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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90) 미친바람

[우리 말에 마음쓰기 783] 한자말 '광풍'과 우리 말 '미친바람'

등록|2009.10.24 16:20 수정|2009.10.24 16:20

ㄱ. 미친바람 1

.. 영어 광풍이 또 다시 온 나라를 들썩이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딱 맞는다. 어쩌자고 우리 사회는 자꾸 영어라는 주술(呪術)에 걸려들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수년 전 시작된 영어공용화 논쟁이 사라졌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제주도의 영어공용화 추진을 비롯해 경기도가 파주시와 안산시에 영어마을 건립을 추진 중이고, 서울시도 여러 곳에 영어체험마을을 건립할 예정이란다. 이미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영어마을을 시행 중이거나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시에서 공식문서나 국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영어를 사용하자는 영어공용화를 내년 중 실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  〈경향신문〉 2003.12.27.

 2003년에 나온 신문기사를 2009년에 돌아봅니다. 그때와 이때를 견줄 때 달라진 대목이 있으랴 싶고, 나아진 대목이 있는가 궁금합니다. 영어에 얽매이는 미친바람은 나날이 더욱 거세어지고, 우리 생각과 삶 모두 이 미친바람한테 휘둘릴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이러한 미친바람을 더 거세게 부채질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앞으로 여섯 해가 더 지나 2015년이 되었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신문기사가 실리기만 할 뿐, 우리 삶터는 하나도 나아지지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을 쓰는 기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부모도,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지식인도, 여느 자리에서 하루하루 삶을 꾸리는 우리들도, 스스로 옳고 바르고 알맞고 손쉽게 주고받는 말마디하고는 담을 쌓지 않으랴 싶습니다. 미친바람을 잠재울 생각은 않고, 미친바람이 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며, 되레 미친바람을 스스로 불러들이기까지 하면서.

 ┌ 미친바람 : 일정한 방향도 없이 마구 휘몰아쳐 부는 사나운 바람
 ├ 광풍(狂風)
 │  (1) 미친 듯이 사납게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
 │   - 광풍이 불다/광풍으로 흔들리는 나뭇잎
 │  (2) 갑자기 또는 무섭게 일어나는 기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60년대 말부터 일어난 공업화의 광풍으로 농촌의 인구는 점점 줄었다
 │
 ├ 영어 광풍 (x)
 └ 영어 미친바람 (o)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미친바람'이라는 토박이 낱말이 하나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광풍(狂風)'이라는 한자말이 하나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풀이를 살피면, '미친바람'은 달랑 하나요, '광풍'은 두 가지입니다.

 두 낱말은 마구 휘몰아치는 거세거나 사나운 바람을 가리키는 뜻이 똑같이 있는데, 한자말 '광풍'만 둘째 뜻이 더 있다고 나옵니다. "갑자기 또는 무섭게 일어나는 어떤 흐름"을 가리키는 둘째 뜻이.

 그러면, 우리들은 '광풍'이라는 한자말을 쓸 때에만 이 둘재 뜻인 "갑자기 또는 무섭게 일어나는 어떤 흐름"을 가리킬 수 있을까요. 토박이말 '미친바람'으로는 이러한 뜻을 가리킬 수 없을까요. 둘째 뜻을 가리키는 자리에 토박이말 '미친바람'을 넣으면 알맞지 않을까요. 우리 국어사전에서 '미친바람'이라는 낱말에 뜻 하나를 더할 마음은 없을까요.

 ┌ 광풍이 불다 → 미친바람이 불다 / 바람이 미친 듯이 분다
 ├ 광풍으로 흔들리는 나뭇잎
 │→ 미친바람으로 흔들리는 나뭇잎
 │→ 미친 듯이 부는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나뭇잎
 ├ 공업화의 광풍으로
 │→ 공업화라는 미친바람으로
 │→ 공업만 부추기는 미친바람 때문에
 │→ 공업만 앞세우는 미친바람 탓에
 └ …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한자말 '광풍'은 말뜻 그대로 "미친(狂) + 바람(風)"입니다. 우리 말 '미친바람'을 한자로 옮겨적으니 '狂風'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미친바람' 한 마디면 넉넉하지 않았으랴 싶은데, 언제 누가 왜 '광풍' 같은 한자말을 썼는지 궁금합니다.

