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눈이 오름
김영갑 갤러리를 나와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전부터 제주 오름을 오르고 싶어 했던 아내가 여행 전 인터넷을 뒤져 찾은 용눈이 오름. 그곳은 오름 중에서도 가장 완만한 편으로 임산부도 무리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아내는 임산부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오름에 오르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에 겸연쩍어하는 눈치였지만 난 오히려 아내의 그와 같은 욕심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한라산도 혼자 다녀왔는데 오름마저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오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드디어 도착한 용눈이 오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름 중턱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돌무덤 군락이었다. 길가 곳곳에, 심지어는 논밭 한 가운데 자리하여 지나가는 이방인들의 이목을 잡는 제주 돌무덤. 좁은 땅에 바람도 세고 돌도 많은 터라 어쩔 수 없이 발달된 제주의 장묘문화일 테지만, 어쨌든 제주도민의 지혜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무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볼거리였다. 과연 제주도 사람들은 저 돌무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무덤은 항상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시금석이 되는 듯하다.
갓길에 차를 세워둔 뒤 아내와 함께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과 나무 한그루 찾아보기 힘든 오름의 풀밭이 한데 어울려 묘한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냥 아름답다고만 하기에는 왠지 부족한, 이국적이고 낯설지만 또 한편으로는 투박한 느낌의 그 풍경.
어쩌면 내가 느끼는 그 투박함은 '오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가 그대로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이름 '오름'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지리시간, 오름을 처음 듣는 순간 그 이름이 왜 그리도 우습고 정겨웠던지. 그건 분명 '뫼'와 다른 느낌이었다. 뫼가 목적의 대상이라면 오름은 이름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오르기에 오름일 뿐이랄까. 산도 아닌 것이, 언덕도 아닌 것이, 무념무상의 공간으로서의 오름.
오름에 오르니 저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 그리고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분명 오름은 오르는 수고에 비해 너무나도 환상적인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슬며시 스며드는 욕심. 기회가 된다면 제주의 오름을 모두 오르고 싶어졌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고? 힘들어도 뭐 어떤가. 목표는 원래 크게 잡는 법. 덕분에 난 또다시 제주를 꿈꿀 테지. 부디 오름에서 바라본 제주의 모습이 그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돈이 된다 싶으면 무조건 부수고 짓는 이 야만의 시대에 그 모든 것들의 안녕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미학이 되어버린 슬픈 시대. 제발 지금의 제주라도 보존되기를.
풍력발전 프로펠러
오름에서 내려오는 길. 저 멀리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프로켈러들이 보였다. 제주의 거센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풍력발전용 프로펠러였다. 제주라는 결코 넓지 않은 공간에서 한정된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만든 고육지책이겠거니.
아마도 많은 이들은 그 거대한 프로펠러 군락을 보며 대체 에너지를 운운할 것이다. 화석연료에서 파생되는 환경오염에서 자유롭고, 한 번 소모되면 사라지고 마는 화석연료와 달리 계속해서 부는 바람을 이용하기에 그 영구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풍력발전에 대한 믿음. 그러나 의문이었다. 과연 바람은 지금의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을까? 풍력발전은 제주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풍력발전에 대해서는 현재 그 부작용이 점차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풍력발전으로 유명한 독일에서조차 적지 않은 이들이 풍력발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풍력발전용으로 만들어진 프로펠러가 환경에 너무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프로펠러가 난잡하게 들어섬으로써 망가지는 풍경은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프로펠러 날개가 일으키는 소음과 빛 공해에서 어떤 생명체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실제로 본 프로펠러는 무지막지한 크기와 소음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언제 저 날개가 잘못되어 나에게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그 접근마저 어려웠다. 그런대도 그 주변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의 삶이 정상적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삶을 저당 잡히고 친환경을 운운하는 우리의 행위는 옳은 것일까?
그러나 이 같은 고민도 잠시. 프로펠러 한 기에 새겨져 있는 '쌍용' 로고에 정신이 퍼뜩 났다. 원자력도 비탄소 에너지이기에 녹색이라고 우기는 정부 하에서 지금 나의 고민은 현실에서 너무 나간 것이 아닌지.
