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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불허로 막힌 뤼순의 안중근 의사 변호

[부평삼변과 가족사 7] 산강재 변영만④ - 율사의 삶

등록|2009.11.05 10:07 수정|2009.11.05 10:07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만세삼창 후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중근. 이후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돼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가 보여 준 애국심은 100년이 지난 지금 더욱 선명하게 숭모되고 있다. 100년 전 안 의사의 거국적 행적 속에서 산강재 변영만의 족적을 더듬어 본다.

안 의사가 체포돼 옥에 갇히자 변호사 선임 문제로 동포사회가 분주해졌다. 그 해 11월 18일 대한매일신보는 러시아 지방에 살고 있는 동포사회에서 돈을 모아 러시아인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여론을 전하고 있다.

▲ 뤼순감옥 전경 ⓒ 안중근의사기념관



12월 1일 총독부 통역관이 아카시(明石) 육군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안 의사 변호인단으로 외국인 2명이 선임됐다.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주간 콘스탄틴 미할일로프와 상하이 변호사 영국인 더글러스 씨가 그들이다. 미하일로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안 의사 지인들에게 변호를 부탁 받고 더글러스를 동반했다.

일본은 안 의사가 별도 관선 변호인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들의 변호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인 변호사 1명도 변호인단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에 미하일로프는 이번 사건이 우리(러시아)에게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므로 가장 신중하고 공명정대하여 사소한 악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자고 했다.

더글러스는 잘 아는 통신사 기자를 법정에 대동해도 좋은 지에 대해 안 의사의 승낙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자 일본 관리는 법정 기사를 검열을 거쳐 타전하는 것은 지장이 없다고 허락했다.

변호인단과 안 의사가 만난 자리, 미하일로프는 지인들의 의뢰로 변호를 맡은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이에 안 의사는 감사의 뜻을 전하고 사선변호인단으로 법정에 나와서 변론해 줄 것을 허락했다. 안 의사는 입감 이후 상황에 대해 미하일로프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입감 이래 검찰관은 물론 전옥 이하 각 일본관리 일동은 나를 우대하기를 극히 후하여 의외의 관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몸도 건강하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인들에게 이를 전해주기 바란다"

안 의사 변호위해 한인 변호사 수소문 나서

이 무렵 상하이에서도 한인 변호인 구하기에 동포 사회가 나서고 있었다. 민영익은 변호사 선임을 위해 4만원을 걸고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등에까지 수소문을 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민영익이 상하이에서 4만원(元)을 내 프랑스와 러시아 변호사를 고용한 후 안중근의 재판을 도왔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 변호사 기시(紀志)가 변호를 신청,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허가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해가 바뀌었다. 1910년 1월 7일 일본은 외무차관 앞으로 암호문을 날렸다. 평양의 안병찬 변호사가 안 의사 변호를 수임해 뤼순으로 출발한다는 정보에 대한 첩보 보고다. 안 변호사의 신상에 대한 소상한 정보가 담겨 있다. 서울 변호사가 아닌 평양 변호사가 나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애초 안 의사의 동생 정근, 공근은 서울에 있는 변호사협회에 서신과 여비 50환을 부치고  한인 변호사 1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변호사들이 눈치만 보면서 자원하는 이가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해 평양 변호사 안병찬이 자원해 10일 뤼순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일 자료에 따르면 안 변호사는 1905년 '한일협약'시 반대 상소를 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했으며 늘 배일(排日)사상을 품은 자다. 그는 경성(서울)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평안북도 한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했고 1900년 판임관 6등에 서임된다. 융희 원년인 1907년 변호사 인가를 받고 1910년 평양지방재판소에 변호사로 등록했다.

한성변호사회 변호사 파견 주저...안병찬 이어 변영만 나서

이 무렵 한성에서 산강재 변영만도 움직였다. 1908년 판사로 임용됐다가 그 해 일제에 항거하는 뜻으로 법복을 벗은 그였다. 그런 그가 안 의사 변호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한성변호사회가 주춤거리자 산강재 변영만이 안 의사 변호를 수임하고 뤼순행을 준비했다. 그는 한성변호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대한제국 말기 상황을 기록한 정교(鄭喬)의 <대한계유년>에 기록된 안정근이 변영만에게 보낸 전보 내용을 보자.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변호를 허가하지 않으니 번거롭게 오실 필요 없습니다"

이 때 안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뤼순고등법원에 청원한 각국 변호사는 러시아인 2명, 영국인 2명, 스페인인 1명, 한국인 2명이었다. 한 명은 안병찬이고 다른 이는 안 변호사의 사무원 고병은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법원장은 능숙치 않은 일본어를 빌미삼아 일인 변호사만 허락하고 다른 나라 변호사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후일 그는 끝내 중국으로 넘어가 항일운동에 가담한다. 비록 안 의사에 대한 직접적인 변호는 일제의 불허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나라 잃은 아픔의 심도(深度)는 같았을 것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전 변호사)는 저서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에서 독립운동가를 위한 1세대 인권변호사로 김병로, 이인, 허헌, 안병찬, 이면우와 변영만을 손꼽았다. 1879년 생 안 의사보다 열 살 동생뻘인 변영만은 가로막힌 뤼순행 철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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