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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55)

― '5백만쯤의 백인', '34년 전쯤의 이야기' 다듬기

등록|2009.11.06 11:33 수정|2009.11.06 11:33
ㄱ. 5백만쯤의 백인들에게

.. 이들은 불과 5백만쯤의 백인들에게 완전히 지배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  《린다 H.존스/안재웅 옮김-인권운동》(종로서적,1988) 4쪽

 '불과(不過)'는 '겨우'나 '고작'으로 고쳐씁니다. '완전(完全)히'는 '속속들이'나 '모든 것을'이나 '아주'나 '오롯이'로 다듬어 봅니다. '지배(支配)당(當)한'은 '억눌린'이나 '짓밟힌'이나 '짓눌린'으로 손질합니다.

 ┌ 5백만쯤의 백인들에게
 │
 │→ 5백만쯤 되는 백인들한테
 │→ 5백만쯤밖에 안 되는 백인들한테
 │→ 5백만이 될까 말까 한 백인들한테
 └ …

 "책이 열 권쯤 있다"라 말하지 않고 "열 권쯤의 책이 있다"로 말하는 사람을 보기도 합니다. 토씨 '-의'를 얄궂게 붙이는 말버릇을 털어내지 못하고 자꾸자꾸 엇나가는 셈입니다. "한 잔의 커피" 같은 말투가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곧잘 나오지만, 이런 말버릇은 사그라들지 않고, "한 잔쯤의 커피"로 새끼를 칩니다.

 ┌ 15년 전쯤의 만화 → 열다섯 해쯤 앞서 나온 만화
 ├ 5월 7일쯤의 날씨는 → 5월 7일쯤 날씨는 / 5월 7일쯤에 날씨는
 ├ 작년 이맘때쯤의 모습 → 지난해 이맘때쯤 모습
 └ 100개쯤의 도매상이 있다 → 도매상이 100군데쯤 있다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옹글게 우리 말씨로 뿌리내렸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 "한 잔의 커피"나 "한 권의 책" 같은 말씨는 잘못이라고 꼬집는 이야기가 더러 나오기는 하지만, 조금도 고치지 않는 우리 매무새를 돌아본다면, 이러한 말씨는 우리 말 문화로 여겨야 하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잘 써도 우리 문화요 잘못 써도 우리 문화일 테니까요. 잘 써도 우리 말이요, 잘못 써도 우리 말일 테니까요.

 ┌ 이들은 고작 5백만쯤 되는 흰둥이한테 꼼짝없이 짓눌린 채
 ├ 이들은 겨우 5백만쯤 되는 흰둥이한테 끔찍하게 억눌린 채
 ├ 이들은 기껏 5백만쯤 되는 흰둥이한테 그예 짓밟힌 채
 └ …

 말 한 마디 잘못 쓰는 일을 안타까이 느끼는 분이 퍽 적은 우리 나라입니다. 글 한 줄 잘못 쓰는 매무새를 슬프게 받아들이는 분이 아주 드문 우리 나라입니다. 말 한두 마디 잘못 쓴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겠지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진다고 하는 걸요. 글 한 줄로 세상을 바로세울 수 없다고 하겠지만, 글 한 줄로도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 걸요.

 말이란 내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데,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어떤 모습을 말마디에 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글이란 내 생각을 차곡차곡 실어내는데, 우리는 우리 생각 가운데 어느 구석을 글줄에 싣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갈까를 살펴야 어떻게 생각할까를 살필 수 있고, 어떻게 생각할까를 살피는 가운데 어떻게 말할까를 살핍니다. 거꾸로, 어떻게 말할까 살피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각할까를 살피지 못하는 셈이며, 어떻게 생각할까를 살피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살아갈까를 옳게 살피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ㄴ. 34년 전쯤의 이야기

..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지금부터 34년 전쯤의 이야기입니다 ..  《정상명-꽃짐》(이루,2009) 193쪽

 '오래전(-前)'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오랜 옛날'이나 '오랜 지난날'로 다듬어도 잘 어울립니다.

 ┌ 34년 전쯤의 이야기입니다
 │
 │→ 서른네 해쯤 앞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 서른네 해쯤 된 이야기입니다
 │→ 서른네 해쯤 지난 이야기입니다
 │→ 서른네 해쯤 묵은 이야기입니다
 └ …

 이 보기글은 "아주 오래전, 지금부터 34년 전쯤 이야기입니다"로 손볼 수 있습니다. 모든 자리는 그대로 두면서 토씨 '-의'만 덜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마음을 쏟아 본다면, "아주 오래된, 오늘부터 서른네 해쯤 앞서 이야기입니다"로 손질할 수 있고, 살짝살짝 말씨를 가다듬으면서 "아주 오래된, 오늘로서 서른네 해쯤 된 이야기입니다"라 하거나, "아주 오래된, 벌써 서른네 해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라 할 수 있어요.

 말다듬기는 다듬는 사람 깜냥껏 할 수 있습니다. 말추스르기는 다듬는 사람 슬기를 빛내며 할 수 있습니다. 말다독이기는 다듬는 사람 생각과 넋에 따라 할 수 있습니다. 한결 곱고 빛나도록 할 수 있고, 더욱 싱그럽고 알차게 할 수 있으며, 한껏 아름답고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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