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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아? 우리 효철이 죽은 날이야"

활동 종료되는 군의문사위 복도에 울려퍼진 어머니의 절규

등록|2009.10.22 10:14 수정|2009.10.22 13:20

▲ 올해 말 '군의무사진상규명위원회'의 업무가 만료될 예정인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중구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군의문사 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한 공정한 조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종이를 붙이고 있다. ⓒ 유성호


"이 위원회가 어떻게 만들어진 위원회야? 어떻게 당신들이 이럴 수 있어? 이건 잘못되었다고 내가 얼마나 얘기했어? 이런 점이 이상하니 꼭 좀 조사해 달라고. 내가 언제 없는 사실 만들어 달라고 했어? 제발 있는 그대로만 조사해 달라고 그렇게 엎드려 빌었잖아. 그런데 군이 협조 안 해서 못하겠다고 핑계만 대고. 오늘 심의 못해. 심의 해봤자 자살로 결론 내릴텐데. 오늘이 어떤 날인줄 알아? 우리 효철이 죽은 날이야. 당신들 알아?"

고 곽효철 상병의 어머니 김운자씨는 절규했다. 21일 오후, 서울 남창동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군의문사위) 회의실에서는 올 12월로 활동이 종료되는 군의문사위의 마지막 정기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미 오전부터 군의문사위를 찾은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애타는 심정을 담은 글을 복도와 회의실 벽면에 가득 붙여 놓았다. '우리 아들 절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와 국가가 죽였습니다', '우리는 자식을 군대 보내 죽게 만든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죽은 우리 진실규명을 원한다'

군에 보낸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기구했다. "군에서도 그랬어요. 턱 밑에 총구멍 말고는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지난 2001년 3월 14일 초소 근무 도중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고 김문환(육군 제 12사단 37연대 1대대) 일병의 어머니 이동애(58)씨는 북받치는 슬픔을 애써 삼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선임병과 함께 초소근무에 투입된 김 일병은 초소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총성이 들린 시간은 저녁 7시 15분경, 김 일병의 사체를 찾은 시간은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군 수사당국은 김 일병이 초소를 벗어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유족들 입장에선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체가 발견되었던 현장이 아주 깨끗했고, 김 일병이 겉에 입고 있던 방한복(스키 파카)에도 피가 묻지 않았던 반면 내의와 방한조끼에는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군 당국은 사고 당일 비가 내렸기 때문에 당시 입었던 겉옷에 묻은 피가 씻겨내려 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유족들이 사고 당일의 날씨를 조사해 본 결과 부대가 위치한 강원도 인제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거나, 1.4mm 정도의 비가 온 정도였다.

유족들은 이런 정도의 비로 겉옷에 묻은 피가 씻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 날 같은 부대로 전입된 김 일병과 김 일병의 동기에게 각각 지급된 총기의 지급 일자가 10일이나 차이가 난 '총기수불대장'을 발견했다. 당시 상황일지에 기재된 사고 전후 시간과 상황을 적은 메모지의 시간이 다른 점도 의문점이었다. 같이 근무했던 장병들의 진술도 평소에 성격이 밝고 명랑했던 김 일병이 왜 자살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군당국은 유족들의 재조사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군은 '타살의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자살로 결론 내렸다'고 유족들에게 밝혔다. 군의 설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족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명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아들 죽은 이후 문환이 아빠가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그 날도 문환이 아빠가 시신이 보관되어 있던 국군철정병원 갔다 오는 길이었어요. 같이 갔던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선 '문환이 아빠 얼굴색이 아주 이상하니 병원에 데리고 가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선 새까만 변을 보더라구요. 나중에 병원에선 혈관이 터졌다고 하더라고... 그리고는 4개월 만에 애 아빠도 세상을 떠났지요."

아버지 김광기(당시 52세)씨도 김 일병이 숨진 뒤 1년 3개월 만에 아들의 뒤를 따랐다. 스트레스성 간부전이었다. 이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4일 전 김 일병의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렀다. 그래야 남편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문환이 아빠가 세상 떠날 때도 눈을 못 감고 갔어요. 애 아빠 눈 감겨주면서 울면서 얼마나 다짐을 했는지 몰라요. 꼭 우리 아들 진실 밝혀서 국립묘지 보낼 테니까, 편히 눈감고 가시라고."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이 쉽지 않았다. 네식구가 오순도순 살던 가정은 한 순간에 깨져버렸다. 다른 군의문사 유족들과 꽁꽁 언 한겨울 아스팔트 위에서 노숙을 하면서 죽음의 진상을 밝혀줄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했다. 유족들의 애타는 노력으로 '군의문사진상규명등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06년 2월 군의문사위가 탄생했다.

▲ 올해 말 '군의무사진상규명위원회'의 업무가 만료될 예정인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중구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군의문사 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한 공정한 조사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2006년 한해 동안 위원회에 진정된 군의문사 사건은 모두 604건.

특별법에 따라 군의문사위는 작년 연말로 활동기간이 끝날 예정이었지만, 진통 끝에 가까스로 1년을 연장해 해결하지 못한 250여 건에 대한 조사활동을 벌여왔다. 하지만 유족들이 요구하는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기에는 군의문사위가 지닌 한계가 명백했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핵심 당사자가 진술을 거부하거나 조사에 응하지 않아도 이를 제재할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 진상규명을 하려면 오로지 조사관들의 '발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날 심의된 44건의 군의문사 사건은 위원회에 접수된 604건 중 처리되지 않은 마지막 사건들이다. 유족들은 군의문사위가 자살규명위원회라고 성토한다. 유족들이 아무리 자살이 아니라는 근거자료를 제시해도, 의문사위 조사관들은 군수사기관인 헌병대의 수사 자료를 기초로 삼아 조사를 벌이기 때문에 그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

군의문사 유족들은 당초 군 당국의 수사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수사권이 없는 군의문사위로선 사건을 원점에서 재조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딜레마다. 유족들은 위원회가 유족들이 요구한 의문사항들을 명백히 밝혀주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여러 가지 요인으로 조사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진정인의 진정 의혹을 해소하기 어려운 경우'에 해당하는 '진상규명 불능결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래야 어떡해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싸워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고 곽효철 상병의 어머니 김운자씨는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는 국가에 그 관리를 맡긴 것인데, 국가는 나 몰라라 한다면 누가 그 국가를 위해 아이들을 군대에 보내겠냐"며 "아직도 군의문사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을 정부나 정치권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려고 군대에 가서 죽었는데, 그 억울한 사연이라도 속 시원히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신성한 의무 아닌가요?"

어느 어머니의 울부짖는 소리가 군의문사위 복도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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