미친 듯이 부는 바람이라 '미친바람'이라 하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라 하여 '살랑바람'이라 하며, 곱게 부는 바람이라 해서 '고운바람'이라 하면 알맞다고 느낍니다. 사람들마다 사랑이 가득하다 할 때에는 '사랑바람'입니다. 사람마다 돈타령이라면 '돈바람'입니다. 사람들이 온통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한글바람'일 테며, 오늘날 같은 모양새라면 '영어바람'입니다.

 한 가지 더. '-바람'을 뒷가지로 삼아 여러 가지 새 낱말이 샘솟듯, '미친-'을 앞가지로 삼아 온갖 새 낱말이 태어납니다. 우리 삶터를 온통 휩쓴 '광우병'이 아닌 '미친소병'이요, 개한테 놓는 '광견병 예방주사'가 아닌 '미친개병 예방주사'입니다. 중국사람 뤼신이 남긴 문학은 중국사람한테는 '광인일기'이지만, 우리한테는 우리 말로 옮겨 '미친이 일기'나 '미친이 이야기'입니다.

 ┌ 광견(狂犬) → 미친개
 ├ 광우(狂牛) → 미친소
 ├ 광인(狂人) → 미친이
 └ …

 얼이 빠지는 사람을 가리켜 미쳤다 하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 하여 미쳤다 하며, 몹시 괴로울 때 미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어떠한 일에 푹 빠져 있을 때 미친다고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미쳐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좋은 쪽으로든 궂은 쪽으로든 미치는 일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미치고 믿음에 미치며 즐거움에 미치고 웃음과 눈물에 미치는 적이 있는 우리들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ㄴ. 미친바람 2

.. 1984년 겨울 오대산을 등반할 때 어느 능선에선가 만난 미친 바람은 또 어떠했는가 ..  《남난희-낮은 산이 낫다》(학고재,2004) 224쪽

 "오대산을 등반(登攀)할"은 "오대산을 오를"로 다듬어 줍니다. 글쓴이는 '미친 바람'을 띄어서 적었으나, 이 낱말은 '미친바람'처럼 붙여야 올바릅니다.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제법 많은 분들은 '미친바람'이 한 낱말인 줄 모르고 있지 않으랴 싶고, '미친-'을 앞가지로 삼는 새 낱말이나 '-바람'을 뒷가지로 삼는 새 낱말을 빚어낼 생각을 거의 못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 미친바람
 └ 미친 듯이 부는 바람

 미쳤구나 하고 느끼기에 미친바람입니다. 미쳤구나 하고 여기기에 미친짓입니다. 미쳤구나 하고 받아들이기에 미친일입니다. 미쳤구나 하고 보기에 미친놈입니다. 미쳤구나 하고 헤아리기에 미친꿈입니다. 미쳤구나 하고 생각하기에 미친사람입니다.

 정치나 사회나 문화나 교육이나 예술을 놓고도 미친정치나 미친사회나 미친문화나 미친교육이나 미친예술이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나 연극이나 춤이나 노래를 놓고도 미친사진이나 미친그림이나 미친글이나 미친연극이나 미친춤이나 미친노래라고 다룰 수 있습니다.

 옳지 못한 책이라면 '미친책'이라 해도 되겠지요. 시커먼 돈이라면 '미친돈'이라 해도 될 테며, 그릇된 길이라 하면 '미친길'이라 해도 됩니다. 미친신문이 있고 미친방송이 있으며 미친학교가 있습니다. 미친도시가 있고 미친나라가 있으며 미친겨레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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