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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홧발에 밟히고서야 세상 보는 눈 떠...

시민운동을 움직이는 힘 - 참 부러운 '내 인생의 첫 수업들'

등록|2009.10.26 13:47 수정|2009.10.26 13:47
그 열혈(熱血), 하마터면 델 뻔했다. 겨우 자기 앞가림이나 하고 사는 주제가 부끄러웠던 탓이다.

책 <내 인생의 첫 수업>순수한 열정으로 삶을 일궈온 것은 그들 몫의 축복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축복은 그들로 인해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 '시민 대중'이다. ⓒ 두리미디어

안온(安穩)한 학창,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 싶었던 얌전한 대학 새내기의 상식이 군홧발의 폭력에 뒤집어지던 그 날을 그는 끝내 잊지 않고 살고 있었다. 아마 회갑 나이 부근에 이르렀을 그가 여태 지니고 산, 붉고 뜨거운 피를 뿜어 올린 심장의 용솟음을 읽은 그날 밤을 필자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풀려나와 내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 내가 한갓 군홧발에도 자근자근 짓밟힐 수 있는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 너무 슬퍼서, 그 비참함에 울었다. 나라란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첫 수업이었다. 정부도 군대도 경찰도 나를 짓밟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배운 거였다.'

이런 '배움'을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適用)하였던가.

'... 나는 다짐하였다. 권력이 부당하게 국민을 짓밟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 새벽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오늘까지 사람이 온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향한 미완의 꿈은 오늘도 내가 살아가는 중요한 존재 이유이다.'(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1부] 희망을 말해주던 스승
그의 질긴 삶 _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 / 싸가지 없던 학생의 스승 _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 / '소도둑놈' 선생님의 혼 _정찬용(전 청와대 인사수석) / 교도소에서 배운 삶 _김제선(풀뿌리사람들 상임이사) / 어머니의 수업 치매 _고은광순(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대표) / 동양고전과 정치학자 _배병삼(영산대 교수) / 내 이름의 자존감 _김금옥(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 데모도 못하는 대학 _송재봉(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 / 영국인 스승 _서순탁(시립대 교수) / 친구의 충고 _권미혁(여성민우회 대표) / 나눔을 실천하는 책임 _김혜경(지구촌나눔운동 사무총장) / "남의 행복을 생각하라."_김영호(유한대 총장) / 유머를 잊지 말라 _나효우(아시안브릿지 운영위원장) / 학문의 즐거움 _조명래(단국대 교수)
[2부] 시대와 역사, 나
독일에서의 '5월 광주' _정범구(전 국회의원) / 중대장의 눈물 _이지문(전국민주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원) / '보도지침사건'이라는 인생수업_김주언(시민사회신문 편집인) / 단칸방 아이들의 죽음 _이은애(함께일하는재단 사무국장) / '여자 공원'에서 '여성노동자'로 _최순영(민노당 최고위원) / '똥물세례' 노동자와의 만남 _남윤인순(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 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_이학영(YMCA전국연맹 정책기획실장) / 노조결성 2시간 만의 계엄령 _배옥병(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상임대표) / 피 흘리던 현실 _권영국(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현안대응팀장) / 촛불바다의 무대 _노정렬(개그맨)
[3부] 실천과 배움을 나누는 꿈
고난의 수업 _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학생들로부터 배운다 _정진화(전 전교조 위원장) / 꼬리치레도롱뇽과 막걸리 _박병상(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 농촌학교 지키기 _전성환(YMCA전국연맹 정책기획실장) / 부족함 속의 여유 _김혜애(녹색연합 녹색교육센터 소장) / 본전 뽑은 수업 _김언경(전 민주언론시민연합 협동사무처장) / 사회 변화의 목적 _오성규(환경정의 사무처장) / 아토피 아이들 _박진섭(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 / 백혈병에서 살아남기 _강주성(전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 IMF를 딛고 선 마음들 _위정희(경실련 기획실장) / 후회 없는 선택 _이화영(서울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센터 국장) / 희생은 안 된다 _이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4부] 삶, 새로운 깨달음
아직도 갚지 못한 인생의 빚 _김성훈(환경정의 이사장) / 가난한 이웃으로 온 예수 _문창식(간디문화센터 대표) / 의약분업 논쟁의 광기 _이상윤(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 / 택시기사들과의 연대 _박세길(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 '짜고 치던' 수업 _김성인(광주참여자치21 대표) / 농활서 먹은 꿀맛 감자 _이유정(민주사회를여는변호사모임 과거사위원장) / 하늘나라 어머니와 _정청래(전 국회의원) / 대안은 우리 안에 _조희연(성공회대 통합대학원 원장) / 산골서 찾은 한 수 _곽노현(방송통신대 교수) / "차라리 유학 가게나" _김남근(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변호사) / 다방 디제이가 겪은 열병 _지금종(전 새진보연대 대변인) / 어쭙잖은 '위장취업' _오관영(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 / 산자락에 뿌린 청춘 _김성희(비정규노동센터 소장) / 사람들 속으로 _남효선(시인) / 낙선의 결과 _이장희(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수업은 계속된다 _최승국(녹색연합 사무처장) / 인생의 중간성적표 _이승희(경제개혁연대 사무국장)

시민사회를 위한 절대적인 헌신(獻身)으로 삶의 뜻을 삼는 이들을 이 책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회 디자이너'라고 정의했다. 박원순씨가 자신을 소셜 디자이너라고 칭한 것을 염두(念頭)에 둔 것이리라.

