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력과 명예를 누린 친일종교인들
종교계 친일인사, 해방후에도 교권 중심세력으로 활동
불교계 이종욱 전 총무원장 애국자로 둔갑해 현충원에 안장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이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3명 중에는 해방 전후 한국종교계를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종교별로는 불교 54명, 개신교 51명, 유림 41명, 천도교 29명, 천주교 7명 등 총 182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4월 발표된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202명이었으나 이의제기 등 재조사를 통해 최종확정한 것이다.
불교계의 경우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이종욱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다. 그는 월정사 승려로 있을 때인 1919년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3·1 운동의 성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도 강원도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상해에서 국내로 돌아와 조선총독부가 임명하는 월정사 주지가 되었으며 불교계 대표 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에는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 일제를 적극 지지했으며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쓰기도 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빠짐없이 참여했으며 전투기 등 전쟁물자 및 위문금 헌납운동, 징병제, 학도병 모집, 창씨개명에 적극 호응했다. 또한 친일 종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설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스스로 종무총장(오늘날 총무원장)이 되었다. 그는 해방 후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고 승권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지만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해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에는 총무원장으로 복귀했다. 그가 동국대 이사장으로 있을 때 친일 승려인 권상로가 총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과거를 조작해 애국자로 둔갑한 이종욱 전원장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그의 이름이 친일인사로 등재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했지만 편찬위원들은 친일행적 자료가 명확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교계 친일인사 중에는 이종욱 전 총무원장과 같이 애국자로 인정되어 현충원에 안장된 인물로 대흥사 주지 박영희가 있다.
개신교 친일파, 미군정과 이승만 비호 아래 교계 지배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친일인사가 많은 개신교의 경우는 각 교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장로교 총회장 홍택기 목사, 감리교 초대 총리사를 지낸 양주삼 목사, 성결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 등도 친일명단에 올랐다. 조선장로교는 1938년 27회 총회 때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곧바로 신사참배를 단행했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홍택기 총회장을 비롯해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 당시 서기로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그 다음해인 1939년 총회장에 오른 곽진근 목사 등이 친일인사로 분류되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총리사(오늘날 감독회장)가 된 양주삼 목사는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종교인이기에 앞서서 국민"이라면서 신사참배를 찬성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없이 "출옥교인이나 그렇지 않은 교인이나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고 주장했고 미국유학경험을 통해 쌓은 뛰어난 영어실력과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교회인맥을 통해 미군정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반민특위가 친일행위로 그를 구속하자 미국 감리교의 실력자 웰치감독은 같은 감리교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이 대통령은 즉석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에게 반민특위를 경비했던 특경대에 대한 해체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양주삼은 이후 승승장구해 1949년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한국전쟁 중에 납북 당했다.
감리교 목사였던 정춘수 목사도 한때는 3.1운동 당시 33인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으나 자신이 참여한 개량주의 민족주의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1938년)으로 체포된 이후 친일활동에 나섰다. 1939년 일제의 지원 아래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취임했고 1941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하여 내선일체에 순응할 것과 신사참배를 독려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금되기도 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방면되었다. 그는 고향인 청주시 3·1공원에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인 신흥식·권동진·손병희·권병덕·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으나, 1996년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시민단체들에 의해 철거되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성결교회 초대 총회장이자 성결교의 신학적 토대를 만든 이명직 목사는 '국민정신총동원성결교회연맹'과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전력으로 친일인사에 올랐다. 이명직 목사 역시 친일경력에도 불구하고 성결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1965년)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것보다 차라리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명직 목사는 1938년에 쓴 '붉은 용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세의 붉은 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이며, 그 증거로서 종교박해, 인명살상, 사상혼란 등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 사단 즉 붉은 용의 도래 사상과 건전히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명직 목사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집단이 결성한 반공연맹이 기독교의 입장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박해하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일본·독일·이태리의 연합전선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가 반종교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명직 목사는 "공산의 사상이라는 것은 오늘날 종교를 무시한다. 그뿐 아니라 종교박멸 운동을 도와주고, 무신론을 장려하여 인생의 전도를 암흑화시키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명직 목사의 친일활동이 논란이 되자 이명직 목사기념사업회는 '과연 이명직 목사는 친일인사인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파라고 운운하는 것은 교단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 목사는 일제로부터 특혜를 누린 일이 없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제에 이용을 당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이 목사는 신사참배 이후 일제가 한국교회를 통합하고 구약성서를 폐기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명직 목사가 속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2007년 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교단지도자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국가와 민족 앞에 교단의 이름으로 사죄문을 발표한 바 있다.
