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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위대한 직필의 힘, 조선왕조실록

[우리의 세계기록유산 - 궁중기록유산] 1

등록|2009.11.26 12:16 수정|2009.11.26 12:16
삶과 역사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 세계적인 기록문화

믿음. 세상의 수많은 가치 가운데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통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말이나 글, 눈빛 등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말이나 눈빛 등은 (비록 글보다 훨씬 더 진솔할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도 않고 내뱉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기에 이들이 주는 믿음은 일시적, 한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눈에 보이며, 보존만 잘 한다면 영원히 후세에 전해질 수 있기에 그 믿음을 오래도록 지켜갈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러한 점은 그 글이 진실을 담고 있을 때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로지 진실만을 담고 있는 글은 없다. 그 글 자체에 쓰는 사람의 판단, 주관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에 가깝게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이들이 많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선비들(유학자들)은 더 그러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선비들은 백성들에게 믿음을 얻는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믿음을 저버릴 경우 하늘과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치를 투명하게 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을 담은, 진실에 가까운 글을 후세에 남겨 역사의 평가를 받고자 하였다. 이는 왕조가 존속한 내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기록문화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너무나 다양하며, 거의 대부분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깝다. 칼이 붓을 이길 수 없으며, 또한 기록이 정치의 투명성, 공개성, 책임성을 보장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역량을 지닌 기록 강국이었다.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기록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우리의 궁중기록유산이 보여주는 역량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 가운데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세 건이나 되는데, 가장 먼저 지정된 것이 1997년 지정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다.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창업한 태조(太祖)로부터 철종(哲宗)까지의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형식으로 쓴 방대한 역사 기록이다. 남한에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북한에는 적상산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기록문화가 지닌 역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조선왕조실록>은 단일 왕조 전체를 담고 있는 기록물(실록)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을 자랑하며, 질적인 측면 또한 가장 우수하다.

실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도 편찬되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실록은 여러 측면에서 <조선왕조실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분량은 물론이요, 다른 나라의 실록은 주로 정책에 관련된 것이며, 다른 분야의 기록은 소략하기 짝이 없는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정책에 관련된 것은 물론 경제·사회·외교 및 문화사, 생활사 기록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으며, 내용 또한 자세하고 풍부하다. 무엇보다 실록의 편찬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들, 이를테면 직필, 열람 및 공개 금지 같은 것들이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오직 <조선왕조실록>뿐이다.

사관과 사초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사관(史官)이다. 사관은 입시, 숙직, 사초 및 시정기의 작성, 실록 편찬 및 보관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는 실록 편찬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는 사관이 정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입시하여 기록한 입시사초(入侍史草)와 사관이 집에 퇴궐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다. 사초는 보고 들은 내용은 물론 이에 대한 자신의 논평까지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은 물론 당대인들의 역사인식이 어땠는가도 아울러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초의 성격상 비밀과 보안은 필수였으며, 그것이 세상에 드러날 경우 엄청난 필화(筆禍)를 일으킬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래서 비밀을 지키고 종이를 재생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차원에서 실록 편찬이 이루어진 뒤 세초(洗草)되었다. 그러나 드물지언정 사초의 일부가 이제까지도 전해 내려와 그 시대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직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관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권력이 원칙을 누르는 경우 직필은 때로는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관들에게 곧은 마음과 강직한 성품, 곧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정신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사관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물을 사관으로 선발할지에 대한 그 과정 또한 매우 까다로웠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조선은 건국한 이래 실록을 편찬하면서 이것이 후대에까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조선왕조실록>은 한 국왕이 승하하면 다음 즉위하는 국왕대에 전 왕대의 실록이 편찬되었다. 국왕이 승하하면 실록을 편찬하는 임시 기관인 실록청(實錄廳, 또는 찬수청, 폐위된 국왕의 경우는 일기청)이 설치되었다. 실록청이 처음 설치된 것은 <성종실록>이 편찬된 때부터였는데, 실록 편찬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 이전에는 실록청을 설치하지 않고 편수관을 임명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청은 총재관(總裁官), 도청(都廳), 방(房)의 3단계로 구성되었다. 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하게 쓰였던 자료는 사초와 시정기(時政記)였다. 그 밖에 <일성록>(日省錄), 개인의 일기나 문집, 소(疏), 야사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의 3단계를 거쳐 실록이 만들어졌다. 마지막 정초 단계에 만들어진 정초본을 가지고 활자로 인쇄하여 4부 또는 5부를 만들었다. 초초본과 중초본은 세검정 밖 차일암이라는 곳에서 세초하였다. 썼던 종이를 물에 씻어 말린 다음 이를 재활용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조선의 종이는 질이 우수했다. 아울러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보안의식과 절약정신을 엿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파란만장한 역정

