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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상량식, 민족자존의 뼈대가 완성되다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시발점 기대

등록|2009.11.28 09:52 수정|2009.11.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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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상량식 ⓒ (주)CPN문화재방송국


11월 27일, 경복궁 남쪽 정문 광화문(光化門)에서 새롭게 복원되는 광화문의 상량(上樑)식이 열렸다. 상량이란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처마도리와 중도리를 걸고 마지막으로 마룻대를 옮기는 것을 말한다. 마룻대는 건물의 중심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를 올린다는 것은 광화문의 뼈대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 상량문 봉안(奉安) 의식 ⓒ (주)CPN문화재방송국


특히 이 날은 음력으로 10월 11일로, 1865년 광화문을 중건(重建)하면서 상량을 한 지 정확히 144년 되는 의미 있는 날이다. 상량식은 중요무형문화재 56호 종묘제례보존회에서 조선시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근거해 상량문 봉안(奉安)의식이 거행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날 상량식에는 유인촌 문화부장관, 이건무 문화재청장을 비롯한 문화재 전문가 및 관련단체, 공사관계자 등이 참석하여 광화문의 새 시대를 함께 하였다.

▲ 상량문 봉안(奉安) ⓒ (주)CPN문화재방송국


2009년 새 빛을 찾은 광화문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1395년(태조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이라 명명되었다. 이후 1425년(세종7)에 광화문이라 이름이 지어졌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면서 광화문의 아픈 인고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그 후 1864년(고종1)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었으나, 1927년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으로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다시 원형잃은 광화문은 6·25로인해 전소해버리고 말았다. 1968년 다시 광화문의 이름을 달고 복원되나 이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된 반쪽짜리 복원에 지나지 않았다.

▲ 광화문 상량식 ⓒ (주)CPN문화재방송국


광화문이 완전한 복원을 꿈꾸게 된 것은 콘크리트의 몸으로 세워진 지 40년이 다 되어가던 2006년 12월 4일, '경복궁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선포식이 열리면서부터였다. 이후 2007년 5월, 콘크리트 광화문이 철거되었다. 또한 광화문 원위치를 찾기 위한 발굴조사, 가림막 설치, 육축(陸築) 축조 등을 거쳐, 2009년 8월 3일에 광화문의 주기둥이 세워졌다. 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 신응수 대목장을 비롯한 많은 전통 건축 장인들이 함께한 것으로써, 드디어 광화문이 과거의 아름답고 조화로웠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광화문 상량식 ⓒ (주)CPN문화재방송국


한편 광화문은 2010년 10월 완공 예정으로 완공되면 고종 당시의 모습으로 완벽히 복원할 계획에 있다. 또한 논란이 되었던 광화문의 현판은 1900년대 초 사진에 근거하여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디지털 복원기술로 원형 복원하여 완공과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이날 광화문의 상량식은 과거 우리 조상이 물려준 위대한 문화유산의 완전한 복원을 알리는 뜻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원된 광화문은 법궁(法宮) 경복궁의 정문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상량식 후 유인촌 장관이 언급한 것처럼 일제에 의해 상처 입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CPN문화재방송국(www.icpn.co.kr)에 동시제공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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