교육계 인사로 분류된 백낙준 전 연세대총장은 독실한 개신교신자로 <한국기독교교회사>를 집필할 정도로 교계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과 같이 친일인사보다는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를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 아래 초대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 연세대학총장을 지내는 등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영화는 모두 누렸다. 백낙준 전 총장은 1957년 잡지<사상계>에 자신이 극구 찬양했던 태평양 전쟁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에 가득 찬 일본이 이웃나라를 병탐하고 이웃 동포를 괴롭히기 위해 벌인, 용납할 수 없는 부정불의의 행동'으로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권력과 유착해 자신의 영혼을 팔고자 하는 한국지식인의 표본과 같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노기남 대주교, 일제를 위한 미사진행과 신사참배 앞장서
천주교의 경우는 일제치하에서는 교세가 미미했기 때문에 친일인사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천주교 최초의 주교이자 대부였던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적은 한국천주교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근대 한국천주교의 지주이자 산 증인이며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일하던 1936년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는 지침을 내리자 "신앙적인 아무런 가책 없이 신사참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다.
노기남 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천주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매월 첫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 미사를 진행했고 매월 1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자 천주교 실무책임자로 임명돼 교구 내 40여 개 성당을 돌면서 신자들에게 황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근로보국대로 출동해 보국작업을 행할 것, 위문봉지나 위문금을 수집하여 군사후원 연맹에 보낼 것을 권장했다.
1940년 천주교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이 결성되면서 이사장이 된 노기남 주교는 신자 전원이 참여하는 애국반을 조직해 전시체제에 총동원하기로 하고 성탄절과 같은 교회 최대의 명절에도 시국강연회나 좌담회, 군국주의 영화 상영 등을 개최해 황국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했다. 1942년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욱 드러내고자 군용기를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매월 1인 1전씩 헌금하고 그해 말까지 모금하기로 한 금액을 6월 말까지 완납하도록 했다.
1943년에는 징병과 학병 독려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천주교회의 대표의원으로 참여한 그는 전선으로 나가는 천주교신자들을 위해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특별 강복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을 창간하고 1948년 대구교구장 서리를 지냈으며 1962년 대주교 및 서울대교구장이 되어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하고, 1967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1965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다.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적에 대해 반민족문제연구소와는 별도로 지난 7월 초 정부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노기남 주교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통보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9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문을 보냈다.
서울대교구는 "(위원회 결정은) 형식적 조건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식보다 중요한 실질적 내용, 즉 일제협력행위에 나서게 된 현실적 동기, 행위 주체에 대한 정체성, 행위의 상대적 정도 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당시 노 주교 행동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다른 친일 행위자들과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대교구는 또 노기남 대주교가 1946년 명동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에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것을 들어 "노 주교가 반민족적 인물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올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2005년 모 집회에서 노기남 주교의 행위는 "본의에 의한 자발적 행동이나 적극적인 친일은 아니며 단지 한국의 천주교회 대표로 나선 것일 뿐"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이 나름의 변명이 될 수는 있지만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의 홍보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적 양심과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일제는 친일인사들의 발언을 명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보내고 성노예로 삼았다. 일제하에서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을 했기 때문에 각자의 조직에서 최고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해방 후에는 좌우대립과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붓다와 예수의 얼굴에 먹칠하면서 권세를 누리자 그들의 후계자들 역시 같은 길을 걸으면서 한국종교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종교계 역시 친일청산의 길은 요원하다.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이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3명 중에는 해방 전후 한국종교계를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종교별로는 불교 54명, 개신교 51명, 유림 41명, 천도교 29명, 천주교 7명 등 총 182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4월 발표된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202명이었으나 이의제기 등 재조사를 통해 최종확정한 것이다.
