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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사장 거부했던 선배들의 길 따르겠다"

KBS 구성원 50명, 새 노조 설립키로... "버림받는 KBS 살리는 길"

등록|2009.12.10 17:03 수정|2009.12.10 17:07

▲ 11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KBS 본관 앞마당에 모습을 드러낸 김인규 KBS 사장. ⓒ 유성호


"따로 또 같이."

KBS 노조가 2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MB특보 출신 김인규 KBS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부결됐음에도 노조가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이에 실망한 50명의 구성원들이 새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나섰다.

개인 연명으로 나선 50명의 KBS 구성원들은 10일 오후 '새 희망 새 노조를 함께 만듭시다'라는 제안문을 사내게시판에 띄우고 새 노조 가입 신청을 받고 있다. 이들은 조만간 노조총회를 열고 정관을 만든 뒤 전국언론노조 KBS지부로 등록할 계획이다.

이들은 "공영방송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헌신, 열정이 다시 흐를 수 있는 물꼬를 트고자 한다"며 "짓밟힌 공영방송인의 자존심과 기상을 다시 세우자"고 밝혔다.

이어 "1990년 4월 관제사장을 거부하고 싸웠던 빛나는 KBS 선배들의 길을 다시 찾자"며 "국민적 비판과 냉소 속에서 버림받는 KBS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일한 존립근거와 행동원칙으로 삼는 구심체를 만들지 않고서는 지금의 현실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권력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던 최근의 KBS 역사가 던져주는 깨우침"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시민들에게 고개 들어 다시 공영방송을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점을 만들어보자"고 조합원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니" 손잡고 함께 가자는 제안이다.

언론노조에 KBS지부로 등록할 계획

지난 11월 24일 열린 김인규 KBS 사장의 취임식은 난장판이었다. 강동구 KBS 노조위원장은 출근저지투쟁과 단식농성을 벌여 김 사장의 취임을 막겠다고 했지만 말만큼 행동이 따라주지 못했다. 단식농성도 뒷북이라는 사내 비판이 이어졌다.

김인규 사장이 기자 시절 전두환 정권에 이어 노태우 정권까지 권력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인 보도내용이 연일 터지면서 권력비판과 공정방송이라는 언론의 기본취지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비판은 거셌지만, 김 사장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 가운데 KBS노조에 실망한 많은 구성원들이 새로운 노조 설립에 뜻을 모았으며 이 가운데 50명이 첫발을 뗀 것이다. 이들은 조만간 전국언론노조 KBS지부로 등록한 뒤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활동에 본격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단 50명이 먼저 총회를 열고 정관을 만들어 언론노조에 지부신청을 하겠다는 것이다.

언론노조는 10일 중앙위원회의를 열고 KBS지부에 대한 논의를 마칠 계획이다.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은 "KBS는 현재 사고지부로 분류돼 있다"며 "KBS 구성원 간 합의로 지부 (신청)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처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산별노조는 개별 가입, 개별 탈퇴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KBS 안에 두 개의 노조가 생긴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 복수노조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KBS 안에 두 개의 노동조합이 설립되면 결과적으로 노노갈등을 유발해 사측에 맞서는 데 힘이 빠지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KBS에서 새 노조를 준비하는 측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젓는다.

KBS에서 새 노조를 준비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BBC의 경우엔 이미 저널리스트 노조가 따로 있다"며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잘못된 통합을 하고 있었으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건강한 분열이 낫다고 보고 새 노조를 설립한다"고 말했다.

공영방송 KBS는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자율성을 갖고 국민이 요구하는 공적 가치를 실현하며 세상에 진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지만, 현 노조는 이를 실현하기보다는 다른 데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김인규 사장 취임사 지켜보는 KBS노조위원장강동구 KBS노조위원장이 11월 24일 오후 출입이 봉쇄된 채 김인규 사장의 취임식이 진행되는 여의도 KBS본관 공개홀 앞 사무실에서 사내TV를 통해 중계되는 취임사를 지켜보고 있다. ⓒ 권우성


"기존 노조는 임금·복지 중심... 새 노조는 공영방송 가치 실현에 중점 두겠다"

