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서 산 책에서 세상의 속임수를 발견하다
[서평] 강준만의 각개약진 공화국을 읽고
'뚜러뻥' 강준만
강준만, 그는 우리 사회에 '뚜러뻥' 같은 존재다. 수도나 변기가 막히지 않도록 할 수는 없을지라도 막혀서 답답해진 곳에 그가 들이붓는 '실명비판'과 '성역과 금기에 대한 도전'은 우리 속에 쌓여있는 체증을 내려가게 하고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갓 대학에 입학해서 서점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연달아 펴내던 저널룩 인물과 사상을 재미있고 통쾌하게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신문의 기자들, 지체높은 정치인과 관리, 학식높은 학자들 너나 할 것 없이 강준만의 비판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것도 실명으로. 성역과 금기가 없는 만인 앞에 공평한 비판은 사람들을 열광시켰고, 새로운 저널리즘의 등장이라는 평가까지 있었다.
그러나 강준만의 이러한 날카롭고도 냉혹한 비판은 그 자체만으로 힘이 있는 것 같지 않고, 그의 또 다른 미덕과 만나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그의 비판작업이 감정의 과잉과 오버가 없는 정확하고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사회의 부조리와 소위 지도자들의 거짓된 행태를 깊숙하게 찔러 만천하에 드러내지만, 그의 분노와 그의 비판에서 대놓고 달려들어 물어뜯는 짐승적 본능은 감지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들면 덮어놓고 두들겨패는 묻지마식 비판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는 비판이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매우 생산적이고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중립을 견지하고 있는 학자의 반열에 올라가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각개약진 공화국>. 그런데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산 후 받아서 머리말을 읽으면서 속아서 책을 샀다는 느낌이 바로왔다. 나는 제목을 보고, 공정한 게임의 룰도 공동체적 연대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도 없이 피곤하고 절망적으로 각자의 인생을 서로 피흘려가며 보전해야 하는 각개약진 공화국에 대한 심층적인 진단과 모색이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 그 동안 언론을 통해 발표했던 글을 모아둔 책이라니 속아서 샀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물론, 그의 글쓰기르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정신을 드러내주는 제목이겠지만, 그동안 언론지상을 통해 발표해서 인터넷으로도 찾아볼 수 있는 글들을 다시 책으로 샀다니 좀 아까운 생각이 들은 건 내가 야박하기 때문인가?
어쨌든 이미 샀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읽을 수 밖에. 이미 읽었던 글이 여러 편 있는지라 책을 읽는 동안도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기존의 글들을 보완하고, 미발표한 글들도 수록되어 있어서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글들은 또다른 느낌과 의미로 읽을 수 있기에 아까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지방은 왜 요모양 요꼴인가
이 책은 여전히 공정한 규칙과 약속보다는 인맥과 학력이 잘먹고 잘사는 데 훨씬 더 유용한 우리 사회를 지적한다. 그래서 좋은 학교 간판을 따는 것, 좋은 줄이 있는 서울로 진출하는 것에 목숨을 걸게 되는 우리들의 피곤한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이를 통해 지방이 황폐화되고, 교육이 만신창이가 되는 현실을 차분하지만 냉철하게 짚어준다.
특히나 지방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은 각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지방대 교수로 지방에서 살면서 하루하루 삶으로 부딪히며 느끼는 점들이 워낙 생생해서 일 것이다. 날로 사람들이 떠나가고, 황폐화되어가는 지방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우리 지역 사람을 서울로 보내 좋은 줄로 연결하고 그걸 통해서 더 많은 예산으로 지역을 발전시키자는 오래되고도 신앙처럼 굳어진 신화들을 깨부수자고 한다. 좋은 인재들을 다 서울로 올려보내서 지역을 발전시켜보자는 모순에 대해 정신을 차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의 현실에 대해서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지방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직까지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서울사람인 내가 그의 주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지방이 처하고 있는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돌파해보겠다고 제시되는 해답들이 정말 지방의, 지방에 의한, 지방을 위한 것인지는 다시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 또한 서울 중심의 사고가 뼈속 깊이 새겨져 있기에 그의 분석과 호소에 귀기울이게 된다. 더욱이 지방대 교수 경력을 거쳐 서울로의 진출이 하나의 패턴이자 소망으로 굳어진 현실에서 끝까지 지방에 살면서 지내겠다는 사람의 말이니 진정성은 의심할 필요가 없겠다.