불교계의 경우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이종욱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다. 그는 월정사 승려로 있을 때인 1919년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3·1 운동의 성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도 강원도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상해에서 국내로 돌아와 조선총독부가 임명하는 월정사 주지가 되었으며 불교계 대표 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에는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 일제를 적극 지지했으며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쓰기도 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빠짐없이 참여했으며 전투기 등 전쟁물자 및 위문금 헌납운동, 징병제, 학도병 모집, 창씨개명에 적극 호응했다. 또한 친일 종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설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스스로 종무총장(오늘날 총무원장)이 되었다. 그는 해방 후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고 승권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지만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해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에는 총무원장으로 복귀했다. 그가 동국대 이사장으로 있을 때 친일 승려인 권상로가 총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과거를 조작해 애국자로 둔갑한 이종욱 전원장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그의 이름이 친일인사로 등재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했지만 편찬위원들은 친일행적 자료가 명확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교계 친일인사 중에는 이종욱 전 총무원장과 같이 애국자로 인정되어 현충원에 안장된 인물로 대흥사 주지 박영희가 있다.
개신교 친일파, 미군정과 이승만 비호 아래 교계 지배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친일인사가 많은 개신교의 경우는 각 교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장로교 총회장 홍택기 목사, 감리교 초대 총리사를 지낸 양주삼 목사, 성결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 등도 친일명단에 올랐다. 조선장로교는 1938년 27회 총회 때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곧바로 신사참배를 단행했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홍택기 총회장을 비롯해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 당시 서기로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그 다음해인 1939년 총회장에 오른 곽진근 목사 등이 친일인사로 분류되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총리사(오늘날 감독회장)가 된 양주삼 목사는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종교인이기에 앞서서 국민"이라면서 신사참배를 찬성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없이 "출옥교인이나 그렇지 않은 교인이나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고 주장했고 미국유학경험을 통해 쌓은 뛰어난 영어실력과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교회인맥을 통해 미군정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반민특위가 친일행위로 그를 구속하자 미국 감리교의 실력자 웰치감독은 같은 감리교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이 대통령은 즉석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에게 반민특위를 경비했던 특경대에 대한 해체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양주삼은 이후 승승장구해 1949년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한국전쟁 중에 납북 당했다.
감리교 목사였던 정춘수 목사도 한때는 3.1운동 당시 33인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으나 자신이 참여한 개량주의 민족주의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1938년)으로 체포된 이후 친일활동에 나섰다. 1939년 일제의 지원 아래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취임했고 1941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하여 내선일체에 순응할 것과 신사참배를 독려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금되기도 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방면되었다. 그는 고향인 청주시 3·1공원에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인 신흥식·권동진·손병희·권병덕·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으나, 1996년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시민단체들에 의해 철거되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성결교회 초대 총회장이자 성결교의 신학적 토대를 만든 이명직 목사는 '국민정신총동원성결교회연맹'과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전력으로 친일인사에 올랐다. 이명직 목사 역시 친일경력에도 불구하고 성결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1965년)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것보다 차라리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명직 목사는 1938년에 쓴 '붉은 용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세의 붉은 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이며, 그 증거로서 종교박해, 인명살상, 사상혼란 등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 사단 즉 붉은 용의 도래 사상과 건전히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명직 목사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집단이 결성한 반공연맹이 기독교의 입장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박해하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일본·독일·이태리의 연합전선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가 반종교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명직 목사는 "공산의 사상이라는 것은 오늘날 종교를 무시한다. 그뿐 아니라 종교박멸 운동을 도와주고, 무신론을 장려하여 인생의 전도를 암흑화시키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명직 목사의 친일활동이 논란이 되자 이명직 목사기념사업회는 '과연 이명직 목사는 친일인사인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파라고 운운하는 것은 교단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 목사는 일제로부터 특혜를 누린 일이 없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제에 이용을 당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이 목사는 신사참배 이후 일제가 한국교회를 통합하고 구약성서를 폐기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명직 목사가 속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2007년 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교단지도자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국가와 민족 앞에 교단의 이름으로 사죄문을 발표한 바 있다.
