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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등록|2009.11.09 13:15 수정|2009.11.09 13:15

▲ 한때 페교 위기에 놓였던 우리 동네 작은 학교 '분원초등학교' ⓒ 유상준


지난 9월 22일 <PD수첩>에서 방영된 <행복을 배우는 작은 학교>를 아내와 함께 보았다.

평소에도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을 집어내고 때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을 담아내는 이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편이지만 이번의 '작은 학교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직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있지는 않지만 가까운 미래에 우리도 거부할 수 없는 엄숙한 이름인 '학부모'가 될 것을 생각하면 그냥 '감동'만하고 흘려보낼 주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면서 실제로 눈물을 흘렸는지 아니면 애써 참았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울었던 것 같다. 그때 흘린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감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민 사이를 오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델이 된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남한산 초등학교 학생들의 박제화되지 않은 상상력과 표현력 그리고 이 학교 졸업생들이 초등학교 시절을 더없는 행복함으로 추억하는 모습을 보고 그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반면 대다수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놀며 행복함을 만끽해도 모자랄 초등학교 시절을 학원과 선행학습에 내몰리며 쫓기듯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연민으로 가슴 한 구석이 막막해짐을 어쩔 수 없었다.

작금의 교육현실을 보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 이런 문제의식을 접고 포기하고 마는 것이 "사회가 경쟁 사회가 아닌가?" "어차피 그런 길로 갈 거 조금 더 일찍 가는 것 뿐"이라고 합리화하고 만다. 그러나 사회는 경쟁만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더 많은 부분에서 구성원 사이의 상호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너무 이른 시기부터 경쟁만을 배운다. 시간이 갈수록 교육은 더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

뭐 좋은 대책이 없을까?

대안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PD수첩>에서 제시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 바로 '작은 학교'이다. 남한산 초등학교는 요즘 흔히 '돈 많이 내고 다니는' 사립초등학교도 아니고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대안을 제공하는' 대안학교도 아닌 그저 '작은' 공립초등학교일 뿐이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기까지 사실 나는 '국가에서 돈 대는' 공립학교에서는 이렇게 색다른 이른바 '특성화 교육'을 하면 안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학교의 여건과 구성원의 의지에 따라서 어느 정도 다른 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실행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있다.

지금은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학교 다닐 때처럼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왕'이고 그는 자신의 임명권자인 교육부의 명령에 충실한 관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선생님을 포함한 교직원, 학생, 학부모의 다양한 욕구와 의견을 모아내고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이 부여되어있고 이에 따른 다양한 방식의 교육과 학교운영이 보장되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시골의 일부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대도시에 있는 다수의 학교들은 이런 특성화 교육을 거의 하지 않는다. 좀 더 알고 보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왜일까?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내용의 수업을 해야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가해야하기 때문에 같은 학년을 담당한 선생님들 사이의 의견이나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한데 만약 한 학년에 반이 다섯만 되어도 이러한 작업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수업 외에 선생님들에게 지워지는 이런저런 행정업무를 처리하다보면 수업을 위한 창의적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이렇다보면 이미 만들어진 <수업지도안>을 따를 수밖에 없어 결과적으로 틀에 박힌 교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ㆍ고등학교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입시교육, 경쟁교육에 내몰리게 되더라도 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행복함으로 기억되는 학교를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대안이 '작은 학교'인 것 같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시골 벽지학교 통폐합'이라는 명목 하에 '작은 학교'들을 마구 없앴던 적이 있다. 당시 정부의 논리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교육의 평준화, 효율화' 이런 거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선생님 한분이 아이들 대여섯명 가르치고 또 이를 위해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작은 시골학교에서 도시와 다른 내용의 수업을 하는 것이 이 아이들의 경쟁력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몇 명 아이들을 주변의 '크고 좋은' 학교로 전학보내고 작고 비생산적인 학교는 문을 닫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없어지거나 문을 닫은 학교가 몇 곳이나 되는지 알 수 는 없으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도 지적되었듯이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다. 학교가 없으면 더 이상 사람들이 들어올 수가 없고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 지역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만약 교육이 '효율성'이라는 한가지 기준으로만 재단된다면 국가는 더 이상 교육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 아니 신경쓰지 말고 손을 떼는 편이 낫다. 왜냐면? '삼성에서 하면' 더 잘 할 수 있으니까! 경쟁력으로만 말하자면 국가는 더이상 기업을 따라잡을 수 없는것이 현실인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한반에 60명이고 한 학년에 많은 경우 스무 반이 넘은 적도 있다. 이 많은 학생들이 대개 비슷한 것을 배우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고 비슷한 모습으로 사회에 나온다. 당시에는 이런 것이 합리화 될 만 했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사람 수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늘었지만 개개인의 필요와 욕구는 다 다르다. 한마디로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전처럼 학생들이 똑같은 것을 배우고 한가지 기준에 의해 평가받으며 이에 따라 줄이 세워질 필요가 없다. 아니 줄을 세워서는 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최근 초등학교까지 확대 시행하고 있는 '일제고사'는 작은 학교를 만들고 키우기보다는 전국을 하나의 '큰 학교'로 만들어버린.. 한마디로 시대를 역행하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이전에 통폐합되었던 학교도 다시 쪼개고, 새로운 작은 학교도 많이 만들어서 각기 다른 특성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그래서 초등학교 학생으로서의 기본적인 학습능력 예를 들면 구구단이나 한글 해독 능력, 기본적인 예체능교육을 공통으로 하고 어느 지역의 어느 학교는 무슨무슨 특성화 학교, 또 다른 학교는 이런저런 특성화 학교 이런 식으로 육성했으면 좋겠다. 이런 학교들이 제각기 서로 다른 모양과 빛깔로 빛나는 별이 되어 밤 하늘을 수놓을 때, 그야말로 다양성이 존중되는 아름다운 학교,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2편 시청 후기-

후속편을 보니 PD수첩이 방영된 후 모델이 된 학교와 지역주민들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고 한다. 왠고하니 엄마들이 시도때도없이 찾아오고 전화해서 학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고 순식간에 그 지역 땅값 집값도 터무니없이 올랐을 뿐더러 집값이 오르자 주인이 기존의 세입자에게 갑자기 돈을 올려달라고 요구해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이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듣고 내 자식 좋은 학교에 보내자고 남의 자식이 쫓아내는 극성 '맹모삼천지교'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찹하다. 방송에 나온 학교는 그야말로 이런 학교가 있다라고 하는 '모델'이었지 여기 좋은 학교가 있으니 이쪽으로 아이를 보내라고 하는 '광고'가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작은 학교들이 많이 있고 이들은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분명히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프로그램에서 작은 학교의 변화를 이끌었던 한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려보자.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실험도 가능했고 오히려 많은 것을 해볼 수 있었다고..."

좋은 학교,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학교에 자신의 아이들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들이여! 다른 사람들이 만든 학교에 내 아이만을 보내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경쟁심과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그전에 우리 동네의 작은 학교를 각기 다른 색깔로 키우고 변화시키려 지역민들과 함께 손잡는 것이 천박한 경쟁지상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깨어있는 부모들의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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