지혜를 나누는 동행공화국
'암묵지'에 대한 그의 글은 흥미와 함께 절절한 공감을 하며 읽었다. 암묵지라는 것은 책이나 이론으로 정리되어 전수되는 지식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과 삶을 통해 터득된 지혜를 말한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들보다 학교에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지식을 얻지만, 삶의 지혜에 있어서는 어머니를 못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 어머니들의 지혜가 바로 암묵지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임자들이 후임자들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해줄 때 업무에 대한 사무적인 지침이나 내용들 외에 안해줘도 뭐라고 못할 업무에 대한 노하우가 바로 암묵지다.
그는 바로 이 암묵지에 대한 전수가 우리 사회에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들의 실수담, 경험담, 노하우 등을 말해주면 한 사람의 시행착오라도 더 줄일 수 있고, 함께 더 진전된 시스템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암묵지마저도 중요한 경쟁력이자 권력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이다. 학교의 선후배, 이해관계로만 똘똘 뭉친 사람들 사이에서만 특별하게 전수되는 이 암묵지로 인해 아무런 줄도 빽도 없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좌충우돌 맨땅에 헤딩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지적에 공감하는 것은 나 또한 살아가면서 이런 문제들을 겪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만, 혹은 흡연실에서만 이뤄지는 삶의 지혜에 대한 전수에서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는 사람들은 제외다. 업무를 인수인계 받을 때도 이 일들은 누구와 만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누구를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료를 찾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일'은 아무죄도 없이 발전은 커녕 똑같은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쳇바퀴 도는 다람쥐 신세가 된다. 우리나라의 정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발전없이 똑같이 계획하고, 뒤엎고, 실수하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암묵지에 대한 글을 읽으면 반성하게 된다. 내가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어떤 일에 대한 노하우를 다른 사람이 알면 혹시라도 나보다 일을 더 잘하지 않을까, 내가 괜히 안 알려 줘도 되는 거 알려 줘서 남 좋은 일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못난 생각으로 사는게 바로 나다. 그렇게 우리는 쓸데없는 조바심과 경쟁심 속에 각개약진하면서 요모양 요꼴이다. 한걸음이라도 같이 갈 일이다. 그래서 이 침묵의 카르텔을 깰 일이다. 그래도 걱정은 계속된다. 다함께 그 일을 하지않고, 착한 사람들 몇 명만 바보되고 희생될까 봐.
착각하지 말고 살자
'진보주의적 착각, 자유주의적 착각'은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일들을 처음으로 명료하게 정리한 표현이었다. 인터넷에 댓글을 익명으로 달게 하는 것은 무조건 진보적이며 선이라는 생각. 그것을 강준만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나는 이런 일들이 이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탈북자들이 북으로 삐라는 보내는 정치적 행위가 그들의 아픔을 긁어 이용하는 못된 사람들에 의해 추동되는, 어떤 유익도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적인 상처입은 자들인 탈북자들 앞에 몰려가서 그들의 아픔은 아랑곳 없이 덮어놓고 그들을 반통일적이라고 윽박지르고 몸을 부딪혀 싸우는 사람들이 진보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 역겹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진보주의적 착각임을 알게 된다.