조선왕조실록은 1413년(태종 13) 태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실록을 원래의 1부 이외에 3부 더 만들어 기존의 춘추관사고와 충추사고에다 성주와 전주에 사고를 하나씩 더 만들어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전기에는 이렇게 네 개의 사고가 운영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한 부만 남게 된 실록을 다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존에 더욱 만전을 기한다. 사고가 노출되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어 왜란 때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잘못을 거울삼은 것이다. 그래서 임란 이전의 4사고 체제에서 5사고 체제로 바뀌었으며, 좀더 안전한 깊은 산중에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래서 태백산, 오대산, 마니산, 묘향산에 새로 사고가 지어진다. 임진왜란 때도 보존되었던 전주사고본이 마니산사고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 만들어진 인쇄본 3부가 각각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사고에, 그리고 새로 만들 당시의 교정본 1부가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다. 그 후 묘향산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본은 정족산으로 옮겨져 봉안되었고, 후기까지 잘 이어져갔다.

그러나 실록에 또 한 번의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불법으로 강점한 이후였다. 자칫하면 우리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본만이 일본에 약탈되었으며,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적상산본은 창경궁의 이왕직 장서각에 각각 보관되었다. 이 때 오대산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안타깝게도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지만, 나머지 3부는 우리 땅에 안전하게 전해 오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적상산본은 북한에서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는 태백산본과 정족산본만이 남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 태백산본이 부산에 있는 정부기록원으로 보내지고, 정족산본은 현재 도서관에서 분리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2006년에 의미있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 의해 약탈되었던 오대산본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당시 한 예능 프로그램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한다. 우리는 '반환', 일본은 '기증'의 형식이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외국으로부터 반환받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특히 오대산본은 실록이 새로 만들어질 때의 교정본이었기 때문에 실록의 편찬 절차나 정오와 같은 여러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대산본을 반환받기 위한 학계와 정계, 그리고 온 국민들의 성원은 마침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반환이라는 뜨거운 감동의 선물을 선사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주는 가르침

<조선왕조실록>이 아무리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한들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한계는 여러 기초 자료들을 여러 번에 걸친 절차에 걸쳐 편찬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록 자체가 진실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취사선택에서 편찬자의 입장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수정실록의 편찬이다. 네 번에 걸쳐 다양한 형식으로 편찬된 수정실록은 당론이 극명하게 반영되었다. 이밖에도 필화로 직필의 원칙이 흔들릴 때가 적지 않았던 것, 왜란 등 미증유의 전쟁으로 기록이 부실했던 측면도 빼놓을 수 없는 한계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러한 여러 한계를 충분히 덮고도 남을 중대한 가치가 있다. 공교롭게도 수정실록이 또한 그 사례가 된다. 수정실록은 비록 당론이 반영된 한계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원실록을 없애지는 않았다. 원실록과 수정실록을 같이 남김으로써 후세의 사람들에게 역사적 평가를 맡긴 것이다. 이는 역사인식의 투철함과 역사에 대한 외경이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밖에도 마치 눈 앞에 펼쳐 보이는 듯한 기록의 꼼꼼함 등등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수많은 가치들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준다.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떤가? 과연 우리는 우리 조상들에게 떳떳한가? 한 나라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통치 기록을 고의로 없애버리거나 집으로 가져 가는 일이 있었다. 역사가 정의와 원칙의 편에 있음에도 역사를 배반하는 행동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우리들의 도덕불감증, 도덕적 해이는 위험 수준이다. 역사 공부가 이미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지도 오래되었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조선왕조실록>은 어느덧 우리만의 문화유산이 아닌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더구나 최근 15~18세기에 걸친 이른바 소빙기 현상이라든지 인류의 외계충격현상에 대한 귀중한 사료 역할을 함으로써 인류사적인 기여까지 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러나 그러한 눈에 보이는 사례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정신일 것이다. 곧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그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추고 기억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날 것이며, 우리는 물론 세계의 자랑으로 더욱 다가올 것이다.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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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 <민족문화> 17, 민족문화추진회, 1994.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9,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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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2003.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존에 생각하고 써두었던 궁중기록유산에 관한 여러 글들을 바탕으로 여러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새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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