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고기가 싫다고 하셨지,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따르지 못한다
며칠 전 막내아우 결혼식 문제로 찾아뵌 당숙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때는 우렁찬 목소리로 '형수, 국 좀 더 주시오, 국 좀 더 줘'했던 당신의 그 누님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했던 형수님을 오랜만에 만나 물끄러미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가는 "애기다, 애기여. 이렇게 순한 애기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너한테는 좋을 리가 없겄제. 어쩔 것이냐. 고생스럽더라도 애기 하나 키운다 생각하고 잉?" 하고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천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숙의 그런 말씀이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이미 내게 아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다, 내 딸이다, 이렇게 최면까지 걸어가며 관계설정을 새로 하고자 애를 썼다. 그리고 그것은 어지간히 성과도 있었다. 나는 이제 어머니의 어떠한 돌출 행동도 연민이나 슬픔, 짜증보다는 웃음 띤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완전정복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열 번에 여덟 번 정도는 그렇게 느긋하게 넘어갈 만큼 내공이 쌓였다.
그렇다고 내 가슴에 무엇이든 다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무슨 도사 같은 것이라도 들어앉았을까. 아니었다. 가능한 한 웃으려고 애를 쓰는 내 마음 한편에서 무엇인가 꿈틀대는 것이 있었다. 주변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명하게 이것이다 하고 집어내지 못할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게 뭘까. 내 눈앞에 있는데도 내가 못 보고 있는, 잡지 못하는 이것은 대체 뭘까.
엊그제 밥상 앞에서 마침내 그 안타까운 것의 정체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밥 생각이 없어서 생선에 가시나 발라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문득 "나만 먹어?" 하신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그냥 들어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더 "나만 먹어?" 하신다. 그제야 알아듣고 "나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밥 생각이 없네"하고 역시 건성으로 대꾸했는데,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안 먹어"하시더니 정말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 버리고 있었다.
이게 뭔가, 왜 그러지? 그 순간 내 머리에 전깃불이 확 켜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머니에게서 "나만 먹어?" 소리가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날수도 벌써 여러 날째였다. 과일을 깎았을 때도 "나만 먹어?"였고, 과장봉지를 뜯었을 때도 역시 "나만 먹어?"였다. 그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듣고 있었다. 듣고 있으면서도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건성으로 대충 넘어가고 말았었다. 하도 이것저것 다양한 새로운 현상이 어머니에게서 나타나니까 그런 정도는 아마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말았던 것일 터이었다.
어린아이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어른도 늙어서 치매 상태에 이르면 이기적이 되어간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상식이었다. 이 상식에 입각해서 어머니를 어린아이로 보고자 애를 썼고, 그 애씀이 일정 부분 성과를 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에게 아주 심한 닭고기 알레르기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닭고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육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닭고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마 집에서 닭을 길러 잡아먹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나 돼지는 집에서 길러도 잡아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닭은 알을 받아 장에 내다 팔 목적 외에 제사 때나 한여름 삼복에 삼계탕 같은 것을 해먹을 목적으로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복날이었는지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튼 매년 초복에서 말복에 이르는 시기 어느 날인가 닭을 서너 마리씩 한꺼번에 잡아서 커다란 솥에 넣어 끓이곤 했었다. 오남 일녀 여섯 자식과 아버지가 그 앞에 둥글게 앉아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정신없이 뜯어먹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없었다. 가끔 아버지가 "어이 자네는 안 먹고 뭣혀" 소리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듯 "아이고 냅둬" 퉁명스럽게 한 마디 대꾸를 하고는 아예 안 보이는 밖으로 나가버리곤 하셨다.
닭고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고기 앞에서 어머니는 그와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제사 때 돼지고기를 삶아도 맨 나중에 부스러기나 몇 점 입에 넣을 뿐이었고, 국을 끓여도 고깃점은 찾아볼 수 없이 국물만 떠서 밥을 말았다. 생선을 먹을 때도 꼬리나 머리만 따로 떼어 "이것이 젤로 맛난 것이여"하고 누가 묻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기나 할뿐 몸통에는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길이 들여져 갔다. 어머니에게는 닭고기를 비롯한 대부분 고기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믿게 되었고, 어머니는 미식가여서 생선을 먹어도 어두육미라고 맛좋은 머리 부분만 취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반응을 보이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장성한 뒤에까지도 가족이 함께 어디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아 참 엄마는 고기 못 먹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어리석은 믿음이 여지없이 깨진 것은 십여 년 전 어느 결혼식 뷔페 식당에서였다. 어머니가 들고 온 식판을 보니 야채류보다는 고기류가 더 많았다. 너무도 뜻밖이라는 듯 별 생각도 없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엄마 식성이 변했나보네? 아니면 체질이 변했을까?"