이런 착각은 소위 진보와 자유의 진영의 반대편에 서있다고 일컬어지는 보수 진영에도 마찬가지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해결책을 위해 대화하지 못하고 항상 답을 정해놓고 그것에 좋은 머리와 논리를 끼워맞추며 세월과 힘을 소모한다. 그런 착각없이 올곧게 그리고 신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신문에 외고 문제에 대해서 말로는 비판하지만, 자기 자녀의 교육문제에 직면해서는 외고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자기반성적인 칼럼이 실렸다(한겨레신문, 12월 10일, 김의겸, 어느기자의 이중생활). 사실 칼럼의 끝이, 외고를 둘러싼 제도가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자기도 여전히 말하고 글쓰는 것과 다른 이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이라 적잖아 당황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 속에 자신의 진심을 숨긴 채 우리는 각개약진하고 있다. 속아서 산 이 책에서 나는 우리를 속이는 세상의 속임수를 발견한다. 그 속임수로부터 스스로 각성하고 우리가 함께 탈출할때 그 각개약진은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은 그 시작이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 각개약진 공화국 ⓒ 인물과 사상
강준만, 그는 우리 사회에 '뚜러뻥' 같은 존재다. 수도나 변기가 막히지 않도록 할 수는 없을지라도 막혀서 답답해진 곳에 그가 들이붓는 '실명비판'과 '성역과 금기에 대한 도전'은 우리 속에 쌓여있는 체증을 내려가게 하고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갓 대학에 입학해서 서점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연달아 펴내던 저널룩 인물과 사상을 재미있고 통쾌하게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신문의 기자들, 지체높은 정치인과 관리, 학식높은 학자들 너나 할 것 없이 강준만의 비판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것도 실명으로. 성역과 금기가 없는 만인 앞에 공평한 비판은 사람들을 열광시켰고, 새로운 저널리즘의 등장이라는 평가까지 있었다.
그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각개약진 공화국>. 그런데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산 후 받아서 머리말을 읽으면서 속아서 책을 샀다는 느낌이 바로왔다. 나는 제목을 보고, 공정한 게임의 룰도 공동체적 연대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도 없이 피곤하고 절망적으로 각자의 인생을 서로 피흘려가며 보전해야 하는 각개약진 공화국에 대한 심층적인 진단과 모색이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 그 동안 언론을 통해 발표했던 글을 모아둔 책이라니 속아서 샀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물론, 그의 글쓰기르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정신을 드러내주는 제목이겠지만, 그동안 언론지상을 통해 발표해서 인터넷으로도 찾아볼 수 있는 글들을 다시 책으로 샀다니 좀 아까운 생각이 들은 건 내가 야박하기 때문인가?
어쨌든 이미 샀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읽을 수 밖에. 이미 읽었던 글이 여러 편 있는지라 책을 읽는 동안도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기존의 글들을 보완하고, 미발표한 글들도 수록되어 있어서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글들은 또다른 느낌과 의미로 읽을 수 있기에 아까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지방은 왜 요모양 요꼴인가
이 책은 여전히 공정한 규칙과 약속보다는 인맥과 학력이 잘먹고 잘사는 데 훨씬 더 유용한 우리 사회를 지적한다. 그래서 좋은 학교 간판을 따는 것, 좋은 줄이 있는 서울로 진출하는 것에 목숨을 걸게 되는 우리들의 피곤한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이를 통해 지방이 황폐화되고, 교육이 만신창이가 되는 현실을 차분하지만 냉철하게 짚어준다.
특히나 지방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은 각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지방대 교수로 지방에서 살면서 하루하루 삶으로 부딪히며 느끼는 점들이 워낙 생생해서 일 것이다. 날로 사람들이 떠나가고, 황폐화되어가는 지방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우리 지역 사람을 서울로 보내 좋은 줄로 연결하고 그걸 통해서 더 많은 예산으로 지역을 발전시키자는 오래되고도 신앙처럼 굳어진 신화들을 깨부수자고 한다. 좋은 인재들을 다 서울로 올려보내서 지역을 발전시켜보자는 모순에 대해 정신을 차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의 현실에 대해서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지방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직까지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서울사람인 내가 그의 주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지방이 처하고 있는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돌파해보겠다고 제시되는 해답들이 정말 지방의, 지방에 의한, 지방을 위한 것인지는 다시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 또한 서울 중심의 사고가 뼈속 깊이 새겨져 있기에 그의 분석과 호소에 귀기울이게 된다. 더욱이 지방대 교수 경력을 거쳐 서울로의 진출이 하나의 패턴이자 소망으로 굳어진 현실에서 끝까지 지방에 살면서 지내겠다는 사람의 말이니 진정성은 의심할 필요가 없겠다.
