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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나는 부처였다

필름 사진을 스캔하면서 정리한, 꿈보다 해몽 같은 추억

등록|2009.11.04 15:35 수정|2009.11.04 15:35
참 무례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고, 관념적이라 할 만큼 불상 자체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죽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을 만큼 버릇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사진을 정리하며 추억한 과거에 대한 꿈보다 해몽일 뿐입니다.

▲ 머리만 봐서는 영락없는 출가자의 모습인 중학교 시절입니다. ⓒ 임윤수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몇 년간 벼르기만 할 뿐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던 사진을 정리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틈틈이 필름사진을 디지털화하기 위해 스캐닝을 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거반 40년 가까운 세월이 담긴 추억이며 사진들입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알기에 사진에 찍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40년이라는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사진 수가 꽤 됩니다.

칼라사진이 이미 나와 있었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976년 3월까지 찍은 내 사진들은 전부가 흑백사진이고 그 이후부터는 흑백사진과 칼라사진 석여있습니다.

중학생 때, 삭발한 출가자 모습

빡빡 머리에 잿빛 옷을 입는 것으로 출가수행자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중 3이었던 1975년도의 나는 영락없는 출가자의 모습입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의 선생님들, 특히 학생과 선생님들의 끗발은 서슬이 퍼렇게 나부끼던 시절이었습니다.

중3이었던 어느 날, 교문에서 두발검사를 하던 학생과 선생님이 머리가 규정보다 조금 더 길다는 이유로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밀어버린 데 대한 항의로 이른바 '백호머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규정을 어겼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마에서 뒤통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열십자가 또렷하게 밀어버린 데 대한 나름대로의 항변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청난 반항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머리를 짧게 깎으라고 하니까 최대한 짧게 깎겠다는 오기 정도였을 겁니다.

구내 이발소에 들려 백호머리로 깎아달라고 하니 먼저 가격이 비싸다는 걸 말했습니다. 지금이야 대부분 날만 갈아 끼워가며 쓰면 되지만 그때 이발소에서 사용하던 면도칼은 벽에 널찍한 가죽 띠를 달아매놓고 쓱쓱 갈아가면서 쓰는 면도칼이었습니다.

▲ 보는 입장에 따라 알몸이라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무소유'로 해몽하고 있습니다. ⓒ 임윤수


여느 때처럼 바리캉을 이용해 머리를 깎아내고, 면도를 하듯 머리 전체를 깎으려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면도날도 두세 번쯤은 갈아가면서 깎아야 하기 때문에 비싸다고 하였습니다.   

이발료도 더 비쌌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그래도 빡빡, 정말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빡빡 깎았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가 보기엔 걸릴 것 없이 반들거려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그런지 머릿결 반대쪽으로 문지르면 엄청 껄끄럽기도 하지만 낚시 바늘만큼이나 강합니다.

이발소 아저씨는 물에 묻힌 수건을 빡빡머리에 올려놓고 머릿결 역방향으로 잡아당기면 머리거죽이 찢어지면 찢어졌지 절대 미끄러지지는 않으니 혹시라도 젖은 수건을 들고 쫓아오는 친구가 있으면 무조건 도망을 가야 한다는 충고까지 해주었습니다.

▲ 엉터리지만 참선으로 해몽하고 싶은 모습입니다. ⓒ 임윤수

평상시 이발료보다 몇 배나 더 주고 깎은 머리였지만 칭찬을 받기는커녕 반항을 한다고 보는 선생님들마다 꿀밤을 때렸고, 짧은 머리카락이 테두리에 걸려 모자를 벗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고통이나 조심스러움만을 경험했습니다.

출가수행자이건 반항아이건 머리를 빡빡 깎는다는 건 고통이며 인내였습니다.

무소유와 참선의 고교시절

중학교 시절을 출가수행자의 모습인 빡빡머리로 해몽할 수 있다면, 고등학교 때의 모습은 무소유와 참선의 모습이라고 해몽 할 수 있었습니다.

무소유! 어디까지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무소유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놓았던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 있으니 이를 무소유라고 하는 겁니다. 

옷을 벗었으니 몸에 두른 것이 없고, 물에 엎드렸으니 손에 쥔 것도 없으니 최소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철저한 무소유입니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보기 민망한 알몸사진일 수도 있지만 사진 주인공이 하고 싶은 해석은 무소유입니다.

무소유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절엘 가면 가부좌를 튼 불상을 흉내 낸 사진들이 보였습니다.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는 수인을 하고 법당 처마 밑에 털썩 주저 앉아있었으니 고등학생 시절은 참선하는 기간이었나 봅니다.

풍경소리는커녕 떠오르는 경구 한 구절, 독경소리 하나 없는데 왜 저렇게 하고 사진을 찍었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니 이렇듯 꿈보다 해몽 같은 추억으로 떠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드디어 부처가 되다

▲ 드디어 부처가 되었습니다. 관념적이라 할 만큼 불상 자체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죽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을 만큼 버릇없는 모습이겠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해몽일 뿐입니다. ⓒ 임윤수

25년 전인 1984년 사진을 보니 드디어 부처가 되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친구들과 놀러가서 찍은 사진인데 머리가 없어진 돌부처의 머리 부분에 얼굴을 올려놓고 찍은 사진을 보고 부처가 되었다는 해몽을 하는 겁니다.

야외 잔디밭에 놓여있던 불상이었고, 접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나 안내 푯말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는 분위기여서 장난삼아 얼굴을 올려놓고 찍은 것을 부처가 되었었다고 엄청나게 해몽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학창시절이 담겨 있는 사진을 시간별로 정리하다보니 순서에 따라 출가도 했었고, 참선도 했었으며 부처가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산뜻 하였던 흑백이 어느새 누렇게 변색되어 있지만, 꿈결처럼 지나간 시절을 해몽을 하듯 추억하는 순간은 행복입니다. 악몽처럼 다가올지도 모를 내일이지만 해몽을 하듯 맞이한다면 해몽이 꿈 되고 꿈이 해몽되는 불이의 순간도 있을 겁니다.

이 가을 이 다 가기 전에, 먼 후일에 해몽 할 꿈 거리 몇 장 찍어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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