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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했음 우린 폴새 부자됐을 거라"

[고창사람들] 방앗간 주인 73세 하종주씨

등록|2009.10.20 21:58 수정|2009.10.20 21:58

▲ 20마력짜리 발동기. 보통은 세 명이 붙어야 시동이 걸리지만, 아저씨는 혼자서도 해냈다고. 나이 들면서 힘에 부치자 이 녀석은 퇴출시키고 버스엔진으로 교체했다 ⓒ 김수복


만나면 얻어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부르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별 말을 안 해도 내가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고, 나를 굳이 웃겨주지 않아도 벙긋벙긋 실없는 웃음이 절로 나오게 된다.

"나야 못났지. 그럼, 많이 못났지. 후회? 에이, 왜 그런 걸 해. 나보다 못한 사람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내가 못났다는 것은 정말로 못났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것이지. 이런 말까지 내 입으로 해야만 되는 것인가? 허허허, 아무튼지 후회 같은 것 할 틈은 없고, 인제는 뭐, 노는 것도 바쁜 판인 걸…."

사실은 바쁘게 같이 놀아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요즘 농촌은 사람 형태만 갖추면 모두 들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면서 주고받는 이야기와 웃음소리를 놀이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농촌에 살면서도 농사일을 할 만한 땅이 한 뼘도 없다. 어쨌든 그는 날마다 잘 논다. 부인과 함께, 몇 통 안 되는 벌을 관리하면서, 개와 닭을 보면서, 가끔은 인생을 온통 바친 방앗간을 둘려보기도 하면서 논다.

73세. 하종주. 아산에서 선운사 쪽으로 가다 보면 만나는 커다란 병바위 앞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온 그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내력을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보면 '싸가지 없다'고 하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종주야, 이렇게 친구처럼 이름을 부르고 싶기도 하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맨 처음 어떻게 방앗간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아저씨는 한참을 생각해보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홰홰' 젓는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동네에 있는 방앗간을 드나들었지만 그게 일이었는지 놀이였는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어린 시절 그는 방앗간 구조와 작동원리에 흥미가 매우 깊었던 것 같다.

▲ 아주 작은 방앗간 전경. 너무 낡아서 비가 새는 바람에 지붕만 새로 깔았다고 ⓒ 김수복


▲ 방앗간 내부 천장쪽. 한때는 열심히 청소도 했지만 이제는 안 한다고. 청소를 기피하는 이유는 같이 늙어가는 동지 같은 느낌 때문이라나 ⓒ 김수복


어린 시절 방앗간은 경외의 대상

하긴 내 경우만 해도 방앗간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벼 가마니를 풀어서 바닥에 쏟아놓으면 낱알들이 구멍으로 솔솔 빨려 들어가는데 그것이 벨트를 타고 위에서 옆으로 다시 위로 그렇게 돌고 돌다가 커다란 저울이 있는 곳에서 새하얀 쌀로 쏟아져 나온다. 야아 이게 뭐냐?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 거지? 제 아무리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방앗간은 어린 내게 조금의 친절도 베풀어주지 않았다.

명절이면 어머니나 작은 댁 누나 혹은 시집 안 간 고모들을 졸래졸래 따라가 보곤 했던 떡방앗간은 또 어떤가. 김을 무럭무럭 뿜어내는 쌀밥을 깔때기 같은 속에 쏟아 부으면 그것이 금방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가래떡이나 떡살이 되어 줄줄이 빠져나온다. 그때 한 점씩 얻어먹는 떡 맛은 집에서 먹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방앗간에서 먹는 떡 맛을 아는 아이들은 명절이면 서로 자기가 짐을 나르는 노동을 감수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그러한 열정도 이내 시들해져 간다. 원리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앗간을 모르면서도 다 아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방앗간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의 어린 시절 방앗간에 대한 관심은 그 차원이 조금 달랐다. 그의 관심은 떡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떡이었겠지만 그 떡은 차츰 먹을 것으로서의 떡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문으로 확장되어 갔다. 이 의문이 이론으로 깊어졌다면 그는 필경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론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느끼는 데서 훨씬 많은 재미를 보았다. 그는 그렇게 서서히 기술자가 되어갔고, 그리고 정식으로 고용되었다.

▲ 버스엔진으로 갈아치운 뒤 스위치만 넣으면 작동이 돼서 편하기는 한데 발동기 시절 맛은 없다고. ⓒ 김수복


평생을 방앗간에 바치고도 변변한 재산이 없을까

"제가 무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니 어떻게 하셨기에 평생을 방앗간에 바치고도 변변한 재산도 없으신 거죠?"

내 기억속 방앗간 주인들은 언제나 돈과 함께 있었다. 방앗간은 방앗간 고유의 역할뿐만 아니라 양곡 중매상 역할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머니는 언제나 두둑했고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는 누구네 논 몇 마지기가 방앗간으로 넘어갔다는 둥 소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방앗간과 돈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남의 방앗간에서 기술자 노릇으로 보낸 세월을 빼고 방앗간 주인 소리를 들은 세월만도 삼십 년이 넘건만 돈 냄새를 전혀 맡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이상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해서 묻는 내게 아저씨는 역시 아저씨다운 대응으로 나를 무안하게 한다.

