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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화를 꺼내보다, '내 책상 위의 천사'

제인 캠피온 감독, 어른이 된 소녀가 들려주는 희망과 위로에 대한 이야기

등록|2009.10.14 11:30 수정|2009.10.14 11:30
상처 입은 그대에게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음악이 출렁대다 서서히 사라지면 우리는 그 곳에 혼자 남겨진 여자를 본다. 분명 인간사에 대한 영화임에도, 이 영화 속엔 사물과 풍경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때가 있다. 그저 외롭고 혼자였던, 그래서 누구의 '무엇'도 될 수 없었던 주인공이 결국엔 세상과 소통하고 화해할 때, 세상은 더 아름답게 빛난다.

이 영화는, 모든 이빨이 썩어가는 육체적 고통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정신적 혼란을 겪는 여자, 그녀의 육체와 욕망, 슬픔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상처와 고통뿐인 삶에서도 마침내 희망은 발견되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중량감으로 영화는 섬세한 울림을 건넨다. 누구나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바로 그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작은 소녀가 성장하는 이야기는 늘 감동을 준다. 그래서 <내 책상 위의 천사>는 생(生)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한 여자의 우울함과 슬픔이 아니라, 상처 입은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민의 영화다. 영화는 속삭인다.

'괜찮아. 살아있으니까.'

삶을 위한 '아스피린'

▲ 영화<내 책상 위의 천사> ⓒ 이은지

훔친 돈으로 껌을 나눠줘야 친구 소리를 듣는 자넷은 왕따 소녀다.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지만 이 작은 소녀의 특별한 재능은 특별한 외모 때문에 좌절된다. 웃을 때 보이는 썩은 이빨,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 빨강 곱슬머리, 뚱뚱한 몸. 평범하지 않은 외모 때문에 어린 자넷은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점점 타인과의 소통에 서툰 어른으로 성장한다.

세상은 못생긴 여자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꿈이란 게 현실에서는 가혹하기도 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1부 '섬을 향하여'에서 자넷은 언니의 죽음을 겪고 사범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릴 적 쓴 시를 불태우면서 첫 번째 시련을 겪는다.

영화 중간에 자넷이 죽은 언니한테 주는 꽃이 시들지 않게 하기 위해 아스피린을 넣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시(侍)는 삶의 '아스피린'이 되어준다. 점점 혼자가 되어가는 외로운 삶이 더 이상 시들지 않게 해주는 자넷만의 약.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을 위한 '아스피린'을 갖고 있는가.

글, 외로움, 세상 그리고 소통

집과 가족을 떠나 외삼촌 집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또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자넷은 결코 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글은 사람과 세상을 향한 소통도구이다. 그녀가 글 쓰는 일을 통해 현실을 볼 때, 세상을 보는 막연하나마 온기 있는 '시점'이 생긴다. 일상을 깨고 그녀가 수동적인 삶을 떨칠 때, 모든 것이 기적처럼 재빨리 바뀌지는 않는다. 자기 현실에 맞는 소박한 한 걸음, 갖춰진 것 없는 인생은 더디지만 꿈은 오래 덥혀진다.

글은 최소한의 온기를 나누는 소통방법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글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자신을 비춰 세상을 이해한다. 자신이 단지 '못생긴 여자애'일 뿐이거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있는 가짜의 나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던 자넷은 점차 실상 그 모든 모습들을 다 진짜 자신의 모습임을 받아들여 갈 수 있게 된다. 세상과 관계에 불안정하지만 내면에 묘한 기운을 지닌 그녀가 글을 통해 소통을 하면서 외로움과 성장의 고통을 감내해간다. 이 영화에서 고독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선험적 조건처럼 드러나지만 이 고독을 감내할 수 있는 한 여자의 글, 그리고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점차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도, 세상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방법을.

글 속 세계에 수동적으로 박혀 있던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보겠다고 능동적으로 삶을 전환하는 모습이야 말로 영화 속 자넷이 꾸는 가장 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나날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 가는 삶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대개 불가능한 것은 이 나이 때의 우리들에게 거는 사회와 가족의 기대가 큰 탓이기 때문일까. 감독은 그녀에게 글 써서 출세할 수 있는 방법 따위를 쥐어주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당당하게 살 수 있는지를 덜컥 알려주지도 않았다. 자넷의 미래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렸다.

어른이 되는 것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선택하고 결정하고 있는가.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닐 수도 있다. 세상 잣대에 따라 우리의 삶을 먼저 계산하고 미리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내가 꿀 수 있는 꿈의 가능성을 나 스스로 줄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못생긴 것을 장애로 여기는 곳, 그래서 예뻐지기 위해서는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몸을 혹사시켜도 되는 거라고 말하는 세상,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모두가 똑같이 토익 책을 펼쳐들고 학점에 목숨 거는 것이 당연한 게 되어 버린 세상 그래서 남들이 시선이 내 시선보다 중요한 세상.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내 삶을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제대로 소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의 시선에 갇혀 내 삶을 살지 못하고, 그저 연기하고 있을 뿐일지도.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붙잡고 가두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넷이 그녀를 향한 세상의 잣대를 떨쳐버리고 진짜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하면서 점차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처럼.

자넷이 언덕에서 맞지 않는 신발을 벗고 뛰는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성장이란, 혹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현실에 발을 내딛는 것이니까. 그리고 맞지 않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비록 그것이 맨발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뛸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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