명칭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산다. 이 책은 그 빚의 구체적인 명세표인 셈이다. 시민운동과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우리 사회 일부의 비뚤어진 시각과 험구(險口)에 대한 경쾌한 대답이라고나 할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삶의 모습은 들여다보니 또 새로운 경지(境地)였다. 서너 명도 아니고 53명이나 되는 그 빚쟁이들을 감당하기가 어찌 쉬운 일이었을까, 책을 들고 내내 속으로 '고맙소' '참 고맙소'를 연발(連發)해야만 했다.

처음 들어보는 스승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얘기는 그 때를 짐작할 수 있는 나이인 이 제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된 이유가 가난 때문이었다니, 또 당신이 세상에 진 빚이 얼마나 큰 것인지 등을 토로(吐露)하는 낮은 목청에서 대한민국의 생명농업과 환경을 새롭게 디자인한 동력(動力)을 새삼 다시 읽었다.

'... 그 때 오종근 한문선생님이 오시더니 근처 당신의 댁에 가서 사모님께 쪽지를 전해달라고 하셨다. 눈물을 훔치며 달려간 나에게 사모님은 돈을 담은 누런 봉투를 주시며 얼른 서무과에 가서 의무금을 내라고 하셨다. 내 인생은 이렇게 빚을 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돈을 못내 못 본 독일어 시험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험을 다 볼 수 있었다.'(아직도 갚지 못한 인생의 빚 - 환경정의 이사장 김성훈 교수)

자신의 병(病)을 터전으로 고달픈 모두를 돕는 역할을 해 낸 이 인사의 위무(慰撫)와 노고는 '동료' 환자들에게 참 큰 힘이 됐겠다.

'... 병은 내게 가장 강력한 첫 수업이었다. 이 병은 나를 질병의 '당사자'로 만들고 시민운동을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환자의 '관점과 입장'을 만들게 했다.'(백혈병에서 살아남기 - 강주성 전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언젠가 나이 지긋한 택시 운전사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박원순이란 사람, 대통령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요?"하고 물었다. 이런 질문, 특히 택시에서의 이런 대화를 싫어하는 성격인데도 필자는 대뜸 "그 양반, 뜻 그릇은 큰데 욕심 그릇이 작아서 대통령쯤은 생각조차 안 할 거요"하고 답해줬다. 허망한 취객(醉客)이라고 여겼겠다. 그 '문제의' 박 변호사가 이 책에서 직접 대답했다.

'... 시민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온갖 영역에서 팔방미인이 되지 않으며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돈도 벌어 와야 한다. 이런 이중고에서 해방되기가 어렵다. 월급은 없거나 작게 받는다.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길을 걷던 독립운동가나 다름이 없다.'(고난의 수업은 계속된다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을 반찬 삼고 한데서 잔다는 말이 '대통령 생각 하는지도 모르는' 명사(名士)에게 가당키나 한 표현인가? 박원순은 '뻥'이 센 사람인가? 뜻은 곱지만, 얼마나 배고프고 식구들 자손들 못살게 하는 것이 독립운동 아닌가. 참 못 믿을 쪼잔한 사람일세. 이런 생각이 어쩌면 일반 시민들에게는 가능할 것이다. 생각의 차이, 그 괴리(乖離)는 심각할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의 여러 모습을 꽤 오래 지켜봐온 고참 기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대중(大衆)'들의 생각에 운동가들 스스로의 탓도 없지 않다. 민초(民草) 풀뿌리 인구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동의와 사랑을 얻어내고, 그 토대에 굳건하게 선 것이 아닌 이상 지금의 '이름'이 사상누각(砂上樓閣)은 아닌지 저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더 많이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노력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오래 가져왔다. 이 부분 변화는 여전히 없고. 이 책의 출간은 그들도 스스로 이런 '부족'을 보완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가. 구차한 느낌 들 정도로 솔직한 고백이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이 인사(人士)가 있어서 내심 안심이 된다는, 좀 비겁하고 엉큼한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들, 특히 전두환 정권의 언론보도지침을 폭로한 시민사회신문 김주언 편집인이나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과 같은 언론 동네 '동업자'들의 얘기도 반가웠다. 어찌 그들뿐이랴?

그들 삶의 전환점(轉換點)이 된 귀한 수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축복이었겠다. 그 수업의 교훈(敎訓)을 내내 지니고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더 큰 축복이었겠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이 사회 디자이너들의 헌신으로 행복(幸福)을 누리는 필자를 비롯한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이 책 <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 刊)은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가들이 그들의 언덕인 시민들에게 보낸 유쾌한 인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www.ingo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시민사회신문 논설주간 겸 한자교육원 예지서원 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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