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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속 '안양사', 1100년 만에 실체 찾았다

안양 중초사터에서 명문와편 발견... 문헌 속 기록 실재 확인

등록|2009.10.13 17:27 수정|2009.10.13 18:16

▲ 안양사 명문이 새겨진 와당 ⓒ 김지석





경기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안양 예술 공원 입구의 옛 유유산업 부지 내 통일신라시대의 중초사지 터 발굴과정에서 고려시대 안양사를 추정케 하는 명문기와가 출토돼 안양시의 정체성과 지명유래를 근원을 밝혀줄 획기적인 단서로 평가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이곳에는 현재 신라시대 유물로 유일하게 명문이 있는 중초사지당간지주(보물4호)와 고려시대 유물인 삼층석탑(경기도유형문화재 122호)이 있으며, 예전부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고려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안양사(寺) 터일 것이라는 추정이 제기돼 왔었다.

900년경 태조 왕건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安養寺銘文瓦(안양사명문와편)은 안양시가 옛 유유산업 부지의 복합문화공간 활용에 따른 사업의 일환으로 중초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이 지난 6월부터 발굴 조사를 실시중이다.

안양시와 한울문화재단에 따르면 안양사명문와편은 모두 4점으로, 僧房址(승방지)로 추정되는 터와 동쪽 회랑부근의 부속 건물지 등에서 출토됐으며 와편은 32cm×25cm(사진) 크기로 글씨 크기는 7cm이며 3~4cm 간격으로 3줄의 안양사 명문이 뚜렷하게 적혀 있다.

그동안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안양사 명문기와의 출토는, 그동안 기록으로만 있었던 안양시 지명유래의 근원지인 안양사의 실체를 문헌이 아닌 실제로 존재한 위치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안양시의 정체성과 유래를 밝혀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절터 발굴에 이어 안양사 와당이 출토된 중초사지(옛 유유안양공장) ⓒ 최병렬




안양시 지명유래의 근원을 밝힐 단서 나타나다

중초사지의 발굴은 통일신라 흥덕왕 2년(827년)을 전후한 중초사와 고려시대 안양사의 寺勢(사세)를 함께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발굴 결과 중초사 터 일대에서 남북 폭 14m, 동서 길이 41.4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 등 국가 사적으로 지정할 만한 성과를 쏟아내고 있어 사적 지정 필요성이 부상하면서 김중업 건축물의 리모델링 사업의 전반적인 재검토마저 부상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금천불우조(衿川佛宇條)에는 '안양사(安養寺)가 있어 그 절 남쪽에 고려태조가 세운 7층 전탑이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최영장군이 안양사 7층 전탑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 등을 통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양사 명문 기와 발견에도 현존하는 당간지주에 기록된 통일신라말기 '중초사', 역사적 문헌 속에 등장하는 고려시대 '안양사', 조사지역에서 북쪽으로 북쪽 1㎞ 지점에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안양사' 관계는 의문으로 향후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절터 위에는 6.25전쟁 이후인 지난 1959년 5월 제약회사인 유유 안양공장이 세워져 현재 대부분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이는 한국의 손꼽히는 건축가 김중업(金重業,1922∼1988)이 설계한 초기작품이자 50년대를 대표하는 산업건축물로 문화유산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 안양시는 중초사터에 존재하고 있는 근대건축가 고 김중업 선생이 설계한 근대 건축물의 보호와 함께 이를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을 추진중이나 기록 속에만 존재했던 안양사 실체가 1100년만에 출토됐다는 점에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출토된 지름 20 cm 크기의 귀면와 ⓒ 김지석




안양 중초사터는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문화유산 보고

안양시 관계자는 "지난 6일 발굴된 명문와편을 9일 세척하는 과정에서 안양사로 표기된 와편 발견으로 문헌 속에만 존재해 왔던 안양사의 실체를 보여줄 수 있는 획기적인 유물로 기대된다"며 "이 일대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문화의 보고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까지 수습된 유물은 안양사 명문와편과 함께 통일신라~고려의 치미와 막새 등 기와류와 전돌류, 도자 및 도기편과 용도 미상의 기와, 전돌, 귀면와(지름 20cm사진), 철재 동물 장식 등이 출토되고 있고 안양사 명문기와도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안양시 문화예술과 김지석 문화재담당은 "절터의 흔적이 발굴됐다는 것은 천년 전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고 말하고 "사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금당이 김중업 건축물인 공장동 지하에 있을 것으로 보여 시굴해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 설법단으로 추정되는 강당지 ⓒ 김지석




안양시, 안양사 명문와편 출토에 흥분... 14일 자문회의

이번 발굴조사에서 주목할 내용은 전체적인 건물 배치에 있어 사찰 입구의 돌다리를 건너 남에서 북으로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있고 좌우로 회랑이 있는 황룡사와 흡사한 고대가람의 寺域(사세)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정면 9칸(41.4m) 측면 3칸(14m)의 대형 건물지 강당지에는 說法壇(설법단)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으며, 이는 황룡사지 강당지에서도 발견된 시설물로 중초사당간지주에 명기된 황룡사 주통이 중초사에 머물렀다는 내용에 비추어 두 사찰의 연관성을 비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초사지당간지주를 만들 때 황룡사에서 항창이라는 스님이 파견되어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였다는 대목이 수록돼 있다. 당시 멀리 경주에서부터 감독관을 초빙한 것은 상당히 이채로운 일인데, 그동안 이를 두고 신라판 '공사실명제'였다고 주장하는 사학자도 있다.

한편 중초사지 발굴 현장에서 안양사 명문와편이 출토되자 안양시는 14일 오전 문화재 전문가 및 관계자들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개최해 현재까지 성과를 보고받고 사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금당 추정터의 시굴 등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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