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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미실이 남긴 4가지 미스터리

[사극으로 역사읽기] '우리의 상식을 뒤엎은 여인' 미실 특집 3편

등록|2009.11.16 11:39 수정|2009.11.16 11:59

▲ <선덕여왕>에서 미실역을 맡은 고현정. ⓒ MBC

사극열풍이 불기 시작한 이래 TV에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 미실처럼 파격적인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 국민적 관심을 얻은 사극들, 예를 들면 <대장금> <불멸의 이순신> <주몽> <태왕사신기> <이산> 등은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잘 아는 인물(이순신·고주몽·광개토대왕·정조) 혹은 한국인들의 역사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물(장금)을 소재로 한 것들이었다. 이와 달리, 미실은 기존 역사책을 통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역사상식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 기존 사극에서 묘사된 여인의 이미지와 비교할 때에도 미실은 분명히 새로운 '악녀'였다. 기존 사극을 주름잡은 '악녀' 장희빈 등은 어디까지나 남성 의존적인 여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드라마 속 '악녀' 미실은 남자들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남자들을 거느리고 자기 뜻대로 살았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선덕여왕> 속 미실이 더욱 더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 치고는, 미실과 '함께한' 6개월이 너무 짧았는지도 모른다. 미실이 남기고 간 의문점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여인이다. 이 점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바탕이 된 필사본 <화랑세기>를 읽어본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실이 남기고 간 의문점들을 모두 다 다룰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선덕여왕> 시청자들과 <화랑세기> 독자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미스터리 중에서 4가지만 다뤄보기로 한다. 미실이 과연 실존인물인지, 미실과 남자들의 관계는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여존남비'였는지, 미실의 권세는 과연 진평왕의 왕권을 압도했는지, 미실과 같은 왕비족의 존재가 신라 결혼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 것인지 하는 점이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4대 의문점이다.

[미스터리①] 미실의 실존 여부와 필사본 <화랑세기>의 신빙성

'미실은 정말 대단한 여인이야!'하고 단정을 내리기 전에, 아직까지는 미실의 실존 여부를 확정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논쟁이 학계에서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이 논쟁의 결과에 따라 미실은 실제 인물이 될 수도 있고 허구의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이 논쟁의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미실의 실존 여부와 필사본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규명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하나는, 필사본 <화랑세기> 한 권만으로 이 책의 진위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필사본을 다 읽어본 뒤에 '이거 거짓이구나' 혹은 '이거 진짜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그 느낌을 그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재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또 하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와의 비교를 통해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도 일정한 한계가 따른다는 점이다.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샘플이 단 2개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나마 두 책의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두 사료 모두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 수백 년 뒤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확정하려면, 일본측에 원본 확인에 관한 협조를 요청하든가 아니면 일본에 가서 원본을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필사본과 원본을 대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위의 2가지 방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하면서도 위험스러운 접근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실의 실존 여부도 그 같은 공을 들인 연후에야 비로소 확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미실은 파격적인 여인인 동시에 참으로 '쉽지 않은' 여인이다. 일본까지 다 수색해본 연후에야 그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시중에 나와 있는 <화랑세기> 번역본 가운데에는 원문의 일부만 번역한 축약본도 있어서, 축약본만 읽은 독자들은 <화랑세기> 전문에 근거한 기사나 논문 등을 읽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스터리②] 미실의 집안은 과연 '여존남비'였을까?

드라마 속에서 미실은 정식남편인 세종(독고영재 분)과 '사실상의 남편'인 설원(전노민 분)보다 항상 상석에 앉았다. 미실이 한가운데에 앉고 세종은 미실의 오른쪽에, 설원은 그 왼쪽에 앉았다. 이런 장면을 보고서 '신라가 모계사회였나?'라는 의문을 갖는 시청자들도 있었던 듯하다.

이 같은 드라마 속의 풍경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화랑세기> 제8세 풍월주 문노 편에 나오는 문노 부부의 관계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사항이다.

진지왕 등극(576년) 이후에 미실의 주선으로 만난 문노와 윤궁(미실의 사촌자매)의 결혼생활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각각의 단계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미실과 남자들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단계는 문노가 골품이 없어서 윤궁보다 신분이 낮았던 때였다. 이때 두 사람은 함께 살기는 했지만 현대적 개념의 결혼식을 치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현대적 개념의 사실혼(동거)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이때에는 부부관계에서 윤궁의 위상이 더 높았다는 점이다.

▲ 미실의 정부인 설원랑(전노민). ⓒ MBC

제2단계는 진지왕 폐위(579년)에 참여한 공로로 문노가 골품을 얻게 되어 두 사람의 신분이 같아진 때였다. 이때에야 비로소 두 사람은 현대적 개념의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집안에서 문노의 지위가 더 높았다. 부부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결혼식이 열린 날에 윤궁이 문노에게 "어제까지는 낭군이 첩의 신(臣)이어서 첩을 따르는 일이 많았지만, 오늘부터는 첩이 낭군의 처가 되니 마땅히 낭군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말한 데에서 그 같은 관계의 역전을 읽을 수 있다.

윤궁의 대화에 나오는 신(臣)이란 한자의 본래 의미는 '남자 노예'였다. 이런 원래의 의미가 발전하여 나중에는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란 뜻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화랑세기>에서 사용되는 신(臣)이란 글자는 '측근 부하'나 '아랫사람' 정도의 뉘앙스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골품을 얻기 이전의 문노는 부인인 윤궁과의 관계에서 그런 신(臣)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 부부 간의 신분이 다른 경우에는 신분이 높은 쪽이 가정을 주도하고, 신분이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가정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세종과 미실의 관계에서는 세종이 주도권을 갖고, 미실과 설원의 관계에서는 미실이 주도권을 잡았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미스터리③] 미실의 권세와 진평왕의 왕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미지를 가장 많이 '구긴' 인물 중 하나로 진평왕(조민기 분)을 들 수 있다. 드라마 속 진평왕은 항상 미실의 권세에 휘둘렸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아예 병석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매우 많았다. 드라마 속 진평왕은 그야말로 허수아비나 로봇이었다.