교육계 인사로 분류된 백낙준 전 연세대총장은 독실한 개신교신자로 <한국기독교교회사>를 집필할 정도로 교계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과 같이 친일인사보다는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를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 아래 초대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 연세대학총장을 지내는 등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영화는 모두 누렸다. 백낙준 전 총장은 1957년 잡지<사상계>에 자신이 극구 찬양했던 태평양 전쟁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에 가득 찬 일본이 이웃나라를 병탐하고 이웃 동포를 괴롭히기 위해 벌인, 용납할 수 없는 부정불의의 행동'으로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권력과 유착해 자신의 영혼을 팔고자 하는 한국지식인의 표본과 같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노기남 대주교, 일제를 위한 미사진행과 신사참배 앞장서
천주교의 경우는 일제치하에서는 교세가 미미했기 때문에 친일인사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천주교 최초의 주교이자 대부였던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적은 한국천주교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근대 한국천주교의 지주이자 산 증인이며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일하던 1936년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는 지침을 내리자 "신앙적인 아무런 가책 없이 신사참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다.
노기남 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천주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매월 첫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 미사를 진행했고 매월 1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자 천주교 실무책임자로 임명돼 교구 내 40여 개 성당을 돌면서 신자들에게 황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근로보국대로 출동해 보국작업을 행할 것, 위문봉지나 위문금을 수집하여 군사후원 연맹에 보낼 것을 권장했다.
1940년 천주교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이 결성되면서 이사장이 된 노기남 주교는 신자 전원이 참여하는 애국반을 조직해 전시체제에 총동원하기로 하고 성탄절과 같은 교회 최대의 명절에도 시국강연회나 좌담회, 군국주의 영화 상영 등을 개최해 황국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했다. 1942년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욱 드러내고자 군용기를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매월 1인 1전씩 헌금하고 그해 말까지 모금하기로 한 금액을 6월 말까지 완납하도록 했다.
1943년에는 징병과 학병 독려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천주교회의 대표의원으로 참여한 그는 전선으로 나가는 천주교신자들을 위해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특별 강복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을 창간하고 1948년 대구교구장 서리를 지냈으며 1962년 대주교 및 서울대교구장이 되어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하고, 1967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1965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다.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적에 대해 반민족문제연구소와는 별도로 지난 7월 초 정부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노기남 주교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통보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9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문을 보냈다.
서울대교구는 "(위원회 결정은) 형식적 조건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식보다 중요한 실질적 내용, 즉 일제협력행위에 나서게 된 현실적 동기, 행위 주체에 대한 정체성, 행위의 상대적 정도 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당시 노 주교 행동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다른 친일 행위자들과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대교구는 또 노기남 대주교가 1946년 명동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에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것을 들어 "노 주교가 반민족적 인물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올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2005년 모 집회에서 노기남 주교의 행위는 "본의에 의한 자발적 행동이나 적극적인 친일은 아니며 단지 한국의 천주교회 대표로 나선 것일 뿐"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이 나름의 변명이 될 수는 있지만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의 홍보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적 양심과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일제는 친일인사들의 발언을 명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보내고 성노예로 삼았다. 일제하에서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을 했기 때문에 각자의 조직에서 최고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해방 후에는 좌우대립과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붓다와 예수의 얼굴에 먹칠하면서 권세를 누리자 그들의 후계자들 역시 같은 길을 걸으면서 한국종교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종교계 역시 친일청산의 길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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