그러자 어머니는 피식, 한 번 웃어 보일뿐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밥 생각조차 놓아버린 채로 이것저것 생각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고기에 손을 댄 것이 어찌 그때뿐이었을까.
이것저것 곰곰이 따져보면 여러 수많은 잔치 석상에서 어머니는 육개장이라든가 갈비탕 같은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흑백사진처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식이라는 것이 그때 그런 순간들에만 청맹과니가 되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 장면을 보면서도 못 보고 그저 어머니는 고기 알레르기가 있다는 생각만 신앙처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아마 어머니 앞에만 서면 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화가 난다고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포승줄에라도 묶인 것처럼 금방 반항할 기세를 보이다가도 어머니의 눈과 마주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고개가 절로 수그러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겨우 철이 들었는데 어머니가 치매란다. 내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어머니는 내가 이룩한 성과(?)는커녕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단다.
아침에 배를 한 개 깎아서 가장자리 쪽으로 잘게 사각사각 썰어놓고 "자, 배 먹읍시다" 하는데 어머니는 또 "나만 먹어?" 하신다. 이제는 내게도 이력이 붙어서 왼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깡치'를 쑥 내밀며 "아이고 좋아하시네. 나는 더 큰 거 먹고 있거든" 하니까 어머니는 빤히 쳐다보며 "오 그렇네. 크네" 하신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추억에 빠진다.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배를 깎아서 가장자리 쪽으로 잘게 사각사각 썰어놓고 자식들에게 '자, 배 먹자' 했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커다란 '깡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우리들한테는 작은 것을 주고 엄마는 큰 것을 먹지? 그것 나 줘. 큰 것 나 주란 말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기어이 어머니의 손에 들린 그 커다란 먹지도 못할 '깡치'를 빼앗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시큼텁텁한 그것을 한입 베어 문 채로 아마 울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아이였을 적에 나는 그랬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지금 내가 아이였을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큰 것을 달라 하지 않고, 달라기는커녕 아들이 큰 것을 들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 안심한 표정으로 작은 것을 집어 드신다. 도대체 이 아이는 무슨 아이인 것인가.
도대체 어머니의 영혼 어디에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기에 아들을 아들로 올곧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툭하면 오빠라거니 아저씨라거니 하면서도 먹을 것 앞에서는 저토록 '나만 먹어?'하는 방식으로 당신보다는 아들 입을 먼저 생각하는 것인가.
당숙의 그런 말씀이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이미 내게 아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다, 내 딸이다, 이렇게 최면까지 걸어가며 관계설정을 새로 하고자 애를 썼다. 그리고 그것은 어지간히 성과도 있었다. 나는 이제 어머니의 어떠한 돌출 행동도 연민이나 슬픔, 짜증보다는 웃음 띤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완전정복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열 번에 여덟 번 정도는 그렇게 느긋하게 넘어갈 만큼 내공이 쌓였다.
그렇다고 내 가슴에 무엇이든 다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무슨 도사 같은 것이라도 들어앉았을까. 아니었다. 가능한 한 웃으려고 애를 쓰는 내 마음 한편에서 무엇인가 꿈틀대는 것이 있었다. 주변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명하게 이것이다 하고 집어내지 못할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게 뭘까. 내 눈앞에 있는데도 내가 못 보고 있는, 잡지 못하는 이것은 대체 뭘까.
엊그제 밥상 앞에서 마침내 그 안타까운 것의 정체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밥 생각이 없어서 생선에 가시나 발라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문득 "나만 먹어?" 하신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그냥 들어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더 "나만 먹어?" 하신다. 그제야 알아듣고 "나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밥 생각이 없네"하고 역시 건성으로 대꾸했는데,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안 먹어"하시더니 정말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 버리고 있었다.
이게 뭔가, 왜 그러지? 그 순간 내 머리에 전깃불이 확 켜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머니에게서 "나만 먹어?" 소리가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날수도 벌써 여러 날째였다. 과일을 깎았을 때도 "나만 먹어?"였고, 과장봉지를 뜯었을 때도 역시 "나만 먹어?"였다. 그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듣고 있었다. 듣고 있으면서도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건성으로 대충 넘어가고 말았었다. 하도 이것저것 다양한 새로운 현상이 어머니에게서 나타나니까 그런 정도는 아마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말았던 것일 터이었다.
