔 조금씩이나마 구호물품이 들어오고 있다.

실제 실랑안 바랑가이에는 구호 물품을 실고 들어오는 차량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문제는 좁은 도로 탓에 여러 곳에 구호 물품이 닿지 못한다는 것과 공평하게 구호 물품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이유로 마을에서는 일부 주민들 간에 서로 헐뜯는 소문이 돌기도 하고, 구호차량이나 행렬을 막아서고 자신부터 도와달라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실랑안 바랑가이의 한 경찰관은 "24시간 비상대기를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빼놓곤, 모든 경찰들이 실종자 수색작업에 착수했다"며 "다른 업무를 보기에 일손이 모자라는 게 사실이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주민조직들의 활동은 반갑다. 'BSYF(bagong silangan youth federation)'라고 불리는 청년 조직은 개별 및 조직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과 함께 수해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차량 통행이 원할하지 않고 지역이 비교적 넓은 실랑안 바랑가이에서는 해결될 기미가 없었던 위의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발벗고 나섰다. 특히 이들은 상습침수구역 주민들이나 강 주변 불법점거지역에서 피해를 본 빈민들의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지원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구호품을 전달하고 있는 NGO 아시안브릿지(Asian Bridge)의 '트윙클' 스태프는 "오랜 기간 친목을 도모하고 지역을 위해 좋은 일을 했던 청년 조직이기에 아무런 사심없이 이런 사태에 발벗고 나설 수 있는 것"이라며 "이들은 물자가 곳곳에 공평하게 퍼지게 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조사를 한 후 사정에 맞추어 가장 사정이 안 좋은 사람들을 우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실랑안 바랑가이 임시대피소에 자리잡고 있는 수재민들. ⓒ 고두환


▲ 실랑안 초등학교의 모습. 정리가 되지 않은 교실에서 악취아 싸우며 수재민들은 오늘도 하룻밤을 나야 한다. ⓒ 고두환


갈수록 늘어나는 피해상황, 구호물자 투입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시간이 지날수록 구호의 행렬이 이어지고 마을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는 기미가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필리핀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 상태는 대단하다.

실랑안 바랑가이에서 목수로 일했던 옴씨는 "구호물자가 들어오긴 하지만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을 때가 비일비재하고, 홍수 탓에 무너진 집을 보면서 집 앞 진흙더미에 누워서 자고 있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밤하늘을 보고 한숨 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다"고 한탄했다.

필리핀 국가재난비상국이 "이번 태풍으로 인한 재산피해를 40억 페소(한국 돈으로 1100억 원 정도)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억 페소(한국 돈으로 2600억 원 정도)의 긴급자금이 투입될 것"을 밝혔다고 필리핀 일간지 <필리핀 스타(Philippines Star)>는 지난달 30일(수) 인터넷을 통해 보도했다. 하지만 갈수록 늘어가는 피해상황에 꾸준하고 충분한 구호품 및 인력 공급이 필요하며, 이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국제적 차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필리핀 언론은 뒤늦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바랑가이 차원에서 고무보트를 몇 대씩만 구비하고 있었어도 이런 상황은 없었다", "비교적 사람들이 잘사는 메트로 마닐라의 마리키나(Marikina) 지역이 침수되어 태풍의 피해만큼은 동등했다" 등의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한편, 실랑안 바랑가이를 위해 성금을 모금하고 있던 NGO 아시안브릿지는 현재 진행 중인 지역조사를 마친 뒤 이곳을 지원할지, 아니면 이곳보다 더 어려운 곳을 지원할지 결정할 예정이다.

두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의 죽음 앞에 눈물조차 말라버린 젊은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지금,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긴급 구호 손길과 물자이다.
덧붙이는 글 한국 NGO 아시안브릿지는 현재 실랑안 지역 수재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들은 시티은행 302-03383-266-01 (예금주 : 아시아센터) 입금하신 후 m2gek3@hanmail.net(아시안브릿지 필리핀지부 김근교)으로 메일을 주시면 됩니다. 다른 형태의 도움 역시 위 메일을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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