"사람들이 참 이상해. 아니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가 모르겠어. 물어봤으면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아 그런가 보다, 해야 하는데 또 그것도 아니란 말이거든. 나는 돈 버는 기술자가 아니다. 방앗간 일도 아직 다 모르는데 돈 버는 기술을 배울 틈이 어디 있었겠느냐, 이렇게 말하면 나더러 웃긴다고 놀리는 거야. 그래서 난 이제 그런 질문에 대답 안 하기로 했어."

"돈 버는 기술자가 따로 있나요?"

"아, 그걸 말이라고. 그 대신 그 사람들은 잘 살지는 못하지. 그걸 지켜야 하니까. 지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거든. 재미없는 일이기도 하고. 재미나 마나 나는 애당초 돈 버는 궁리가 없었지 뭘. 그저 일이 좋아서 일을 했을 뿐이고, 오늘날에 와서 보니까 돈이라는 것이 썩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뿐이지."

▲ 오랜만에 일거리가 들어왔다. 물량은 보리 한 가마. 삼십여 분만에 끝나고 다시 휴무. ⓒ 김수복


방앗간 인부들 보수가 약한 것은 이유가 있다

방앗간에 정식 기술자로 고용된 이후에 그는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었다. 결혼을 해서 식구는 보태지는데 살림은 불지 않아 보수가 좀 더 많은 양조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일찍부터 술 빚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방앗간을 못 잊어서이기도 했지만 옛 주인이 방앗간을 이전 확장하면서 그가 감독으로 와 주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기술자도 아니고 감독이라는 칭호까지 얻었지만 그래도 살림은 불지 않았다. 식구는 느는데 수입은 제자리걸음이니 살림살이는 점점 빈한해져 갔다. 이 대목에서 아주머니가 한 마디 거든다.

"그것이 또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 넘들처럼 영악스럽게 했으면 우리도 폴새 부자 되어 운전기사 두고 살았을 것이오만, 그러지를 안혔던 것이제, 그럼. 말이야 바로 말해서 우리는 그렇게 안 살았어라."

아주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방앗간 인부들의 보수가 약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감독도 아니고 감독 밑에 일꾼들도 방앗간 생활 오 년이면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집도 새로 단장한다. 무슨 기술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방앗간 주인은 그것을 잘 안다.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는 종업원들만큼도 모르지만 그 재산이 빠져나가는 구멍의 크기와 위치와 종류는 잘 안다. 알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 방법이 있다 해도 서툴게 막아서는 더 큰 구멍이 뚫려버릴 개연성이 농후하다. 때문에 방앗간 주인은 가장 편안한 방법인 저임금 정책을 고수한다. 알지만 묵인할 테니 적당히만 해먹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못해먹는 사람만 바보천치가 된다. 아저씨는 바보천치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도대체가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돌지를 않았다.

▲ 79년도에 관계당국으로부터 받은 요율표. 권위주의 시절에 자주 사용하던 징수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 김수복


한 달에 겨우 한 두번, 방앗간 시절이 저물다

아주머니도 처음에는 아저씨를 많이 타박도 하고 원망도 했다고 한다. 일만 알고 돈은 모르니 무식하고 무능하다는 생각도 했다. 무슨 팔자를 타고 났기에 저런 못난 사내를 만났을까 신세 한탄도 했다. 아주머니의 그러한 생각이 바뀐 것은 인근에 다방이 생기면서 몰아친 '작은 각시' 바람이 불면서였다고.

"꼴도꼴도 참 눈꼴이 시어 못 봐줄 일이었제. 기나 고둥이나 돈만 좀 만진다 허믄 작은각시 노래를 불러대고 다녔응게. 시절이 또 그런 시절이기도 했어라. 돈이 원체 귀헌 시절이었으니께. 농사꾼들이야 뭐 제사 때나 명절 때 제수거리 사러 간다고 돈을 좀 만져볼까, 돈도 없지만 돈 쓸 일도 없었고. 그란디 방앗간 주변 사람들은 다달이 돈이 들어온단 말이요. 그 돈을 어디다 쓸 것이요. 우리야 논도 밭도 없으니께 돈 쓸 일이 많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제."

"그런데 아저씨는 감독씩이나 하면서도 작은각시커녕 색시집도 안 다니셨다? 영웅호색이라 했는데 아저씨는 결국 영웅은 아니셨군요?"

"아따따, 그 먼 말씸을, 우리 아저씨 그 일 잘 혀라우!"

얼결에 뛰쳐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어매 죽겄네" 하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내 등을 돌린다. 아저씨는 허허 웃다가 머리나 긁적거리는데, 도망치듯 부엌 쪽으로 향하던 아주머니의 입에서 변명처럼 한 마디가 나온다.

