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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총각무 먹이는 '나쁜 아빠'

"으, 추버라~!"

등록|2009.10.20 14:22 수정|2009.10.20 14:35
계모보다 더 나쁜 아빠

ⓒ 박철성


수확의 계절이란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황금들녘은 어느새 휑한 속살인 맨땅만 보이는 늦가을이다. 곧 겨우내 먹을 김장을 담그느라 집집마다 부산해 질 것이다.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다름이 없다. 다만 조그만 텃밭에서 김장거리를 직접 재배하다가 담가먹는다는 것이 조금 다를까 그다지 특이한 것은 없다. 그런데 꼭 이맘때면 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처갓집에서 장인어른이 소일거리로 텃밭에 배추랑 무랑 이것저것을 심고 가꾸셨는데, 늘 겨울 김장철이 다가오면 장인어른께선 양보다는 정성이라시면서 "농약 친 농산물보다 약간 벌레 먹은 이것이 백 배 천 배 낳다"고 하시며 얼마 되지도 않는 김장감을 수확하러 오라고 온 자손들을 다 불러 모으신다. 물론 막내 사위인 나도 예외는 없다.

이날은 알타리무(총각무)를 수확하는 날이었다. 통통하게 살찐 무를 보니 마침 어렸을 적에 어머니께서 무밥을 지어주시던 생각이 났다. '그래, 우리집도 내가 어렸을 적에 뒷밭에 무를 심었었지' 그리고 그때 밭에서 어머니가 옷에다 한 번 쓱 문질러 흙을 닦으시고는 이빨로 무 껍질을 돌려서 벗겨 건네주셨던 알타리무 맛도 생각났다. 입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키고 한입 크게 물어먹으면 알싸하고 매콤하면서 달짝지끈한 알타리무의 맛이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그 당시엔 그 어떤 과일보다도 맛있었다. 그래서 함께 텃밭 구경 나온 둘째딸 혜정이에게도 아빠의 옛 추억을 나누어 보고 싶어졌다.

"혜정아, 이리 온! 여기 아주 맛있는 게 있다. 앙하고 입벌려봐!"

내가 먹던 무를 건네주니깐 둘째 딸은 "츱! 츱! 츱!" 빨기만 하고 있다.

"혜정아, 빨지 말고 먹어봐!"

그랬더니 기특하게도 아직 앞 이빨이 두 개밖에 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입을 베어 물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한 손에 알타리무를 든 채 지 엄마한테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인다. 어쩐지 그 폼이 어째 영 수상하다 싶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지 어미한테 가서는 다짜고짜 "우왕~!" 하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이가 아직 이빨도 없는 아기한테 딱딱한 무를 어떻게 먹으라고 줘욧!"
"그게 아니고, 내가 어렸을 적에 무를…."

내 변명은 청명한 가을하늘 위로 고추잠자리랑 함께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처갓집식구들한테 철없는 아빠가 되고 말았다.

"당신은 어쩜, 계모보다도 나쁜 아빠 짓만 골라서 하는 거에욧!"

마누라의 마지막 외침은 가득이나 위축된 나를 졸지에 콩쥐 계모보다, 신데렐라 계모보다도 더 나쁜 아빠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때 텃밭에서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던 중에 둘째딸이 무를 먹던 사진을 발견하였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사진에다 맞추어 몇 자 긁적긁적 나름대로 재미있게 상황을 만들어 적어놓아 보았다. 사실은 아니더라도 내 딸이 커서 나중에 이 사진과 낙서를 보는 것도 아빠에 대한 추억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어째 뒤통수가 무척 따갑게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당신의 속마음이 이제야 드러나는구만! 그때 혜정이한테 억지로 알타리무를 먹인 게 둘째가 딸이라고 은근히 구박한 것이었지!"

뒤에서 내가 낙서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래 다가와서 지켜보고 있었던 마누라는 내가 변명할 틈도 없이 손바닥으로 내 등짝을 마구 때려댄다. 결국 속절없이 매 맞고는 문밖으로 쫒겨나고 말았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 언제 딸이라고 타박했나? 아들 낳아달라고 보챘나? 왜이래?'

문밖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왠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집을 나온 김에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따끈한 어묵 국물에 쇠주 한 잔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밤기운이 차갑다.

"으, 추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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