기존 노조가 사내 구성원들의 임금과 복지 문제에 중점을 두고 활동한다면, 새로 설립되는 노조는 공영방송 가치실현에 중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사측은 물론 노조도 공영방송 가치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할 몫이 있는데, 이 점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노조 설립이 불가피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들의 뜻에 동의하는 KBS 구성원들은 기존 노조에서 탈퇴하고 새 노조에 가입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자와 PD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양상이다. 50명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세가 불어 500명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4000명이 넘는 전체 인원 가운데 500명의 구성원이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회사가 공정방송에 위배되는 일을 할 때마다 문제를 제기한다면 회사와 김인규 사장도 매우 곤혹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기존 KBS 노조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최성원 KBS 노조 공정방송실장은 새 노조 설립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 나돌자 "많은 인원이 이동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한 회사에 두 노조를 설립한다는 것은 김인규 사장이 가장 좋아할 소식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 실장은 또 "낙하산 사장 퇴진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 구성원 가운데 일부가 노조를 탈퇴하고 새 노조에 가입한다는 것은 단결해야 할 때 흩어지는 꼴이 되는 격"이라며 "미미한 수준에 그치겠지만 결과적으로 김인규 사장만 좋아할 일을 왜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노동조합은 다음 주 수요일 대의원대회를 열고, 김인규 사장 퇴진투쟁의 방향과 새 노조 설립 등에 대응할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다음은 새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이들이 사내게시판에 올린 제안문 전문이다.

새 희망 새 노조를 함께 만듭시다!

새로운 희망의 길을 열고자 합니다. 국민이 요구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영방송의 정신이 숨 쉴 수 있는 활로를 뚫고자 합니다. 공영방송에 대한 우리의 신념, 우리의 헌신, 우리의 열정이 다시 흐를 수 있는 물꼬를 트고자 합니다. 짓밟힌 공영방송인의 자존심과 기상을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이 길은 빛나는 선배 KBS인의 길이었습니다. 90년 4월 관제사장을 거부하고 온몸으로 싸웠던 그 순수성과 진정성을 다시 찾고자 합니다. 이 길은 미래의 KBS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꺼져가는 공영방송의 불씨를 되살리고, 언젠가 다시 일어설 공영방송의 밀알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국민적 비판과 냉소 속에서 버림받는 현재의 KBS를 살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희망은 새로운 노조를 요구합니다. 공영방송의 철학과 가치를 온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의 가치를 유일한 존립 근거와 행동 원칙으로 삼는 구심체 없이는 지금의 현실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권력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던 최근의 KBS 역사가 던져준 깨우침입니다.

여기 50명이 먼저 뜻을 모아, 모든 KBS 구성원에게 제안합니다. 새로운 노조를 만들어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길로 함께 갑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시민에게 다시 고개 들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점을 만들어봅시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합니다. 손잡고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새 희망 새 노조를 준비하는 사람들 >

금철영(탐사보도팀), 김강훈(라디오2국), 김경래(탐사보도팀), 김기현(2TV뉴스제작팀), 김남용(IT인프라팀), 김병국(부산총국), 김용호(라디오2국), 김우석(라디오1국), 김우진(편성운영팀), 김준범(경제팀), 김정중(교양제작), 김지선(정치팀), 김태규(아나운서팀), 김태형(탐사보도팀), 박정유(라디오1국), 박종훈(국제팀), 범낙규(관재팀), 서영민(국제팀), 송명희(사회팀), 송현정(국제팀), 엄경철(수신료프로젝트팀), 오태훈(아나운서팀), 원종재(예능제작), 유원중(1TV뉴스제작팀), 유지향(행정복지팀), 이도경(기획제작), 이병기(관재팀), 이상필(당진송신소), 이소정(경제팀), 이완희(기획제작), 이재혁(기획제작), 이재후(아나운서팀), 이주형(사회팀), 이지운(기획제작), 이창룡(라디오뉴스제작팀), 이태웅(스포츠중계제작), 이택순(중계기술국), 이형걸(아나운서팀), 임장원(1TV뉴스제작팀), 정세진(아나운서팀), 정혜경(교양제작), 차정인(인터넷뉴스팀), 최봉현(심의실), 최선욱(라디오기술국), 최재형(예능제작), 하태석(예능제작), 한성윤(스포츠취재팀), 함영훈(드라마제작), 홍석구(드라마제작), 홍소현(아나운서팀) (가나다순)

▲ 11월 24일 오후 여의도 KBS본관 공개홀에서 노조, 사원행동 등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인규 사장 취임이 강행되는 가운데, 노조원들이 공개홀 진입을 시도하며 청원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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