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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나가는 일은 복되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등록|2009.11.06 15:44 수정|2009.11.06 15:44

책표지김훈 <자전거 여행> ⓒ 생각의 나무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 우마차로, 소로, 임도, 등산로 들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한 달에 한 번은 서점 외출을 하는 남편과 나는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부산 영광도서에 다녀왔다. 대부분 남편이 산 책을 같이 읽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내가 읽고 싶은 책 한 두 권씩을 사기도 하다. 김훈의 책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 등 몇 안 되는 책이다. <자전거 여행2>를 <자전거 여행1>보다 먼저 읽었다.

자전거를 탈 줄 알면서부터 자전거에 관심이 많아진 나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손이 갔다. '자전거 여행'이라... 내 두 발로 저어서 먼 길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제목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 '자전거'와 '여행'... 문득 자전거를 두 발로 저어서 여행을 떠나고 싶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러 나아가는 일'은 얼마나 좋은가.

지금은 가을이다. 겨울로 접어들기 전의 늦가을에 봄을 만났다. 첫 장을 여는 순간 봄이 안겨들었다. '꽃피는 해안선'이다. '여수의 남쪽, 돌산도 해안선에 동백이 피었'고 산수유도, 매화도 피었단다. 그의 자전거는 길 위에서 겨울을 났단다. 나는 첫 문장부터 그만 반해버렸다. 자전거 위에서 겨울을 난 저자가 알려주는 봄꽃 소식은 이 늦가을에 따뜻한 아지랑이처럼 훈기가 돌고 마음이 설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는 자전거와 함께 길 위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깊고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에 물을 길어 올리듯, 깊은 사유에서만 길어 올릴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팽팽하고 탄탄한 문장은 내 책장에 두고 가끔씩 꺼내 읽어도 다시 반가운 책이 될 것 같았다. 선뜻 이 책을 샀다. 자전거 두 바퀴에 몸을 싣고 두 발로 저어서 가져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 싶었다.

이 책은 아주 느리게 숨 쉬면서 천천히 읽었다.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두 발로 산악자전거 폐달을 저어서 여행했던 곳에서, 그가 보고 느끼고 안고 온 묵직한 이야기보따리가 있다. 그 속에는 '없는 것이 없이 모조리 다 있다.' 사랑이 있고 죽음이 있고 가난과 슬픔이 있고 희망과 그리움이 있다. 세상의 악을 이해해가는 어린 영혼의 고뇌가 있고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성장의 설렘이 있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정끝별의 표현대로라면,

"밥벌이의 가파름에서부터 '문장'을 향한 열망까지를 넘나드는 처사 김훈의 연과 변은 차라리 강(講)이고 계(誡)다. 산하 굽이굽이에 틀어 앉은 만물을 몸 안쪽으로 끌어당겨 설(說)과 학(學)으로 세우곤 하는 그의 사유와 언어는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과 종교학을 종(縱)하고 횡(橫)한다. 가히 엄결하고 섬세한 인문주의의 정수라 할 만하다."

자전거 두 바퀴로 밀어서 닿았던 곳에서 그가 만났던 것들은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삶의 깊은 본질을 꿰뚫어보고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여 길어 올린 언어의 정수가 있다. 삶에서 동떨어져 있는 문장이 아니라 삶 깊은 곳을 들여다본 자의 시선, 그 시선으로 건져 올린 삶에 천착한 문장이다. 그가 닿은 곳에는 우리 문명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잃어가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날로그적인 삶에 대한, 풍경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난다.

그가 바라보는 것, 그의 자전거가 저어서 닿은 곳은 대부분 문명의 이기에서 조금은 비껴서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것에의 향수다. 그는 자전거 두 바퀴로 저어서 소외된, 문명에 덜 편입된 옛 것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곳을 구석구석 누벼서 독자들에게 수런거리지 않고 고요한 언어로 풀어놓는다.

그가 소개하는 자전거 두 바퀴에 실어온 이야기는 삶의 변방인 것 같으나 살아 숨쉬는 삶이다. 잊혀져 가는 것들을 여기서, 그의 문장 속에서 만나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잔잔하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며 긴 여운으로 퍼져나간다. 김용택의 <사람>을 통해 섬진강 '마암분교' 이야기를 읽었던 적이 있다. 김훈의 글 속에서 다시 만나는 마암분교 이야기는 또 한번 새롭다.

여기서도 김훈이 얼마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지, 그의 시선이 지향하고 바라보는 것이 어디이고 무엇인지 따뜻한 이 글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다. 그의 시선에 닿는 곳에서 연민과 따뜻한 마음이 읽어진다. 책의 거의 말미에 실린 '꽃피는 아이들'에는 따뜻한 봄기운이, 삶의 생기가 살아난다. 삶에 대한 애틋하고 동정어린 연민이 눈물 글썽이듯 한다.

