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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스타 '잡리스', '스타킹' 출연 포기한 까닭

이명박이 만든 실업자 가수 '잡리스'

등록|2009.10.12 16:08 수정|2009.10.12 16:09
평범한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MBC어린이 합창단에 들어간다. 여자아이들이 전부였던 합창단에 처음으로 들어간 남자아이. 그는 그때 처음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 집중'의 대상이 되었다. 5,6학년 누나들이 서로 같이 놀자며 떼 쓸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그 남자아이는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올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명박이 만든 실업자 가수, '잡리스'의 멤버로서. 그가 바로 엄태호(34)씨다.

잡리스 공연당당한 아버지로 살고 싶은 그들은 아이들과 학생들 또한 사회문제에 관심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진은 09년 노동절 ⓒ 이호준


용돈 타 쓰는 서른 넷, 촛불을 만나

엄씨가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은 건 고등학생 시절이다. 학생들의 탈선을 방지하기 위해 취미생활을 장려하던 선생님이 노래 잘하는 엄씨에게 합창단을 권유했다. 그렇게 '취미생활'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성악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후 그는 자연스레 대학 성악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 당당하게 국립오페라단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사회는 이제껏 그가 배워왔던 음악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국립오페라단에서 받는 월급 30만 원으로 살아가기란 쉽지가 않아 여러 고민과 방황 끝에 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한다. 4년 후인 2005년, 집안 사정으로  귀국하지만 전공을 살려 다닐 수 있는 직장은 없었다. 그는 돌연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자신과 같은 'B급 음악가'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그는 공연기획을 배우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동시에 돈을 벌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조그만 회사도 창업했다. 그러나 벌이는 없었고, 대학원 등록금 대출로 빚더미에 앉는 신세가 되었다. 엄씨의 이 경험은 잡리스 결성 후, 그들의 노래 '내 나이 서른 하고 네 살'에 고스란히 담겼다.

"내 나이는 서른하고 네 살 / 왜 아직도 용돈 타 쓰나 / 그건 내가 실업자기 때문 / 어떡하죠 구해줘 임영박 / 3백만 개 일자리 만든댔죠 / 취직 안 돼 대학원 갔죠 / 학자금 대출로 빚쟁이죠 / 내 나이는 서른 하고 네 살"
<잡리스, 내 나이 서른 하고 네 살, 노래 : 김우섭 엄태호, 분장 : 최사장, 홍보 : 안대혁, 영상 : 강의석>

'잡리스'의 시작은 '촛불'이었다.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싶고 용돈도 드리고 싶은데, 카드값 문제로 어머니께 전화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렇게 소주 한 잔 하고 회사 사무실로 다시 돌아온 작년 어느 날, 엄씨는 동생(직원)들이 한참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바쁘게 클릭하는 것을 봤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투표를 하고 있던 것. 광우병 쇠고기 수입으로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였다. 그때 동생들과 함께 아고라 투표를 하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고라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서 자신 역시 '촛불'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1월, 마음 맞는 친구들인 최민수(32)씨, 김우섭(34)씨와 술자리에서 "음악으로 세상을 노래하자"고 의기투합했다. UCC영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잡리스'는 네티즌들의 열광적 검색에 힘입어 인터넷 스타가 됐다.

2기잡리스왼쪽부터 김은영씨, 엄태호씨, 최민수씨 새로워지는 '잡리스'가 멤버를 모집 중이다. <club.cyworld.com/job-less> ⓒ 이호준


'잡리스'에게 촛불은 음악이었다. 그들은 많은 소재 중 왜 하필 실업을 노래했을까? 최민수씨는 "실업대란과 공안정국. 이 두 가지가 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큰 사안이라고 생각했어요. 쌍용자동차 문제나 비정규직 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망연자실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라며 자신들을 포함해 이 시대 서민 모두가 '잠재적 실업자'임을 강조했다.

최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한 15년 차 베테랑 음악가이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른으로서 무책임한 일"이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결혼할 여자 친구가 있어요. 잡리스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는 이야기를 못했는데, 인터넷에 점점 알려지니까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자친구가 '잡리스' 활동을 싫어하는 거예요. 사회문제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거죠. 그래서 제가 '훗날 과거를 돌아봤을 때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하면 쥐어터지는 세상, 입시교육에 시달리고 공부하는 기계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어요. 일단은 그 말에는 수긍하고 활동을 인정해주긴 하는데, 아직까지 적극 지지해주진 않네요.(웃음)"

당당한 아버지로 살고 싶은 그는 이제 아이들과 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 가져 줄 것까지 바라고 있었다.

더 넓은 세상을 노래할 '2기 잡리스'

우리 반 반장 임영박 얘기를 할게요 / 울 학교 신문부 땜에 반장이 되었죠 / 반장되기 전부터 근신정학 퇴학 14번이나 있었답니다 / 1학년 때 떡볶이 돌리다 걸려 반장 선거 못나왔죠 / BBK치킨이 지 꺼라고 자랑하다가 / 치킨집이 망하니까 다른 애 꺼라던 / 뻥이 심한 영박 엄석대보다 더 나쁜 임영박 / 우리반 반장 임영박 너 땜에 전학가고 싶다 / 책상 뺏지 말라 하다 맞아 죽은 친구 / 영박이가 그랬죠 우리반을 위해 어쩔 수 없댔죠 / 나는 알아요 임영박 친구 강부자 고소영 위해 그랬다는 걸
<잡리스, 우리 반 반장 임영박>

'우리반 반장 임영박'을 통해 UCC스타가 된 그들은 얼마 전 <SBS 스타킹>에서 출연 제의를 받았다. 단, 조건이 있었다. SBS측에서 사회비판적 가사 내용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실 많이 갈등했어요. 여기서 내용을 바꾸고 우리를 알릴 것이냐. 내용을 지킬 것이냐. 결국 출연 못하겠다고 잘라 이야기 했어요. '잡리스'를 지켜봐주고 성원해 준 네티즌들에 대한 양심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때의 갈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듯 최씨와 엄씨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현재 그들은 그동안의 잡리스 활동과 다른 차원의 '2기 잡리스'를 준비 중이다. 클래식이라는 고정된 장르에서 벗어나 창작곡 밴드로서 활동하려는 것. 물론 그 이면에는 '저작권법'의 문제도 있다. 팀에서 건반을 맏고있는 김은영(33)씨는 저작권법이 인터넷을 경직시키게 될 것임을 우려했다.

"노래방에서 부른 동영상, 자기가 좋아해서 올린 노래 가사, 심지어는 현직 가수가 자신의 곡이 아닌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금지돼요. 저희가 이때까지 만들어 놓은 곡도 모두 버려야만 해요. 하지만 새로운 밴드 활동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잡리스'는 변함이 없을 거예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잡리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세상을 노래했을 뿐인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는 그들. 이제는 많은 네티즌들이 미네르바처럼 혹시 잡혀가지는 않을까 그들의 신상을 걱정한다. 하지만 약자의 편에 서서 잘못된 점을 꼬집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노래하는 잡리스의 활동은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는 '새로운 잡리스'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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