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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전태일'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전태일 39주기맞이 거리 문화제에 다녀와서

등록|2009.11.07 19:36 수정|2009.11.07 21:19

▲ 가수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이 노래를 하고 조충현 밴드의 조충현이 춤을 추고 있다 ⓒ 최석희


"전태일 선생님, 전태일 선생님, 전태일 선생님, 사랑합니다."

6일 청계천 6가 평화시장앞 전태일 거리 문화제. 퍼머를 한 가수가 홍대앞 라이브클럽에서나 들을 법한 욕설이 섞인 격한 노래를 부른다. 잠시 후 개콘 봉숭아 학당의 일출(김재욱)이가 쓸 법한 안경을 쓴 가수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 예전의 아마추어증폭기)이 단조롭고 비트가 있는 펑크계열의 노래를 부른다. "전태일 선생님 전태일 선생님 전태일 선생님 사랑합니다"는 가사의 노래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두살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외치며 온몸을 불사른 일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인사들에게 '민중주의'적 관점을 세운 혁명적 사건이었다. 서슬퍼런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에 필사본으로 떠돌던 전태일평전, 한문투성이 노동법을 어렵게 읽던 전태일이 '대학생친구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던 소망은 이후에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을 노동현장으로 투신하게 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과 고 윤용헌님의 유가족 유영숙여사 ⓒ 최석희


벌써 39년...전태일, 그가 살아있다면?

전태일이 아직도 살아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전태일재단 이사)은 전태일과 동년배다. 이수호 최고위원은 용산참사 300일이 가까워옴에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아서 13일째 용산 남일당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그는 지금 용산 참사 현장에, 64만1850원 받다 문자로 해고당해 5년째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여성노동자 투쟁현장에 있으리라.

전태일 거리는 분주하다. 쉼없이 오가는 차량들, 청년 전태일이 재단 가위로 수없이 잘랐을 원단을 싣고 오가는 오토바이와 짐꾼들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2008년 가을 추모연대(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 수도권모임은 전태일거리에서 처음으로 열사문화제를 개최하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태일 거리는 2005년 동판을 세워 정비하였지만 여전히 짐을 기다리던 오토바이들의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다. 열사문화제를 마치고 꾸준히 문화공연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진행되지 못했다 한다.

▲ 전태일거리문화제를 맨 먼저 시작한 가수 이씬 ⓒ 최석희


그러던 중 5년째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 '이씬'이 영상작업을 하던 김천석씨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영결식장에서 스스로 결심해서 시작되었다 한다. 고 김천석 작가도 기륭전자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해 왔다.

"그주 토요일에 바로 혼자 기타매고 전태일거리로 나왔습니다.
빗방울이 조금씩 흩뿌리는 날씨였는데...
흉상 뒤 벤치에 앉아서 1시간가량 노래를 부르는데 비가 심해져 중단하였습니다...
 점점 용기를 내서 음향을 들고 나가기 시작했고
흉상뒤에서 흉상앞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함께 하시는 분들도 점점 많아 지셨습니다...
비록... 제 작은 힘으로 시작하였지만,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그 분의 삶에서 감동을 받은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공연이 되도록 꾸려가고 싶습니다.
모든 이들의 따뜻하고 선한 마음들이 어울리며
노래와 詩와 춤과 그림이 전태일거리에 넘쳐나기를 염원해봅니다."

(http://cafe.daum.net/chuntaeilart/AZ9w/4 이씬의 글 중에서)

▲ 전태일 거리 문화제에 참여한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과 전태일기념사회회 박계현 사무처장 ⓒ 최석희


그많은 전태일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전태일은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단 하루도 맘편히 살아보지 못했다. 성실히 일했지만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대우를 받았다. 먼지 투성이 다락방에서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자신을 놓아둘수 없었다.
강산이 네번은 바뀔 시간이 지나갔다. 전태일이 떠난 39년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진리와 정의는 능지처참 당했다. 많은 이들이 어디로 향할지도 모르는 죽음으로 가는 무한질주 무한경쟁의 빠져들어있다. 단돈 100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대한통운
박종태 지회장, 64만1850원 받고 일하다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당해 5년째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비정규여성노동자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지만 싸늘한 주검이되 돌아온 300일 아무것도 해결되기는커녕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5년 6년을 선고하는 야만의 법정. 온 국민 70% 이상이 반대해도 차곡 차곡 진행되는 4대강. 마침내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되었다. 법이 부끄러운 법恥국가.

▲ 전태일 거리 동판 "바보처럼 살겠습니다" ⓒ 최석희


전태일 거리에는 많은 동판에 다짐글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전태일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보고 싶다.

바보처럼 살겠습니다(수정 민아 다혜 재근 2005.9)
새벽을 여는 전태일(토진)
이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정부 시민 진선 현욱 승규 휴리) 
참세상 자유 위하여(한철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자(기영 성애 현경 옥수)

사랑해요 전태일,
약속대로 꼭 돌아 오십시요(윤홍렬)
아아! 님이여 당신은 죽어서 영원히 살았습니다(백창욱)
덧붙이는 글 오늘(7일) 한국노총 15만 조합원이 여의도에서 복수노조 전임자 임금 금지에 맞서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명박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8일엔 민주노총이 별도로 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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