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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86) 로망

[우리 말에 마음쓰기 796] '로망'과 '로맨스'와 '꿈'과

등록|2009.11.12 15:33 수정|2009.11.12 15:33

- 로망(roman)

.. 나에겐 로망이 하나 생겼다. 아빠와 함께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는 일. 쌀집 자전거를 구해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것은 다소 무리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빠와 함께 페달을 밟으며 아빠의 어린 시절을 함께 추억해 보고 싶다 ..  《장치선-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뮤진트리,2009) 42쪽

 "자전거를 구(求)해"는 "자전거를 빌려"나 "자전거를 장만해"나 "자전거를 마련해"로 다듬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은 "여행을 떠나는 일은"이나 "여행 떠나기는"로 손보고, '다소(多少)'는 '적잖이'나 '여러모로'나 '아무래도'로 손보며, '무리(無理)일지'는 '어려울지'나 '힘들지'로 손봅니다. "아빠의 어린 시절(時節)을"은 "아빠가 보낸 어린 날을"로 손질합니다. '추억(追憶)해 보고'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돌아보고'나 '나누어 보고'로 손질해 줍니다.

 ┌ 로망(프 roman) : [문학] 12~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 소설
 ├ 로맨스(romance)
 │  (1)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 또는 연애 사건
 │   - 그들의 로맨스는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  (2) [문학] = 로망(roman)
 │  (3) [음악] = 연가(戀歌)
 │
 ├ 나에겐 로망이 하나 생겼다
 │→ 나에겐 꿈이 하나 생겼다
 │→ 나한텐 애틋한 꿈이 하나 생겼다
 │→ 나한텐 부푼 꿈이 하나 생겼다
 └ …

 우리들은 어처구니없을 만한 말을 하고 있으면서 우리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알맞게 잘 쓴다고 여기거나, 다른 사람들 모두 쓰고 있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콩글리쉬라고 스스로 꾸짖지만, 나중에는 콩글리쉬이고 뭐고 '내가 그 말을 쓰겠다는데 네가 뭔 소리여?' 하는 매무새로 바뀝니다. 아니, 처음부터 콩글리쉬이건 아니건 '널리 쓰면 그냥 쓰면 되는 말 아니야? 뭐 하러 시시콜콜 따지는데?' 하는 매무새이곤 합니다.

 오늘날 개나 소나가 아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연예인이나 지식인이나, 기자나 교사나, 글쟁이나 학생이나,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게 으레 쓰는 말마디 가운데 '로망'은 다름아닌 콩글리쉬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을 때 '로망'은 프랑스말에서 왔다고 하니 콩'글리쉬'라 하기에는 멋쩍은데, 뜻이나 느낌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채 엉터리로 쓰는 낱말입니다.

 ┌ 남자의 로망 / 여자의 로망 (x)
 │
 ├ 남자의 꿈 / 여자의 꿈 (△)
 └ 남자가 품는 꿈 / 여자가 품는 꿈 (o)

 프랑스말인지 미국말인지 옳게 가누지 않는 우리들이 이곳저곳에 널리 쓰는 낱말 '로망' 쓰임새를 살피면 거의 모든 자리에서 '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할머니이든 할아버지이든, 노래꾼이든 정치꾼이든, 의사이든 간호사이든, '로망'을 품에 안으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꿈'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꿈'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로망'만을 읊습니다. '로망'이 아니면 '꿈'이 아닌 듯 여기고, '로망'이라고 해야 비로소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라 할 수 있고 '비손'이라 할 수 있으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아니,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꿈이라 할 때에는 그냥 '꿈'이 있는 한편, '달콤한 꿈'과 '달디단 꿈'과 '부푼 꿈'과 '부풀어오르는 꿈'이나 '높은 꿈'과 '멋진 꿈'이 있을 텐데, 때와 곳에 따라 다 달리 나타내거나 드러낼 우리 느낌과 생각을 말글에 알뜰히 담아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달콤한 꿈 / 애틋한 꿈 / 그리운 꿈 / 멋진 꿈
 └ 단꿈 / 사랑꿈 / 고운꿈 / 큰꿈 / 무지개꿈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냥 '꿈'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아쉽다면, '단꿈'이라는 새말을 빚을 수 있습니다. '큰꿈'이나 '고운꿈'처럼 새롭게 낱말 하나 엮을 수 있습니다. '사랑꿈'과 '무지개꿈'처럼 우리들이 꿈 하나에 무엇을 더 실어내고 싶어하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글흐름에 따라서는 '하얀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맑은꿈'이나 '노란꿈'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낱말로 삼지 않더라도 "오랜 꿈"이나 "오래된 꿈"이라 할 수 있어요. "남자의 꿈"이나 "여자의 꿈" 같은 말마디는 "남자라면 품는 꿈"이나 "여자이기에 품는 꿈"처럼 토씨를 달리하면서 느낌과 생각을 달리 나타낼 수 있고요.

 ┌ 나한텐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 나한텐 멋들어진 꿈이 하나 생겼다
 ├ 나한텐 더없이 즐거운 꿈이 하나 생겼다
 ├ 나한텐 아름다운 꿈이 하나 생겼다
 └ …

 꿈을 품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느냐를 돌아봅니다. 누군가한테는 '멋들어'진 꿈이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즐거운' 꿈이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아름다운' 꿈이 있겠지요.

 이 보기글을 쓴 분으로서는 당신 아버지하고 짐자전거를 타고 우리 나라 구석구석을 나들이하는 일이 더없이 '멋진' 꿈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즐거운' 꿈이라 할 만합니다. 어느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느낄 꿈으로 간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꿈은 달라지고, 달라지는 꿈에 따라 삶이 새로워집니다. 삶이 새로워질 때에는 하루하루 새삼스러우면서 기쁘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하루하루 새삼스럽게 기쁘고 반갑고 고마울 때에는, 우리 입에서 터져나오고 우리 손에서 샘솟는 말글은 하나하나 알차고 티없고 싱그럽게 뿌리를 내립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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