해녀 박물관
오름에서 내려와 근처 식당에서 제주의 향토음식이라는 자리물회를 한 그릇 비운 후 우리가 향한 곳은 해녀 박물관이었다. 제주시를 향하는 중 남는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해녀'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던 탓이었다. 아무리 제주에 테마 박물관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해녀만을 키워드로 박물관 하나는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러나 이런 나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해녀 박물관은 차라리 다른 어설픈 박물관보다 알찬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해녀의 유래에서부터 시작해서 해녀의 역사, 해녀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제주도민의 일상, 해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 여성의 삶, 해녀의 장비와 바다 속 환경, 일본의 해녀 등 그 모든 것들이 키워드 '해녀'를 중심으로 잘 엮어져 있었다.
탄탄한 구성과 실한 내용. 그것은 결코 지자체에서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든 솜씨가 아니었다. 그 숱한 기증자들을 증명하듯이 박물관 건립의 주최는 엄연히 해녀들이었다. 따라서 박물관 곳곳에는 힘든 삶을 영위해오는 해녀들의 애환이 그대로 서려 있었고, 관람객들은 그 진정성에 감복되어 박물관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어떤 관광객이 박물관 한 편에 걸려 있는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낳지)'라는 속담을 보고 해녀들의 삶을 반추하지 않겠는가. 분명 박물관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성공적인 해녀박물관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해녀 박물관과 같은 테마 박물관이 박물관의 또 다른 종류가 아니라 근대 박물관의 진화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근대 국민을 만들기 위해 근대국가가 만든 박물관. 사람들은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역사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남이 아닌, 같은 국민임을 교육받는다. 박물관에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이 되어버린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새로운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근대국민국가체제가 세계적인 기준이 되고 미디어가 발전하는 이상 기존의 박물관들은 위의 기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미디어를 통해 내가 어느 민족, 어느 국민임을 교육받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는데 딱딱하고 재미없는 박물관이 무슨 수로 그들을 꼬드길 수 있겠는가.
따라서 박물관은 이전의 근대식 국민교육의 굴레를 접고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테마 박물관이다. 이제 박물관은 예전처럼 근엄하게 교육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테마 박물관은 친절하게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하나의 국민, 하나의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망각하고 있었던 존재와 그들의 일상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물관을 통해 국민이 되었던 이들이 오히려 박물관을 통해 그들의 삶을 알리는 역설.
해녀박물관을 나와 제주시로 향한다. 이젠 비행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자꾸만 아까 본 오름이 눈에 선하다. 언제쯤 다시 오름을 오를 수 있을까?
▲ 제주의 오름용눈이 오름에서 바라본 다랑쉬 오름 ⓒ 정가람
김영갑 갤러리를 나와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전부터 제주 오름을 오르고 싶어 했던 아내가 여행 전 인터넷을 뒤져 찾은 용눈이 오름. 그곳은 오름 중에서도 가장 완만한 편으로 임산부도 무리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아내는 임산부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오름에 오르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에 겸연쩍어하는 눈치였지만 난 오히려 아내의 그와 같은 욕심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쨌든 한라산도 혼자 다녀왔는데 오름마저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오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제주 돌무덤오름 중턱의 돌무덤 군락 ⓒ 정가람
드디어 도착한 용눈이 오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름 중턱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돌무덤 군락이었다. 길가 곳곳에, 심지어는 논밭 한 가운데 자리하여 지나가는 이방인들의 이목을 잡는 제주 돌무덤. 좁은 땅에 바람도 세고 돌도 많은 터라 어쩔 수 없이 발달된 제주의 장묘문화일 테지만, 어쨌든 제주도민의 지혜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무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볼거리였다. 과연 제주도 사람들은 저 돌무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무덤은 항상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시금석이 되는 듯하다.
▲ 묘한 매력의 오름파란 하늘과 푸른 언덕 ⓒ 이희동
어쩌면 내가 느끼는 그 투박함은 '오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가 그대로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이름 '오름'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지리시간, 오름을 처음 듣는 순간 그 이름이 왜 그리도 우습고 정겨웠던지. 그건 분명 '뫼'와 다른 느낌이었다. 뫼가 목적의 대상이라면 오름은 이름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오르기에 오름일 뿐이랄까. 산도 아닌 것이, 언덕도 아닌 것이, 무념무상의 공간으로서의 오름.
오름에 오르니 저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 그리고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분명 오름은 오르는 수고에 비해 너무나도 환상적인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 오름에서 바라본 풍경저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우도 ⓒ 이희동
덕분에 슬며시 스며드는 욕심. 기회가 된다면 제주의 오름을 모두 오르고 싶어졌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고? 힘들어도 뭐 어떤가. 목표는 원래 크게 잡는 법. 덕분에 난 또다시 제주를 꿈꿀 테지. 부디 오름에서 바라본 제주의 모습이 그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돈이 된다 싶으면 무조건 부수고 짓는 이 야만의 시대에 그 모든 것들의 안녕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미학이 되어버린 슬픈 시대. 제발 지금의 제주라도 보존되기를.