이것은 나이 많은 후궁인 미실이 어린 진평왕을 제치고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는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의 기록에 근거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미실이 대낮에 태몽을 꾸고는 "급히 진평왕을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어린 진평왕이 자기 기분을 맞춰주지 못하자 이내 그를 버리고는 다시 설원의 방으로 달려갔다는 <화랑세기> 제16세 풍월주 보종 편의 묘사처럼 미실이 어린 진평왕을 마음대로 다루었음을 보여주는 <화랑세기> 속의 풍경에 근거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계의 기존 연구에서는 진평왕 시대를 왕권강화가 추진된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한 논문에서는 "진평왕 시대는 신라 중고기(中古期) 왕권강화의 마무리 시기"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 시기에 왕권이 강력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수많은 전쟁을 치르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의 딸인 덕만공주가 여성의 신분으로 대권을 계승하기도 힘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에서 진평왕이 지나치게 왜소하게 묘사된 것은, 위의 <화랑세기> 기록에 나오는 어린 진평왕과 미실의 관계를 드라마 <선덕여왕>이 그대로 수용한 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화랑세기>에서도 진평왕이 평생 미실에게 휘둘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화랑세기>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진평왕 초기의 에피소드만 살펴볼 경우에는 미실을 과대평가하고 진평왕을 과소평가하게 될 위험이 있다. 

[미스터리④] 왕비족과 근친혼의 관계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 두 개의 왕비족이 등장한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진골과는 다름)이 바로 그것이다. 진골정통의 시조는 옥모라는 여인이고, 대원신통의 시조는 보미라는 여인이었다. 이들 왕비족의 경우에는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혈통이 계승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화랑세기> 제2세 풍월주 미진부 편에 따르면, 미실은 대원신통 소속의 왕비족이었다. 미실이 진지왕 때에 왕후가 될 뻔했던 것도 기본적으로 그가 왕비족이었기 때문이다. 또 진흥왕·세종·동륜태자·진지왕·진평왕 같은 왕족들이 미실을 상대한 동기는 물론 미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실이 왕비족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족의 성립과정을 보여주는 실례는 <화랑세기> 세종 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제13대 미추왕(김씨)이 후손들에게 "옥모의 인통(姻統, 왕비혈통)이 아니면 왕후로 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국왕의 명령에 의해 왕비족 하나가 성립한 것이다. 물론 훗날 옥모(진골정통) 혈통의 여인들이 아닌 대원신통의 여인들과 혼인한 왕들도 있었으니, 이 명령은 그리 잘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 <선덕여왕>의 한 장면. ⓒ MBC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몽골제국의 4칸국(4한국) 중 하나인 일칸국의 제4대 군주인 아르군(재위 1284~1288년)에게 불루간 카툰(바야우트 씨족 출신)이라는 왕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왕후가 죽을 때에 남긴 유언은 "나와 같은 혈통이 아니면 내 자리를 계승할 수 없고 아르군의 부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아르군은 몽골제국의 쿠빌라이칸에게 자기 부인과 같은 혈통의 여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 왕후의 혈통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칸국의 왕후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의 명령에 의해 특정 혈통의 여인이 왕비가 되는 사례가 계속 축적되어 하나의 관행으로 정착되면 <화랑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왕비족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왕비족이 형성되는 나라에서는 '이상한 결혼문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근친혼이 바로 그것이다. 왕족과 왕비족 내부에서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근친혼이 자연스레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왕비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공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갖는다. 그는 왕족인 동시에 왕비족이다. 아버지로부터는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고 어머니로부터는 왕비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딸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왕실 남자와 결혼을 해둠으로써 훗날 왕후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을 수 있다. 또 대권을 꿈꾸는 남자 왕족의 입장에서는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공주가 왕비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라 왕실의 근친혼에 대해 늘 궁금하게 생각해왔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확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직은 뭐라 확실한 단언을 내릴 수 없지만, 우리는 신라 근친혼의 원인이 혹시라도 <화랑세기> 속에 있는 왕비족의 존재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으로 규명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에 나오는 역대 신라 왕후들이 과연 <화랑세기>에 나오는 대원신통 및 진골정통에 속하는지 여부를 학술적으로 규명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미실 이후의 역대 왕후들 중에서 대원신통 소속이 나온다면, 그들과 미실의 관계를 추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 미실이 남긴 숙제

지금까지 이 글에서는 미실을 둘러싼 4가지의 의문점만 다루었지만, 그와 관련된 궁금증을 모두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지 모른다. 이는 미실에 대한 우리의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신라에 관한 정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현왕후나 장희빈처럼 향후 한국 사극의 단골 소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 미실은 위와 같이 우리에게 흥미로운 의문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전통적인 여인상을 뒤엎는 파격적인 캐릭터인지라, 어쩌면 앞으로는 미실이 인현왕후·장희빈보다도 사극에 더 많이 등장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미실을 둘러싼 의문점들이 계속해서 증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실이 남긴 의문점들을 풀기 위해 사료 비판 및 분석을 통해 미실의 실존 여부와 발자취를 탐구하는 한편, 사극을 통해 사료와 사료 사이의 빈틈을 메우며 미실에 관한 상상력을 풍부히 한다면, 꼭 미실뿐만 아니라 신라사·여성사 나아가 한국사 전체의 이미지가 한층 더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 <선덕여왕> 속의 미실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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