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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순신 사당 '박정희 현판' 어찌하리오

[取중眞담] 국보급 문화재보다 더 귀한 대접이라니

등록|2009.11.17 11:02 수정|2009.11.17 11:23

▲ 2005년 매헌 윤봉길 의사 사당앞에 걸린 박정희 현판(충의사)를 떼어내고 있는 양수철 전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 양 씨는 이 일로 구속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 이정희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血書)'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매헌 윤봉길 의사 사당과 아산 현충사에 걸린 친필 현판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충의사(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소재) 본전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문제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 의사의 의거일에 맞춰 1968년 4월 29일 이곳을 방문해 준공식 겸 의거 기념행사를 하면서 내걸었다. 가로 183cm에 세로 83cm의 검은색 바탕의 현판에는 흰색으로 '忠義司'라고 가로 쓰기 한 후 우측에는 세로글씨로 '1968년 무신년 4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혀 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도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달려 있다. 그는 재임 18년 동안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14번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충무공 이순신의 충무정신을 맹목적 애국주의와 결부시켜 정권안정화를 꾀했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도하면서 성역화 실무자회의에 까지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현판은 국보급 문화재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양수철 전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은 지난 2005년 3.1절 아침에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남 예산 충의사에 걸려있던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전격 철거했다. 그는 철거이유에 대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사당에 친일파 박정희의 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국가가 나서서 철거해야 되는데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아 직접 나서게 되었다. 과거사법 처리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고 밝혔다.

국보급 문화재보다 더 귀한 대접 받는 '박정희 현판'

▲ 철거후 1달 여만에 다시 복원돼 윤봉길 의사 사당에 내걸린 박정희 현판 ⓒ 안서순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철거한 양 전 지부장은 공용물 손상과 건조물 침입 혐의로 구속됐고 항소심 재판부 또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다.

문화재청과 예산군은 떼어낸 지 한 달여 만에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충의사 현판을 복원해 다시 내걸었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친손녀까지 나서 박 전 대통령 친필로 재복원하려는 데 대해 "할아버지도 원치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를 더 욕되게 하는 것이며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지만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박종순 예산군수는 "박정희가 젊은 시절 군인으로서 성공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일본군대에 입대한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매년 윤 의사의 의거일에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산군수가 일본군대 입대행위마저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재임시절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체'로 재복원한 유홍준 문화재청장 또한 박정희 친필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2004년 9월 문화재청장 취임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광화문' 현판을 교체한다고 밝혔다가 '과거사 청산 음모'라는 보수진영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현충사는 박 대통령 개인기념관 같은 곳"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공격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때문인지 그는 철거된 충의사 현판을 박정희체로 재복원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양수철 전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은 출소직후 충의사를 찾아 "다카키 마사오(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에 대한 정확한 사실 관계가 널리 알려진 만큼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 현판을 떼어낼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다.

그로부터 채 5년도 되지 않아 박 전 대통령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실이 밝혀졌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대국민성금으로 만든 친일인명사전에 박 전 대통령이 등재됐다.

비슷한 나이 만주로 간 윤봉길 의사와 박정희

▲ 박정희 전 대통령 만주군 혈서 지원 사실을 보도한 <만주일보> 1939년 3월 31일자 신문. 붉은 색 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해당 기사 부분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윤봉길 의사(1908~1932)는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만들어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은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 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했다. 윤 의사는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윤 의사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인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 하겠다는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윤 의사는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장에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박 전 대통령은 비슷한 나이 때 만주군관학교 예과 과정을 수석 졸업했다.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이 충의사와 현충사에만 있는 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에도, 시골 초등학교에도 자신의 방문을 기념하는 입석 또는 휘호를 남겼다.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발자취와 흔적을 죄 남겨 두더라도 충의사와 현충사 사당에서만은 박정희 이름 석 자를 지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 석 자 지우는 것이야말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과 같은 만주 땅에서 목숨을 걸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윤 의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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