풍력발전 프로펠러
오름에서 내려오는 길. 저 멀리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프로켈러들이 보였다. 제주의 거센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풍력발전용 프로펠러였다. 제주라는 결코 넓지 않은 공간에서 한정된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만든 고육지책이겠거니.
▲ 풍력발전소 프로펠러들그들의 군락 ⓒ 이희동
아마도 많은 이들은 그 거대한 프로펠러 군락을 보며 대체 에너지를 운운할 것이다. 화석연료에서 파생되는 환경오염에서 자유롭고, 한 번 소모되면 사라지고 마는 화석연료와 달리 계속해서 부는 바람을 이용하기에 그 영구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풍력발전에 대한 믿음. 그러나 의문이었다. 과연 바람은 지금의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을까? 풍력발전은 제주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풍력발전에 대해서는 현재 그 부작용이 점차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풍력발전으로 유명한 독일에서조차 적지 않은 이들이 풍력발전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풍력발전용으로 만들어진 프로펠러가 환경에 너무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프로펠러가 난잡하게 들어섬으로써 망가지는 풍경은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프로펠러 날개가 일으키는 소음과 빛 공해에서 어떤 생명체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 거대한 프로펠러위압감을 느낄만 하지 않은가 ⓒ 이희동
▲ 일상 속의 프로펠러제주도민에게 풍력발전소는 어떤 의미인가 ⓒ 이희동
실제로 본 프로펠러는 무지막지한 크기와 소음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언제 저 날개가 잘못되어 나에게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그 접근마저 어려웠다. 그런대도 그 주변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의 삶이 정상적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삶을 저당 잡히고 친환경을 운운하는 우리의 행위는 옳은 것일까?
그러나 이 같은 고민도 잠시. 프로펠러 한 기에 새겨져 있는 '쌍용' 로고에 정신이 퍼뜩 났다. 원자력도 비탄소 에너지이기에 녹색이라고 우기는 정부 하에서 지금 나의 고민은 현실에서 너무 나간 것이 아닌지.
해녀 박물관
오름에서 내려와 근처 식당에서 제주의 향토음식이라는 자리물회를 한 그릇 비운 후 우리가 향한 곳은 해녀 박물관이었다. 제주시를 향하는 중 남는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해녀'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던 탓이었다. 아무리 제주에 테마 박물관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해녀만을 키워드로 박물관 하나는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 제주 해녀박물관준수한 테마 박물관 ⓒ 이희동
그러나 이런 나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해녀 박물관은 차라리 다른 어설픈 박물관보다 알찬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해녀의 유래에서부터 시작해서 해녀의 역사, 해녀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제주도민의 일상, 해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 여성의 삶, 해녀의 장비와 바다 속 환경, 일본의 해녀 등 그 모든 것들이 키워드 '해녀'를 중심으로 잘 엮어져 있었다.
▲ 해녀박물관 기증자해녀들의 노력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 이희동
성공적인 해녀박물관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해녀 박물관과 같은 테마 박물관이 박물관의 또 다른 종류가 아니라 근대 박물관의 진화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근대 국민을 만들기 위해 근대국가가 만든 박물관. 사람들은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역사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남이 아닌, 같은 국민임을 교육받는다. 박물관에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이 되어버린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새로운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근대국민국가체제가 세계적인 기준이 되고 미디어가 발전하는 이상 기존의 박물관들은 위의 기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미디어를 통해 내가 어느 민족, 어느 국민임을 교육받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는데 딱딱하고 재미없는 박물관이 무슨 수로 그들을 꼬드길 수 있겠는가.
▲ 박물관의 변화새로운 박물관의 탄생 ⓒ 이희동
따라서 박물관은 이전의 근대식 국민교육의 굴레를 접고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테마 박물관이다. 이제 박물관은 예전처럼 근엄하게 교육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테마 박물관은 친절하게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하나의 국민, 하나의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망각하고 있었던 존재와 그들의 일상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물관을 통해 국민이 되었던 이들이 오히려 박물관을 통해 그들의 삶을 알리는 역설.
해녀박물관을 나와 제주시로 향한다. 이젠 비행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자꾸만 아까 본 오름이 눈에 선하다. 언제쯤 다시 오름을 오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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