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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45) 졸저(拙著)

[우리 말에 마음쓰기 782] '무전귀향(無錢歸鄕)'과 '빈손-빈털털이'

등록|2009.10.23 11:26 수정|2009.10.23 11:26

ㄱ. 졸저(拙著)

.. 한국에서 나의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출판된 졸저(拙著)의 원본 《한국원영》과 더불어 만족할 만한 출판이 되었고 ..  《구와바라 시세이/김승곤 옮김-촬영금지》(눈빛,1990)

 '나의'는 '내'로 고치고, '출간(出刊)하게'는 '내게'나 '펴내게'로 고칩니다. '출판(出版)된'은 '나온'으로 다듬고, '원본(原本)'은 덜어냅니다. '만족(滿足)할'은 '흐뭇할'이나 '반가울'이나 '기쁠'로 손봅니다. 글 끝에 다시 나오는 '출판'은 '책'으로 손질합니다.

 ┌ 졸저(拙著)
 │  (1) 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저술
 │  (2) 자기의 저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 귀한 시간을 내어 저의 졸저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일본에서 출판된 졸저(拙著)의 원본 《한국원영》
 │→ 일본에서 펴낸 책 《한국원영》
 │→ 일본에서 펴낸 《한국원영》
 └ …

 글쓴이 스스로 내놓은 책을 '서투르'거나 '보잘것없'다며 낮추면서 넣는 '졸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 마디 집어넣어 주어야 비로소 고개숙이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말을 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말마디가 없어도 고개숙임을 느끼도록 해 줍니다. 정 어떤 말마디를 넣고 싶다면, '졸저' 같은 말마디보다 '어줍잖은'이나 '보잘것없는'이나 '형편없는'이나 '모자란'을 있는 그대로 적어 주면 됩니다. 이 보기글을 우리 말로 옮긴 분은 '졸저'라고만 적어 놓으면 못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까 봐 '졸저(拙著)'처럼 적었습니다만, 이렇게 적는들 한결 잘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한글로만 적었을 때 올바르게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는다고 해서 더 잘 알아듣도록 이끌지 못할 뿐더러, 더 엉뚱하게 읽도록 내몰고 맙니다.

 ┌ 일본에서 낸 여러모로 어줍잖은 내 책
 ├ 일본에서 나온 무척 어설픈 내 책
 ├ 일본에서 처음 내놓은 몹시 보잘것없는 내 책
 ├ 일본에서 처음 만든 더없이 모자란 내 책
 └ …

 우리는 우리 토박이말을 쓰면서 우리 스스로를 한껏 높일 수 있고, 한껏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 글로도 얼마든지 다소곳함과 얌전함과 고개숙임을 넉넉히 담아낼 수 있어요. 담아내려고 애쓰지 않으니 자꾸자꾸 못 담아낼 뿐이요, 담아낼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언제까지나 못 담아내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살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죽습니다. 생각을 하며 말을 하는 사람은 말에 힘과 슬기와 사랑을 담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며 말을 하는 사람은 말에 아무런 빛이나 느낌을 담지 못합니다.

 ┌ 귀한 시간을 내어 저의 졸저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바쁜 틈을 내어 제 책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바쁘신 가운데 제 책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꼭 곱거나 아름답게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굳이 거칠거나 못난 모습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할까 궁금합니다. 같은 말이라면 좀더 사랑을 담을 때가 더욱 나으리라 봅니다. 어차피 쓰는 글이라면 알알이 믿음을 실을 때가 훨씬 좋다고 느낍니다.


ㄴ. 무전귀향(無錢歸鄕)

.. 게다가 섬에서 나와 다시 발 딛은 인도에서 나는 두 번째 도둑까지 만나 또 홀라당 털려 버렸으니, 또다시 한국으로 무전귀향(無錢歸鄕)할 수밖에 없었고 ..  《이유경-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2007) 184쪽

 '심지어(甚至於)'라 않고 '게다가'라 한 대목, '재차(再次)'라 않고 '다시'라 한 대목, '접(接)한'이라 않으며 '발 딛은'이라 한 대목, "한국을 향(向)해"라 않고 "한국으로"라 한 대목이 모두 반갑습니다.

 ┌ 무전(無錢) : 돈이 없음
 │   - 무전 승차 / 그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무전으로 여행했다
 ├ 귀향(歸鄕) :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   - 명절 전날 기차역은 언제나 귀향 인파로 북적대었다
 │
 ├ 무전귀향(無錢歸鄕)할 수밖에
 │→ 돈 없이 돌아올 수밖에
 │→ 손가락 빨며 돌아올 수밖에
 └ …

 마땅한 노릇일 텐데, 국어사전에 '무전귀향' 같은 낱말은 안 실립니다. 이렇게 쓰는 일은 잘못이 아니며, 누구나 이런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은 잘못 읽거나 엉뚱하게 헤아릴 수 있기에, 글쓴이로서는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어 줍니다.

 ┌ 빈털털이로 돌아올 수밖에
 ├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 알거지가 되어 돌아올 수밖에
 └ …

 돈 한푼 없이 고향나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무언가 재미난 말로 나타내고 싶었을까요. 깡그리 빈털털이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까요.

 빈털털이인 채 돌아간다고 하면 '빈털털이'라고 해 줍니다. 가방도 짐도 도둑맞아서 없으면 '빈손'이나 '빈몸'으로 돌아간다고 해 줍니다. 그야말로 비행기삯마저 빌려서 돌아가야 할 노릇이라면 '알거지'가 된 채 돌아간다 할 수 있습니다.

 ┌ 무전 승차 → 돈 없이 탐
 ├ 전국을 무전으로 여행했다 → 나라 곳곳을 돈 없이 다녔다
 └ 귀향 인파로 →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 물결로

 그러고 보면, 돈이 없는 모습을 가리킬 때에는 '돈없다'처럼 한 낱말을 지어서 써 보아도 어울립니다. 돈이 있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는 '돈있다'와 같은 낱말 하나 지어도 괜찮습니다.

 "돈있는 사람-돈없는 사람"처럼 적으면 되고, 그냥 "있는 사람-없는 사람"처럼 적어도 됩니다.

 한자말 '귀향'만큼은 털어내기 싫다면, '빈몸귀향'이나 '빈손귀향'이나 '맨몸귀향'이나 '알거지귀향'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우리 스스로 알아보기 나름입니다. 우리 스스로 찾아보기 나름입니다. 생각하고 알아보고 찾아보면 한결 알맞고 살갑고 싱그럽게 느낄 낱말과 말투를 넉넉히 살려쓸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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