지혜를 나누는 동행공화국
'암묵지'에 대한 그의 글은 흥미와 함께 절절한 공감을 하며 읽었다. 암묵지라는 것은 책이나 이론으로 정리되어 전수되는 지식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과 삶을 통해 터득된 지혜를 말한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들보다 학교에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지식을 얻지만, 삶의 지혜에 있어서는 어머니를 못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 어머니들의 지혜가 바로 암묵지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임자들이 후임자들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해줄 때 업무에 대한 사무적인 지침이나 내용들 외에 안해줘도 뭐라고 못할 업무에 대한 노하우가 바로 암묵지다.
그는 바로 이 암묵지에 대한 전수가 우리 사회에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들의 실수담, 경험담, 노하우 등을 말해주면 한 사람의 시행착오라도 더 줄일 수 있고, 함께 더 진전된 시스템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암묵지마저도 중요한 경쟁력이자 권력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이다. 학교의 선후배, 이해관계로만 똘똘 뭉친 사람들 사이에서만 특별하게 전수되는 이 암묵지로 인해 아무런 줄도 빽도 없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좌충우돌 맨땅에 헤딩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지적에 공감하는 것은 나 또한 살아가면서 이런 문제들을 겪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만, 혹은 흡연실에서만 이뤄지는 삶의 지혜에 대한 전수에서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는 사람들은 제외다. 업무를 인수인계 받을 때도 이 일들은 누구와 만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누구를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료를 찾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일'은 아무죄도 없이 발전은 커녕 똑같은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쳇바퀴 도는 다람쥐 신세가 된다. 우리나라의 정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발전없이 똑같이 계획하고, 뒤엎고, 실수하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나 또한 암묵지에 대한 글을 읽으면 반성하게 된다. 내가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어떤 일에 대한 노하우를 다른 사람이 알면 혹시라도 나보다 일을 더 잘하지 않을까, 내가 괜히 안 알려 줘도 되는 거 알려 줘서 남 좋은 일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못난 생각으로 사는게 바로 나다. 그렇게 우리는 쓸데없는 조바심과 경쟁심 속에 각개약진하면서 요모양 요꼴이다. 한걸음이라도 같이 갈 일이다. 그래서 이 침묵의 카르텔을 깰 일이다. 그래도 걱정은 계속된다. 다함께 그 일을 하지않고, 착한 사람들 몇 명만 바보되고 희생될까 봐.
착각하지 말고 살자
'진보주의적 착각, 자유주의적 착각'은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일들을 처음으로 명료하게 정리한 표현이었다. 인터넷에 댓글을 익명으로 달게 하는 것은 무조건 진보적이며 선이라는 생각. 그것을 강준만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나는 이런 일들이 이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탈북자들이 북으로 삐라는 보내는 정치적 행위가 그들의 아픔을 긁어 이용하는 못된 사람들에 의해 추동되는, 어떤 유익도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적인 상처입은 자들인 탈북자들 앞에 몰려가서 그들의 아픔은 아랑곳 없이 덮어놓고 그들을 반통일적이라고 윽박지르고 몸을 부딪혀 싸우는 사람들이 진보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 역겹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진보주의적 착각임을 알게 된다.
이런 착각은 소위 진보와 자유의 진영의 반대편에 서있다고 일컬어지는 보수 진영에도 마찬가지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해결책을 위해 대화하지 못하고 항상 답을 정해놓고 그것에 좋은 머리와 논리를 끼워맞추며 세월과 힘을 소모한다. 그런 착각없이 올곧게 그리고 신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신문에 외고 문제에 대해서 말로는 비판하지만, 자기 자녀의 교육문제에 직면해서는 외고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자기반성적인 칼럼이 실렸다(한겨레신문, 12월 10일, 김의겸, 어느기자의 이중생활). 사실 칼럼의 끝이, 외고를 둘러싼 제도가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자기도 여전히 말하고 글쓰는 것과 다른 이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이라 적잖아 당황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 속에 자신의 진심을 숨긴 채 우리는 각개약진하고 있다. 속아서 산 이 책에서 나는 우리를 속이는 세상의 속임수를 발견한다. 그 속임수로부터 스스로 각성하고 우리가 함께 탈출할때 그 각개약진은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은 그 시작이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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