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향을 떠날 때처럼, 아이들도 떠납니다"
[현지르포②- 필리핀 빈민촌 '다마얀'] 그들은 왜 이주노동을 꿈꾸는가?
올해 25살의 '마리'씨는 한때 다마얀(Damayan) 청년들에게 가장 인기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많은 청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21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어느덧 아이를 셋이나 두고 있다. 네 살, 두 살, 그리고 두 달, 아이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젊은 엄마 '마리'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홀로가는 캐나다 행을 고민하고 있다.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두바이에서 간호사로 1년 정도 이주노동을 했어요. 쉽진 않았지만 제법 많은 돈을 벌어올 수 있었고, 지금 남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었죠. 지금 어머니한테 잠시 아이들을 맡겨놓고 캐나다에 2년 가량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같아선 다마얀 주변에서 계속 사는게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일인가 고민하게 되거든요."
'마리'씨는 환경오염과 홍수 문제 등으로 빠르게 슬럼화되는 다마얀에서 빨리 탈출해야겠단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엄마가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은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처럼, 아이들이 필리핀을 떠납니다"
다마얀에서 사는 '루디'씨는 고향을 등지고 다마얀으로 흘러들어올 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네그로스 옥시덴탈(Negros Occidental) 주 작은 섬에 사신 내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어요. 입에 풀칠하고 살아갈만큼, 딱 그만큼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더군요. 학교를 다녀야 이 나라에선 살아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드는데 고향에 있어선 도통 학교 보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메트로 마닐라로의 탈출은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후 '루디'씨는 라구나에 있는 한 외국계 자동차 기업에 취직한다. 기계정비에 뛰어난 기술을 가진 그는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이 정도면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쯤 그는 다른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집도 하나 있어야 겠고, 조그마한 농장도 하나 가져봐야겠다!'
그는 그 희망을 위해 10여 년간 '사우디'와 '일본'에서 정말이지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필리핀에서 일을 할 때,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활동을 했었어요. 독재(1965년 ~ 1986년까지 집권한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일컬음)도 타도하고 싶었고,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아내와 아이들이 주린 배를 잡고 덩그라니 앉아 있더라구요. 그런 가족들을 난 외면할 수 없었어요."
말을 끝마친 뒤 독주를 한 잔 마시는 그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그의 아들은 이번 주말 두바이로 떠난다. 대학에서 요리를 배운 그는 두바이에 있는 호텔 주방장이 되는 것이 목표이며, 2년 전 그곳으로 떠나 엔지니어 일을 하는 형의 도움을 받을 요량이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생이별을 해야 되는 그 순간에도 설렘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희망을 찾아 떠나야만 할까?
해외 이주노동자의 수는 1995년 78만 2297명에서 2000년 99만 2397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지만, 실제 수는 8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2204년의 경우 이들의 송금액은 150억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를 2004년도 GNP(약 5조페소=약 100조 원)와 비교하면 15%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 필리핀 사회복지와 NGO(이영환 저) 중 -
루디씨가 살았던 고향 네그로스 옥시덴탈(Negros Occidental) 주는 지난 30여년간 1%를 웃도는 인구증가율을 기록했으나, 현 거주지 다마얀이 속해있는 리잘(Rizal) 주는 5%를 웃도는 인구증가율을 보여줬다. 아버지 세대가 농촌에서 도시로 희망을 찾아 떠나온 도농간 인구증가율은 5배 가까운 차이를 낳게 되었고, 도시에서 더이상 아이들을 가르치고, 내 집 마련 등의 희망을 품기 힘들어진 자식 세대들은 눈을 이주노동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 덕택에 지난 15년간 필리핀 이주노동은 두 배 가량 늘어나게 된다.
'다마얀' 지역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필리핀 NGO 'COM(Community Organizing Multiversity)'은 해당 지역에서 머무르고 나온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번 체험을 통해서 한국에 머물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한국을 비롯한 중동, 동북아 등 필리핀 사람들이 이주노동으로 선택하는 지역에서 그들에게 드리워진 가혹한 편견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이 왜 벌어지는가에 대해 다마얀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60대의 '준'씨는 자신의 삶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저는 젊었을 때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조그마한 집도 얻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대학까진 못보냈지만 고등학교까진 아이들 교육을 시켜줄 수 있었고, 지금은 구멍가게 하나를 하고 있구요. 하지만 지금은 도시 근처에 살아가는 우리의 벌이라는 것도 시원찮습니다. 오죽하면 집에 수도를 설치할 2000페소(한화 5만 5천원 정도)가 없어서 이 나이에 물을 길러 다니고 있겠어요?"
