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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48)

[우리 말에 마음쓰기 795] '핑크 양의 존재', '1959년 이전에 존재' 다듬기

등록|2009.11.11 14:08 수정|2009.11.11 14:08

ㄱ. 핑크 양의 존재

.. 이후 두 번 다시 핑크 양의 존재에 대해 문제를 삼으려는 자는 없었다 ..  《로버트 카파/민영식 옮김-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해뜸,1987) 60쪽

 '이후(以後)'는 '그 뒤'나 '그 뒤로'나 '그때부터'나 '그러고 나서는'으로 다듬습니다. "-에 대(對)해"는 "-를"이나 "-를 놓고"로 손보고, '자(者)'는 '사람'으로 손봅니다.

 ┌ 핑크 양의 존재에 대해
 │
 │→ 핑크 양이 있는지 없는지
 │→ 핑크 양이 누구인지
 │→ 핑크 양이 참말 있는지
 │→ 핑크 양은 있지 않다고
 │→ 핑크 양은 없다면서
 └ …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없는 듯한데 있다고 우긴다고 생각하니 입방아를 찧습니다. 따로 사귀는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진을 내보이면서 이런 사람이라고 하니, 그때까지 찧고 빻고 떠들던 사람들이 조용해집니다. 끽소리를 못합니다.

 ┌ 핑크 양은 꾸며낸 사람이라고
 ├ 핑크 양은 꿈에만 있다고
 ├ 핑크 양은 세상에 없다고
 └ …

 있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없어서 '없는' 사람입니다. 있으면 '살고' 있는 사람이고, 없으면 '지어내'거나 '꾸며낸' 사람입니다.

 있으니까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없으니까 없는 그대로 밝히면서 말을 건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랑은 틀림없이 있고 믿음은 어김없이 있으며 따스함은 한결같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말과 글은 나날이 새로워지거나 거듭나며 언제나 좋은 쪽으로든 궂은 쪽으로든 달라집니다.

 우리 스스로 사랑하고 믿고 따스하고 넉넉하게 껴안을 수 있는 매무새일 때에는 서로서로 사귀는 자리에서 흐뭇합니다. 이 흐뭇함은 서로서로 나누는 말마디를 한결 흐뭇하게 북돋우고, 이 흐뭇함이 모이고 쌓이고 엮이면서 우리 삶 또한 차츰차츰 흐뭇한 길을 걷습니다.


ㄴ. 1959년 이전에 존재했던

.. 이 보고서는 귀국 문제를 둘러싸고 1959년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  《테사 모리스-스즈키/한철호 옮김-북한행 엑서더스》(책과함께,2008) 317쪽

 '이전(以前)에'는 '앞서'나 '앞에'로 다듬고, "일본의 움직임에 대(對)해서는"은 "일본이 어떻게 움직이려 하느냐는"이나 "일본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는"으로 다듬어 줍니다.

 ┌ 1959년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
 │→ 1959년에 앞서 일본이 보여준 움직임을 놓고는
 │→ 1959년에 앞서 일본이 내비친 움직임을 놓고는
 │→ 1959년에 앞서 일본이 어떻게 나왔는가는
 │→ 1959년에 앞서 일본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는
 │→ 1959년에 앞서 일본이 어떠했느냐는
 └ …

 일본책을 우리 말로 옮기기 앞서는 거의 안 쓰던 낱말 '존재'가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며 일본글과 일본말로 우리 생각을 얽어 놓기 앞서는 거의 누구도 쓸 일이 없던 낱말 '존재'가 아니었느냐 싶습니다.

 기나긴 해에 걸쳐 사람들한테 익숙해졌고, 익숙해진 사람들마다 쓸 만하다고 생각하니까 꾸준하게 쓰는 '존재'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한자말 '존재'를 쓴 나날보다는 안 쓴 나날이 훨씬 깁니다. 한자말 '존재'로 우리 뜻과 넋을 나타내 온 나날보다는 이 낱말을 안 쓴 나날이 대단히 깁니다.

 ― 1959년 이전에 있던 일본의 움직임 (?)

 이 보기글에서 '존재했던'만 '있던'으로 고쳐쓸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고쳐써 준다면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쳐써 놓고 들여다보더라도 어딘가 알맞지 않습니다. 말투가 얄궂습니다. "일본의 움직임"이라는 글월에는 토씨 '-의'가 달라붙고, "1959년 이전에 있던 움직임"이라는 글월 또한 설익은 번역투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 1959년 앞서 일본이 움직였던 모습 (o)

 '동향(動向)'이나 '동태(動態)' 같은 한자말이 아닌 '움직임'이라는 토박이말을 쓴 대목은 틀림없이 반갑습니다. 그러나, 낱말 하나만 살가이 잘 쓴다고 해서 이 보기글이 통째로 잘 쓴 글월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낱말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가운데, 낱말과 낱말을 알차게 엮어 놓아야 비로소 잘 쓴 글월이라 할 수 있고 살가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문학을 하든 학문을 하든, 우리들은 무슨 생각과 뜻을 나타내거나 나누려 하는가를 또렷하게 돌아보고 아로새겨야 합니다. 먼저 똑똑히 내 생각과 뜻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 다음 글멋을 부리든 글치레를 하든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처음부터 글멋을 부리거나 글치레만 한다면 엉터리가 됩니다.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앞뒤가 어긋나 버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네 문학을 돌아보면 "시적 허용"이니 "소설적 허용"이니 하면서, 글을 아무렇게나 쓰려고 합니다. 우리네 학문을 헤아리면 "학문적 문체"이니 "논문적 문체"이니 하면서, 글을 어렵고 딱딱하게만 쓰려고 합니다.

 ┌ 1959년까지 일본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는
 ├ 1959년까지 일본이 보여준 움직임은
 ├ 1959년까지 일본이 무엇을 했는가는
 ├ 1959년까지 일본이 무슨 일을 했는가는
 └ …

 생각을 하면서 해야 하는 말이요, 생각을 하는 가운데 써야 하는 글입니다. 생각을 살찌우면서 해야 하는 말이며, 생각을 살찌우는 가운데 써야 하는 글입니다.

 생각을 옳게 가누려 하는 만큼 말을 옳게 가누려 애써야 합니다. 생각을 바르게 추스르려 하는 만큼 말을 바르게 다독여야 합니다. 생각을 슬기롭게 북돋우고자 하는 만큼 말을 슬기롭게 북돋워야 합니다.

 말 따로 생각 따로가 아닙니다. 말과 생각을 함께 보듬어야 합니다. 말과 생각이 함께 나아가야 하며, 말과 생각이 함께 빛나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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