"사실은 돈 안 버는 것도 쉬운 일 아니어라. 그것도 기술이여. 사람답게 잘사는 진짜 기술이랑게라."

돈 안 버는 기술을 가졌던 그가 작으나마 어엿한 방앗간 주인으로 나선 것은 칠십년대 중반. 그것도 그 자신이 돈을 모아서 차린 것이 아니었다. 나날이 쪼그라들기만 하는 살림살이를 보다 못한 일가친척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빚을 내어 세워준 방앗간이었다. 아무리 일가친척들이라 해도 그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방앗간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지만 살림 규모는 예나 별 다름이 없었다.

나락장사라는 이름의 상인들이 있었다. 벼를 사 들여서 도정을 한 다음 도시로 내다 파는 상인들이었다. 이들의 농간에 걸려 매년 수백 가마의 도정료를 떼이곤 했다. 이제 그만 속자,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섰을 때는 농협에서 곳곳에 대규모 도정공장을 짓고 영업을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정용 소형 도정기가 보급되면서 아저씨의 방앗간은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많아졌다. 게다가 인구도 쑥쑥 빠져 나갔다. 십여 년 전부터는 한 달에 겨우 한두 번이나 제 구실을 할 정도로 방앗간은 쇠락해 버렸다.

"나이도 들 만큼 들고 했으니까, 이제 좀 느긋하게 놀면놀면 하라는 뜻이지 뭐겠어."

▲ 너무 오래 사용을 안 하던 것이라 피대가 자주 벗겨진다. 그때마다 아저씨는 사다리를 타고 천장 가까이까지 올라가서 마치 서커스단원처럼 거꾸로 서서 피대를 조정한 다음 내려와서 끼워넣는다 ⓒ 김수복


아저씨 왈 "게으른 일부 공무원들이 국민을 범죄로 인도한다"

아주머니와는 달리 '전라도말'을 거의 쓰지 않는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해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평생을 화 한 번 안 내고 살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돈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큰소리를 내기도 한다.

"사람이 돈에 미치면 정신도 미쳐버려. 그렇게 되면 버리는 거지 뭘. 저기 저 사람들이 아주 좋은 본보기지, 그럼."

그가 말하는 '저기 저 사람'이란 농산물 가공공장을 세운다고 조립식 건물 한 동 달랑 지어놓고 정부 지원금 수억 원을 받아 잠적해 버린 사람이다. 한때는 그것도 유행이었다. 현장조사 없이 사진과 서류만으로 도장 찍고 지원금에 융자금 보증까지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돈을 눈먼돈이라고 한다. 그런 눈먼돈을 집행하는 일부 공무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활개를 치며 유지 행세를 한다.

"담당 공무원이 바보 같아서 당했다고는 해도, 저게 어디 공무원 한 사람의 일인가.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내가 낸 세금도 최소한 천 원은 들어갔을 텐데, 응? 이게 어찌 남의 일인가 말이지. 그것만 봐도 나는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해먹고 도망간 그 사람은, 편할까? 아니지. 편할 수가 없는 것이지, 제아무리 뭐라 해도 사람이거늘. 사람이 어째 그런 짓을 하고도 편할 수가 있겠어."

아저씨 주장에 따르면 게으른 일부 공무원들이 국민을 범죄의 길로 인도한다. 형법상 범죄는 차라리 아무 문제도 안 된다. 양심의 죄를 어찌할 것인가. 덮어도 덮을 수 없는 양심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낯은 점점 두꺼워져 간다. 때문에 게으른 공무원은 이중 삼중으로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아저씨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런 게으른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신분보장을 해주는 정부는 어떻게 되나? 이 질문에 대해 아저씨는 이렇게 한 마디 하신다.

"만악의 근원이여, 만악의 근원."

정부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인지 돈이 그렇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다루면 다룰수록 재미도 없고 짜증만 나기 마련이다. 시작을 했으면 끝낼 시기도 적절히 알아서 수습을 해야 하는 법, 나는 한참을 가만히 앉았다가 요즘 생활은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뻔한 질문을 해본다. 그러자 아저씨는 갑자기 신이 나서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설명을 해준다.

꿀벌 열두 통을 관리해서 나오는 꿀을 서울의 딸네가 팔아주니 그것으로 가용을 한다, 한 달에 한두 건씩 들어오는 도정료를 모아보면 일 년에 쌀로 십여 가마나 되니 식량을 하고도 남아 아이들에게까지 보낸다. 게다가 닭을 몇 마리 길러 매일 서너 개씩의 알을 낳아주니 반찬도 부실하지만은 않다. 이만하면 노부부 살아가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뭘 더 바래, 응? 하고 되묻는 아저씨의 눈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진실로 잘살고 싶다면 돈 많이 벌지 마라.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가볍지만, 그러나 머리는 무겁다. 나는 과연 저런 여유만만한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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