"요즘 한 달에 2000페소 벌고 있는데 말이지(웃음)"
지나가는 이웃 하나가 쓴 웃음을 지으며, '준'씨의 말을 보탰다.
루손 섬 북부에 위치한 해변 마을 빠굿뿟에 살아가는 '루밀라'씨의 경험을 살펴보면 왜 그들이 이주노동을 꿈꿀 수밖에 없는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저는 두바이와 대만을 오가면서 2년 가량 이주노동을 했고, 300백만페소(한화 800만원 정도)짜리 집과 100만페소(한화 260만원 정도)짜리 트라이시클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이주노동을 떠나기 전엔 트라이시클을 운전해봐야 손에는 5천페소(한화 13만원 정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죠. 주인한테 사납금을 내야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때보다 세 배 정도는 넘게 돈을 벌고 있어요. 풍족하다고까진 말할 수 없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수천명의 필리핀 사람들은 해외이주노동 비자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관청을 뛰어다니고 있다. 정직한 방법으론 비자 받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하니 불법중개인 돈을 떼먹는 사례도 다반사라고 사람들은 심심찮게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마얀의 젊은이들 중 조그마한 기술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의 부모 세대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왔듯이 대부분 이주노동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은 희망을 좇기 위한 몸부림으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단 강박관념을 가지고 필리핀에 발을 들이고, 필리핀 젊은이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처절한 고생을 감내하며 이주노동을 선택한다.
언젠가부터 오염으로 인해 잿빛으로 변해버린 라구나 호수를 뒤로 하고 저 멀리 보이는 올티가스(Oltigas : 메트로 마닐라 제 2의 경제 중심지) 빌딩 숲을 수놓은 저녁놀은 그들의 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두바이에서 간호사로 1년 정도 이주노동을 했어요. 쉽진 않았지만 제법 많은 돈을 벌어올 수 있었고, 지금 남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었죠. 지금 어머니한테 잠시 아이들을 맡겨놓고 캐나다에 2년 가량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같아선 다마얀 주변에서 계속 사는게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일인가 고민하게 되거든요."
▲ 이제 두 살이 된 마리 씨의 둘째 딸, 엄마가 이주노동을 가게 된다면 아이는 꼼짝없이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만 한다. ⓒ 고두환
'마리'씨는 환경오염과 홍수 문제 등으로 빠르게 슬럼화되는 다마얀에서 빨리 탈출해야겠단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엄마가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은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처럼, 아이들이 필리핀을 떠납니다"
▲ 필리핀 도농간 소득변화(1991 ~ 2000 / 2008 Philippine Statistical Yearbook 인용) ⓒ 고두환
다마얀에서 사는 '루디'씨는 고향을 등지고 다마얀으로 흘러들어올 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네그로스 옥시덴탈(Negros Occidental) 주 작은 섬에 사신 내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어요. 입에 풀칠하고 살아갈만큼, 딱 그만큼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더군요. 학교를 다녀야 이 나라에선 살아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드는데 고향에 있어선 도통 학교 보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메트로 마닐라로의 탈출은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후 '루디'씨는 라구나에 있는 한 외국계 자동차 기업에 취직한다. 기계정비에 뛰어난 기술을 가진 그는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이 정도면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쯤 그는 다른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집도 하나 있어야 겠고, 조그마한 농장도 하나 가져봐야겠다!'
그는 그 희망을 위해 10여 년간 '사우디'와 '일본'에서 정말이지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필리핀에서 일을 할 때,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활동을 했었어요. 독재(1965년 ~ 1986년까지 집권한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일컬음)도 타도하고 싶었고,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아내와 아이들이 주린 배를 잡고 덩그라니 앉아 있더라구요. 그런 가족들을 난 외면할 수 없었어요."
말을 끝마친 뒤 독주를 한 잔 마시는 그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 '루디' 씨의 눈가는 어느 새 촉촉해져 있었다. ⓒ 고두환
그의 아들은 이번 주말 두바이로 떠난다. 대학에서 요리를 배운 그는 두바이에 있는 호텔 주방장이 되는 것이 목표이며, 2년 전 그곳으로 떠나 엔지니어 일을 하는 형의 도움을 받을 요량이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생이별을 해야 되는 그 순간에도 설렘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희망을 찾아 떠나야만 할까?
