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미워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미움의 병'에 걸린 교사를 만나다
지난 주말에 전남 해남에 있는 김남주 시인 생가에 들렀다가 우연히 반가운 선생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전교조와 순천청소년축제 등을 통해 알게 된 그는 미술 교사로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붓곤 했던 젊고 아름다운 선생님이었습니다. 우린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잠시 헤어졌다가 행사 뒤풀이 자리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저를 찾아온 사람처럼 진지하고 조금은 절박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미워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몇 해 전에 그가 근무하고 있던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소통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듯싶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자마자 그가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들을 향한 미움이 고통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았겠지요. 하여,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적당히 사랑하세요. 그리고 아이들이 미워질 때는 그냥 미워하세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넘기고 말기보다는 선배교사로서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의 증상(?)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두 아이가 미운 거예요? 아니면 전체 아이들이 다?"
"전체 아이들이 다요."
"미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나요?"
"한 달 정도요."
"언제부터 아이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나요?"
"예. 한 오륙 년 전부터 무슨 홍역처럼 해마다 한 번씩 꼭 이런 일을 겪게 되네요."
요즘 아이들을 일컬어 흔히 '개념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하지요. 개념이 없다는 것은 결국 생각이 없다는 말일 텐데, 그러다보니 아이들에 대한 시간 투자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헛힘만 쓴 꼴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아이들을 변화시킬 사랑의 의무를 가진 교사일수록 실의에 빠지거나, 혹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심리적 과정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미워지는 한 달 동안 아이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될수록 그들을 피해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한 달이라는 긴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상이 해마다 반복된다는 것도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닌 듯했습니다. 아무리 착한 선생님을 괴롭힌 가해자(?)라고 해도 한 달 동안의 공백은 배움의 길에 있는 아이들에게 상당한 손실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기간 동안 교사가 겪어야 할 고충도 만만치가 않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저도 아이들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미움이 길어야 이삼일 가다 맙니다. 미움의 뿌리가 깊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제 성격이 유순하거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많거나 깊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아이들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미움이 감정이듯이 사랑도 감정이라면 아이들에게 감정을 품지 않으려는 저는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덜 사랑하는 셈이 됩니다.
저는 아이들을 감정이나 마음으로 사랑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교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마음이 지고지순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백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비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지 못하면 위험해지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초임교사 시절, 한 아이가 저를 감쪽같이 속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진실성이 많이 결여된 아이였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고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으로 한동안 교직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학교에서 진실성이 부족한 아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마음이 크게 상하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가 진실성이 부족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최근의 일입니다. 청소시간이면 늘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거나 하는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유를 따져 물을 때마다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루는 두 아이를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오늘은 왜 안 나온 거야?"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 갔는데 지도부 선배들이 담배 피웠다고 청소하라고 해서 20분이나 청소했어요. 정말이에요."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예. 정말이에요."
"그럼 많이 억울했겠네?"
"예?"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벌로 청소를 시키고, 그러다보니 청소시간에 나오지 못해서 이렇게 선생님 앞에 불려왔으니까 억울할 거 아니야?"
"예."
"너희들 오늘 정말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왜 선생님은 너희들 말이 안 믿어지지? 그것이 선생님 잘못이야? 너희들 잘못이야?"
"저희들 잘못입니다."
"그럼 앞으로 이렇게 하자. 청소시간이 되면 절대 화장실에 가지 말고 청소구역으로 곧바로 달려와. 오늘은 너희들이 정말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또 언젠가 청소하기 싫으면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오줌이 마려우면 어떻게 해요?"
"오줌은 그 전 시간에 싸면 되잖아."
"알았어요."
"알았으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교실로 달려가."
한 아이의 삶을 하루아침을 바꿔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사로서의 욕심일 뿐이지요. 아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선한 욕심도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미움의 병이 바로 그것이지요.
"아이들이 미워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몇 해 전에 그가 근무하고 있던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소통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듯싶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자마자 그가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들을 향한 미움이 고통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았겠지요. 하여,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적당히 사랑하세요. 그리고 아이들이 미워질 때는 그냥 미워하세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넘기고 말기보다는 선배교사로서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의 증상(?)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두 아이가 미운 거예요? 아니면 전체 아이들이 다?"
"전체 아이들이 다요."
"미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나요?"
"한 달 정도요."
"언제부터 아이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나요?"
"예. 한 오륙 년 전부터 무슨 홍역처럼 해마다 한 번씩 꼭 이런 일을 겪게 되네요."
요즘 아이들을 일컬어 흔히 '개념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하지요. 개념이 없다는 것은 결국 생각이 없다는 말일 텐데, 그러다보니 아이들에 대한 시간 투자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헛힘만 쓴 꼴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아이들을 변화시킬 사랑의 의무를 가진 교사일수록 실의에 빠지거나, 혹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심리적 과정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미워지는 한 달 동안 아이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될수록 그들을 피해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한 달이라는 긴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상이 해마다 반복된다는 것도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닌 듯했습니다. 아무리 착한 선생님을 괴롭힌 가해자(?)라고 해도 한 달 동안의 공백은 배움의 길에 있는 아이들에게 상당한 손실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기간 동안 교사가 겪어야 할 고충도 만만치가 않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저도 아이들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미움이 길어야 이삼일 가다 맙니다. 미움의 뿌리가 깊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제 성격이 유순하거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많거나 깊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아이들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미움이 감정이듯이 사랑도 감정이라면 아이들에게 감정을 품지 않으려는 저는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덜 사랑하는 셈이 됩니다.
저는 아이들을 감정이나 마음으로 사랑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교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마음이 지고지순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백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비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지 못하면 위험해지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초임교사 시절, 한 아이가 저를 감쪽같이 속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진실성이 많이 결여된 아이였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고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으로 한동안 교직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학교에서 진실성이 부족한 아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마음이 크게 상하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가 진실성이 부족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최근의 일입니다. 청소시간이면 늘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거나 하는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유를 따져 물을 때마다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루는 두 아이를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오늘은 왜 안 나온 거야?"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 갔는데 지도부 선배들이 담배 피웠다고 청소하라고 해서 20분이나 청소했어요. 정말이에요."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예. 정말이에요."
"그럼 많이 억울했겠네?"
"예?"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벌로 청소를 시키고, 그러다보니 청소시간에 나오지 못해서 이렇게 선생님 앞에 불려왔으니까 억울할 거 아니야?"
"예."
"너희들 오늘 정말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왜 선생님은 너희들 말이 안 믿어지지? 그것이 선생님 잘못이야? 너희들 잘못이야?"
"저희들 잘못입니다."
"그럼 앞으로 이렇게 하자. 청소시간이 되면 절대 화장실에 가지 말고 청소구역으로 곧바로 달려와. 오늘은 너희들이 정말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또 언젠가 청소하기 싫으면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오줌이 마려우면 어떻게 해요?"
"오줌은 그 전 시간에 싸면 되잖아."
"알았어요."
"알았으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교실로 달려가."
한 아이의 삶을 하루아침을 바꿔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교사로서의 욕심일 뿐이지요. 아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선한 욕심도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미움의 병이 바로 그것이지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