어린아이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어른도 늙어서 치매 상태에 이르면 이기적이 되어간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상식이었다. 이 상식에 입각해서 어머니를 어린아이로 보고자 애를 썼고, 그 애씀이 일정 부분 성과를 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에게 아주 심한 닭고기 알레르기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닭고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육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닭고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마 집에서 닭을 길러 잡아먹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나 돼지는 집에서 길러도 잡아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닭은 알을 받아 장에 내다 팔 목적 외에 제사 때나 한여름 삼복에 삼계탕 같은 것을 해먹을 목적으로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복날이었는지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튼 매년 초복에서 말복에 이르는 시기 어느 날인가 닭을 서너 마리씩 한꺼번에 잡아서 커다란 솥에 넣어 끓이곤 했었다. 오남 일녀 여섯 자식과 아버지가 그 앞에 둥글게 앉아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정신없이 뜯어먹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없었다. 가끔 아버지가 "어이 자네는 안 먹고 뭣혀" 소리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듯 "아이고 냅둬" 퉁명스럽게 한 마디 대꾸를 하고는 아예 안 보이는 밖으로 나가버리곤 하셨다.
닭고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고기 앞에서 어머니는 그와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제사 때 돼지고기를 삶아도 맨 나중에 부스러기나 몇 점 입에 넣을 뿐이었고, 국을 끓여도 고깃점은 찾아볼 수 없이 국물만 떠서 밥을 말았다. 생선을 먹을 때도 꼬리나 머리만 따로 떼어 "이것이 젤로 맛난 것이여"하고 누가 묻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기나 할뿐 몸통에는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길이 들여져 갔다. 어머니에게는 닭고기를 비롯한 대부분 고기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믿게 되었고, 어머니는 미식가여서 생선을 먹어도 어두육미라고 맛좋은 머리 부분만 취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반응을 보이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장성한 뒤에까지도 가족이 함께 어디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아 참 엄마는 고기 못 먹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어리석은 믿음이 여지없이 깨진 것은 십여 년 전 어느 결혼식 뷔페 식당에서였다. 어머니가 들고 온 식판을 보니 야채류보다는 고기류가 더 많았다. 너무도 뜻밖이라는 듯 별 생각도 없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엄마 식성이 변했나보네? 아니면 체질이 변했을까?"
그러자 어머니는 피식, 한 번 웃어 보일뿐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밥 생각조차 놓아버린 채로 이것저것 생각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고기에 손을 댄 것이 어찌 그때뿐이었을까.
이것저것 곰곰이 따져보면 여러 수많은 잔치 석상에서 어머니는 육개장이라든가 갈비탕 같은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흑백사진처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식이라는 것이 그때 그런 순간들에만 청맹과니가 되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 장면을 보면서도 못 보고 그저 어머니는 고기 알레르기가 있다는 생각만 신앙처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아마 어머니 앞에만 서면 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화가 난다고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포승줄에라도 묶인 것처럼 금방 반항할 기세를 보이다가도 어머니의 눈과 마주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고개가 절로 수그러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겨우 철이 들었는데 어머니가 치매란다. 내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어머니는 내가 이룩한 성과(?)는커녕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단다.
아침에 배를 한 개 깎아서 가장자리 쪽으로 잘게 사각사각 썰어놓고 "자, 배 먹읍시다" 하는데 어머니는 또 "나만 먹어?" 하신다. 이제는 내게도 이력이 붙어서 왼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깡치'를 쑥 내밀며 "아이고 좋아하시네. 나는 더 큰 거 먹고 있거든" 하니까 어머니는 빤히 쳐다보며 "오 그렇네. 크네" 하신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추억에 빠진다.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배를 깎아서 가장자리 쪽으로 잘게 사각사각 썰어놓고 자식들에게 '자, 배 먹자' 했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커다란 '깡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우리들한테는 작은 것을 주고 엄마는 큰 것을 먹지? 그것 나 줘. 큰 것 나 주란 말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기어이 어머니의 손에 들린 그 커다란 먹지도 못할 '깡치'를 빼앗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시큼텁텁한 그것을 한입 베어 문 채로 아마 울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아이였을 적에 나는 그랬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지금 내가 아이였을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큰 것을 달라 하지 않고, 달라기는커녕 아들이 큰 것을 들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 안심한 표정으로 작은 것을 집어 드신다. 도대체 이 아이는 무슨 아이인 것인가.
도대체 어머니의 영혼 어디에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기에 아들을 아들로 올곧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툭하면 오빠라거니 아저씨라거니 하면서도 먹을 것 앞에서는 저토록 '나만 먹어?'하는 방식으로 당신보다는 아들 입을 먼저 생각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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