해외 이주노동자의 수는 1995년 78만 2297명에서 2000년 99만 2397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지만, 실제 수는 8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2204년의 경우 이들의 송금액은 150억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를 2004년도 GNP(약 5조페소=약 100조 원)와 비교하면 15%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 필리핀 사회복지와 NGO(이영환 저) 중 -
▲ '루디' 씨 현 거주지 리잘과 고향 네그로스의 인구증가율(2008 Philippine Statistical Yearbook 인용) ⓒ 고두환
루디씨가 살았던 고향 네그로스 옥시덴탈(Negros Occidental) 주는 지난 30여년간 1%를 웃도는 인구증가율을 기록했으나, 현 거주지 다마얀이 속해있는 리잘(Rizal) 주는 5%를 웃도는 인구증가율을 보여줬다. 아버지 세대가 농촌에서 도시로 희망을 찾아 떠나온 도농간 인구증가율은 5배 가까운 차이를 낳게 되었고, 도시에서 더이상 아이들을 가르치고, 내 집 마련 등의 희망을 품기 힘들어진 자식 세대들은 눈을 이주노동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 덕택에 지난 15년간 필리핀 이주노동은 두 배 가량 늘어나게 된다.
'다마얀' 지역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필리핀 NGO 'COM(Community Organizing Multiversity)'은 해당 지역에서 머무르고 나온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번 체험을 통해서 한국에 머물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한국을 비롯한 중동, 동북아 등 필리핀 사람들이 이주노동으로 선택하는 지역에서 그들에게 드리워진 가혹한 편견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이 왜 벌어지는가에 대해 다마얀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60대의 '준'씨는 자신의 삶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저는 젊었을 때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조그마한 집도 얻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대학까진 못보냈지만 고등학교까진 아이들 교육을 시켜줄 수 있었고, 지금은 구멍가게 하나를 하고 있구요. 하지만 지금은 도시 근처에 살아가는 우리의 벌이라는 것도 시원찮습니다. 오죽하면 집에 수도를 설치할 2000페소(한화 5만 5천원 정도)가 없어서 이 나이에 물을 길러 다니고 있겠어요?"
"요즘 한 달에 2000페소 벌고 있는데 말이지(웃음)"
지나가는 이웃 하나가 쓴 웃음을 지으며, '준'씨의 말을 보탰다.
▲ 집에 수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아이는 물이 잠겨있는 동네 근처 어귀에서 수도를 찾아내 물을 깃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수도의 주인에게 얼마라도 사례를 해야 한다. ⓒ 고두환
루손 섬 북부에 위치한 해변 마을 빠굿뿟에 살아가는 '루밀라'씨의 경험을 살펴보면 왜 그들이 이주노동을 꿈꿀 수밖에 없는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저는 두바이와 대만을 오가면서 2년 가량 이주노동을 했고, 300백만페소(한화 800만원 정도)짜리 집과 100만페소(한화 260만원 정도)짜리 트라이시클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이주노동을 떠나기 전엔 트라이시클을 운전해봐야 손에는 5천페소(한화 13만원 정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죠. 주인한테 사납금을 내야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때보다 세 배 정도는 넘게 돈을 벌고 있어요. 풍족하다고까진 말할 수 없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주노동을 가기 위해선 많은 서류들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관청엔 매일 이렇게 사람이 몰려들고, 관련 서류를 잘 떼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 고두환
오늘도 수천명의 필리핀 사람들은 해외이주노동 비자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관청을 뛰어다니고 있다. 정직한 방법으론 비자 받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하니 불법중개인 돈을 떼먹는 사례도 다반사라고 사람들은 심심찮게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마얀의 젊은이들 중 조그마한 기술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의 부모 세대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왔듯이 대부분 이주노동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은 희망을 좇기 위한 몸부림으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단 강박관념을 가지고 필리핀에 발을 들이고, 필리핀 젊은이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처절한 고생을 감내하며 이주노동을 선택한다.
언젠가부터 오염으로 인해 잿빛으로 변해버린 라구나 호수를 뒤로 하고 저 멀리 보이는 올티가스(Oltigas : 메트로 마닐라 제 2의 경제 중심지) 빌딩 숲을 수놓은 저녁놀은 그들의 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다마얀' 마을은 어떤 곳? |
다마얀(Damayan)은 필리핀 최대 호수인 라구나 호수 근처에 4500여 가구가 모여사는 마을이다. 다마얀은 호수 및 도시와 가까운 탓에 직업을 구하기 쉽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다마얀은 지난 십수년간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가면서 겪었고 개발과 환경오염의 폐해를 몸소 겪으면서 도시빈민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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