"마암분교 아이들 머리 뒤통수 가마에서는 햇볕 냄새가 난다. 흙향기도 난다. 아이들은 햇볕 속에서 놀고 햇볕 속에서 자란다. 이 아이들을 끌어안아보면 아이들의 팔다리에 힘이 가득 차 있고 아이들의 머리카락 속에선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가 난다. 이 아이들은 억지로 키우는 아이들이 아니다. 이 아이들은 저절로 자라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나무와 꽃과 계절과 함께 저절로 큰다."

"인수네 아버지는 남의 땅에서 일해주고 품삯을 받아서 산다. 집이 없어서 사람들이 버린 빈 집을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면서 산다. 인수네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 있다. 마을 보건소에서 약을 받아오는데 인수가 약 심부름 갈 때도 있다. 지금 인수가 사는 집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있고 무너진 처마 밑에는 제비집도 있다. 봄이 오면 살구나무에 꽃이 피고 제비들이 돌아올 것이다...왜 땅이 없고 집도 없느냐?" 라고 인수 아버지한테 물었다. 인수 아버지는 "본대(본디)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또 한 번 속으로 울었다."

김훈이 본 마암분교... 그리고 거기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고 연민에 가득 차 있다. 깊이 그들을 들여다 본 시선이 보인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산맥 아래 깊이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흘러 독자들의 가슴 속 깊이 강물을 들여다 놓는다. 저자의 자전거와 시선에 걸려든 두 바퀴로 실어온 이야기를 나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속살을 헤집어보면서 읽었다.

깊은 사유에서 빚어낸 김훈의 문장은 빨리 읽어 내달릴 수가 없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을 나 또한 마치 두 발로 자전거를 저어 산맥을 오르듯이 느리게, 느리게 나아갔다. 그가 놓은 수를 한 땀 한 땀 헤아리듯 느리게 읽었다. 좋은 문장이 있어 옮겨본다.

"겉불꽃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젊은 불길이다. 겉불꽃은 출렁거리면서 가마 속을 흘러가고, 속불꽃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기름처럼 고요히 가마 속을 흘러간다. 가마를 익히는 불길은 열이 아니라 흐름이다. 겉불꽃은 공기와 더불어 발랄하게 놀아난다. 겉불꽃은 자유롭고 무질서하고 불안정하다. 대체로 말해서 분청사기와 막사발은 그 자유롭게 여유로운 질감은 이 겉불꽃이 놀다간 자리이다. 그래서 막사발들은 사람처럼 제각기의 표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속불꽃은 바람과 뒤엉키는 그 놀아남의 흔적을 들키지 않는다. 속불꽃은 맹렬하고도 적요하다. 이 맑은 불은 장작에 뿌리박은 불길의 운명을 이미 떠난 것처럼 보이다. 이 불길은 흙을 흔들지 않고 고요히 흙 속으로 스며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표면에 깊고 깊은 색깔의 심층 구조를 드러나게 한다."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라고 저자는 말했던가. 자전거는 엔진이 있는 자동차가 가지 못하는 구석구석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한다. 그가 쓴 <자전거 여행>, 두 바퀴를 저어서 가져온 이야기보따리는 그의 자전거 '풍륜'이 닿았고 그의 몸이 함께 닿았던 곳곳의 길이며 흔적이다. 그의 '풍륜'과 함께 가져온 이야기들 속에서 깊은 사유로 빚어낸 보석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뜨거운 폭양 아래서 짜고 향기롭고 굵은 소금이 익듯이, 가장 고통스런 날에 가장 영롱한 결정체들이 염전 바닥에 깔리듯이, 가마 속의 불꽃, 속불꽃이 고요히 가마 속에 흘러 이 맑은 불길이 고요히 흐르고 스며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표면에 깊고 깊은 색깔의 심층구조를 드러나게 하듯이,

 김훈의 글은 수다스럽지 않고 느슨하지 않고 깊고 고요하다.'맹렬하고도 적요하다.' 진정 깊은 것은 깊은 것들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김훈과 함께 가는 책 속의 자전거 여행, 함께 폐달을 밟아보시라.

저자 소개: 김훈
1948년 서울출생.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그가 지은 책으로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 <내가 읽은 책과 세상>,<선택과 옹호>, <문학기행1.2>, <자전거 여행>,<자전거 여행2>,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 벌이의 지겨움>, 소설집<강산무진>,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등 다수가 있다. 그는 작가이며 자전거 레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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