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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줍지마라" - "벼룩의 간을 내어먹지"

고려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에게 '폐지 판매 금지' 조치

등록|2009.11.16 12:07 수정|2009.11.16 15:36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그동안 폐지를 팔아 식대 3만 5천 원을 보조해 왔는데 이제 그것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너무한 것 아닙니까?"

11월 초, 고려대 자연계 캠퍼스 지하 광장에는 2백여 명의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모였다. 대부분 5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모이게 된 이유는 속칭 '폐지 전쟁' 때문이다.

바로 잡습니다
첫 기사 나갈 때 청소용역업체를 현대씨앤알로 잘못 표기했습니다. 환경미화 노조에서 업체명이 성일환경이라고 알려와 바로 잡습니다.
고려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에 따르면 "개교 이래 105년 동안" 학교에서 굴러다니는 신문, 광고지 등 폐지를 주워 생계에 보태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당국이 고용한 청소용역업체인 성일환경이 그것을 금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용역업체는 "생활 재활용품(폐지)도 학교 재산이므로 개별 매각이나 처분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판매 시에는 고발조치"하겠다고 했다. 업체가 밝힌 폐지 수거 금지 이유는 '등록금 동결로 인한 수익 보존'이다.

워낙 황당한 일이라 집회가 열람실 바로 앞에서 열리는데도 이에 항의하는 학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끄러워서 나왔다던 한 학생은 "서명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하루 만에 3600여 명이 동참했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폐지 수거를 금지한다면 식대에 보태쓸 수 있도록 2만 원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용역업체는 이를 거절했다.

12년 동안 학교에서 일해 온 최경순 자연계 현장대표(70)는 "12년 동안 고대에서 설움을 겪어왔다. 그런데 지금 폐지마저 빼앗아가려 한다. 우리가 1만 5천 원으로 양보안까지 냈다. 그것도 싫다고 한다. 이제는 1만 5천 원 문제가 아니다" 하고 말했다.

지금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용역업체에 예전처럼 폐지를 팔아 식대에 보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원청인 고려대가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대 당국은 "업체와 노동자들 사이의 문제일 뿐 학교와는 관련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획기적인 예산 절감 노력이 폐지판매 금지?

▲ 지난 11월 초 고려대 자연계 캠퍼스 지하 광장에서 2백여 명의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폐지 판매 금지' 철회를 요구했다. ⓒ 김지윤


고대 당국은 2000년대 들어 환경미화 노동자 활용 방식을 직접 고용에서 하청 고용으로 바꿨다. 청소용역업체 선정에서 최저입찰제를 도입해 사실상 노동자들의 임금을 떨어뜨리는 구실을 제공했다.

국정감사에 따르면 고대 당국은 730억 원을 주식에 투자했다. 고대 당국이 쌓은 적립금은 2천억 원에 달한다. 고대는 '뻥튀기' 예산으로 등록금을 인상해서 적립금을 쌓았다는 의혹을 몇 년째 받고 있다.

그런 고대가 지난해 말 등록금 동결을 선언하며 "학교가 앞장서 과감하고도 획기적인 세출 예산 절감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청소용역업체가 폐지 판매 금지 조처를 취한 이유가 바로 '등록금 동결'이다.

세출 예산 절감 노력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업가들에게는 개교 100주년 기념 고급 와인을 돌리고, 학교가 주관하는 온갖 행사들에서는 화려한 겉치레를 위한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가난한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폐지 수거는 학교 재산이라며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새벽 4~5시에 가족들 밥을 차려놓고 학교로 출근해 오후 4시까지 일하고 퇴근한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받는 돈은 고작 97~100만 원. 88만 원 세대라 불리는 20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88만 원 세대와 노동자들의 불붙는 연대

이번 일로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분노가 가장 컸겠지만, 학생들의 정서적 거부감도 만만치 않다. 고대 환경미화 노조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가장 큰 힘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노조 설립부터 학생들은 '불안정노동 철폐를 주도할 거야(불철주야)'라는 단체를 결성해 노동자들과 연대했다. 이후 있었던 중요한 고비마다 학생들은 환경미화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 왔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관계는 결코 일방향이 아니었다.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이 글을 쓰는 내가 출교당했을 때 가장 열심히 연대해주셨다. 처음 출교무효 재판에서 이겨 눈물 흘리던 나를 가장 먼저 안아주신 분들이 바로 이분들이었다. 그 적은 임금에 몇 천 원씩 모아서 1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몇 번씩 우리 출교생들에게 전달해 줬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이런 끈끈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학생들은 빨리 움직였다. 총학생회, 문과대 학생회, 다함께고려대모임 등 학생들은 노동자들의 총회에 함께 참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공동 선전전, 대자보 부착 등에 나섰다. 

고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성신여대와 연세대학교의 환경미화 노동자들, 연세대학교 학생들과 민주노총 북부지구협의회, 진보신당 등도 투쟁을 지지하며 집회에 참석했다. 이제껏 연대의 미덕을 몸소 실천해온 결과다.

'투명인간'을 거부하며

청소용역 노동자들 이야기를 다룬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 유니폼이 좋은 점이 뭔지 알아요? 우리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는 거죠."

투명인간.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던 단어다. 그러나 노동자와 학생들은 이런 현실을 거부했다. 고대당국이, 청소용역업체가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투명인간' 취급해도, 우리는 현실에 맞서 왔다.

현재 노동자들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겠다고 힘을 모으고 있다. 어색해하면서도 서명판을 학생들에게 내미시는 모습에서 생존을 위한 절박함과 동시에 당당함이 느껴진다. 새벽을 열었던, 묵묵히 우리 곁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해왔던 것에 대한 자부심과 당당함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분들이 하루라도 일손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벼룩의 간을 내어먹으려는 황당하고 비인간적 처우에 맞선 노동자들과 또 학생들의 움직임에 승리가 찾아올 수 있도록 관심이 더욱 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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