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친정아버지에게 다녀왔다. 편안하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집 뒷산에 올라 나무를 손보고 계시다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어린아이처럼 "아버지!" 하고 큰 소리로 불러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찾아갔다. 이렇게 소리 내어 아버지를 불러봤던 때가 언제인가 싶어 아득해지면서 금세 가슴 한 쪽이 아릿해왔다.
이제는 멀어져간 옛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진한 그리움이었다. 준비해간 반찬으로 점심을 차려드리고 나서 아버지의 굳은 손을 만져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서 가려는데 오빠가 담가놓았다는 마늘양파 장아찌를 가져가라고 주셨다.
골수암이 발병해 일주일에 두 번씩 항암주사를 처음 시작할 때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신 맛이 살아있어 식초를 넣어 만든 음식들을 먹으면서 그 힘든 32번의 첫 과정을 무사히 견디어냈었다. 말 그대로 병과 전투하듯이 이겨냈다. 투병(鬪病)이란 그래서 생긴 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5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2차 과정, 32번을 맞아야 하는 치료과정 중이지만 한 번 겪어보고 나니 요령이 생겼는지 예전보다는 좀 수월하다. 이런 내게 오빠가 건네준 장아찌는 입맛을 살릴 좋은 반찬이 되어줄 것이다.
오빠는 쓸쓸하게 홀로 남아계신 구순의 아버지 모시고 살겠다고 정년이 남아있는데도 명퇴하고 가족을 남겨둔 채 서울에서 내려와 오르락내리락하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평생 해보지도 않은 반찬들 이것저것을 아버지 입에 맞게 만들어내느라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장아찌도 처음 만들어 본 반찬이 아닐까 싶은데 색깔은 진하지만 맛깔스럽게 잘 담았다.
인생의 베이스캠프같은 곳, 친정
험한 산을 등정하는 전문 산악들에게 베이스캠프는 지친 몸이 재충전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주는 필수적인 곳이다. 그래서 베이스캠프 없이는 등정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살이도 어쩌면 그에 못지않을 만큼 힘든 여정이 아닌가 싶다.
그런 여정을 가는 여인들에게 친정은 영원한 베이스캠프가 되어준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곳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가게 해준다.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친정, 눈에 보이는 무엇을 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큰 의지가 되어주는 친정은 그래서 결혼한 여인에게 영원한 베이스캠프다.
친정은 어머니가 살아계셔야 진정한 의미를 안다. 친정을 지척에 두고도 종가맏며느리로 시집살이 하느라 가지 못하고 애만 탈 때 가슴에 그득한 것은 오직 친정어머니 얼굴이었다. 눈앞에 좋은 음식만 보아도 맛난 것 못 드시고 좋은 옷 못 입으시고 평생을 고생만 하신 친정어머니 드리고 싶은 마음에 눈물 훔치곤 했었다.
이야기를 잘 하시는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이 자랄 때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책 읽다가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깊이 젖어들곤 한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들은 최명희의 <혼불>에 많이 나와 있다. 그래서 내가 <혼불>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생전에 들려주신 이야기 중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 여인은 시댁에서 쫓겨날 때 다 헤어진 옷 보따리를 끌고 나왔다고 한다. 그 보따리를 끌고 가는 여인에게 그거 오래되어 쓰지도 못할텐데 버리고 가지 어디다 쓰려고 무겁게 가지고 나왔느냐고 하니까 "우리 어머니가 나 시집보낼 때 이 옷 장만해주려고 아버지와 싸우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하면 버리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 기어이 가지고 갔다고 한다.
혼수와 시집살이가 비례하는 우리문화에 가난한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살아온 같은 길을 가는 딸에 대한 측은지심이 친정어머니 마음에 비할 수 없다. 그때는 가난한 살림에 딸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과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딸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온다.
어머니를 대신할 어머니의 글
친정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한의사라 친정에서 글공부를 많이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웅혼한 꿈은 가난한 집으로 시집오면서 모두 끝나버렸다. 그동안 공부하며 썼던 책은 장속에 간직해오시다가 어느 날, 우리들이 자라는 방의 벽지로 발라버렸다.
어머니가 쓴 글씨로 도배한 방에서 철없는 우리 형제자매는 자랐다. 그 책을 처음 본 순간, 어머니가 썼다고 하셔서 내가 믿지 못하니까 아버지께서 "네 엄마가 쓴 것 맞다"고 하셨다. 그래서 왜 그 귀한 걸 벽지로 쓰느냐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허망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간직할 수 있도록 몇 권이라도 남겨놓으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해서 몇 권이 살아남았다. 다행히 남겨둔 것을 오빠가 복사해 줘서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어머니를 보듯 들여다보곤 한다.
자신의 꿈을 자식들이 이루어주길 바라셨으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실망감은 어머니의 몸에 깊은 병을 남겼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려 식음을 전폐하시다가 조용히 가셨다. 운보 김기창 화백에 대한 우향의 원망처럼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아버지와의 이별 모습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마도 이루지 못한 꿈들로 가슴에 깊이 맺힌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항암주사 기간인데도 컨디션이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도 나의 태를 묻은 자리인 베이스캠프에 와서 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와 오빠가 계시니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예전에 아무리 몸이 아파도 친정에만 가면 언제 아팠냐는 듯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짱해 이것저것 손봐드리고 오곤 했다. 생각할수록 참 신기했다. 그것은 친정이라는 베이스캠프가 주는 마법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그리우면 어머니가 남기신 글을 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친정엘 가면 되리라. 내 영원한 베이스캠프인 친정에.
이제는 멀어져간 옛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진한 그리움이었다. 준비해간 반찬으로 점심을 차려드리고 나서 아버지의 굳은 손을 만져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서 가려는데 오빠가 담가놓았다는 마늘양파 장아찌를 가져가라고 주셨다.
▲ 마늘양파 장아찌친정오빠가 만들어준 마늘양파 장아찌 ⓒ 김현숙
골수암이 발병해 일주일에 두 번씩 항암주사를 처음 시작할 때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신 맛이 살아있어 식초를 넣어 만든 음식들을 먹으면서 그 힘든 32번의 첫 과정을 무사히 견디어냈었다. 말 그대로 병과 전투하듯이 이겨냈다. 투병(鬪病)이란 그래서 생긴 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5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2차 과정, 32번을 맞아야 하는 치료과정 중이지만 한 번 겪어보고 나니 요령이 생겼는지 예전보다는 좀 수월하다. 이런 내게 오빠가 건네준 장아찌는 입맛을 살릴 좋은 반찬이 되어줄 것이다.
오빠는 쓸쓸하게 홀로 남아계신 구순의 아버지 모시고 살겠다고 정년이 남아있는데도 명퇴하고 가족을 남겨둔 채 서울에서 내려와 오르락내리락하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평생 해보지도 않은 반찬들 이것저것을 아버지 입에 맞게 만들어내느라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장아찌도 처음 만들어 본 반찬이 아닐까 싶은데 색깔은 진하지만 맛깔스럽게 잘 담았다.
인생의 베이스캠프같은 곳, 친정
험한 산을 등정하는 전문 산악들에게 베이스캠프는 지친 몸이 재충전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주는 필수적인 곳이다. 그래서 베이스캠프 없이는 등정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살이도 어쩌면 그에 못지않을 만큼 힘든 여정이 아닌가 싶다.
그런 여정을 가는 여인들에게 친정은 영원한 베이스캠프가 되어준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곳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가게 해준다.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친정, 눈에 보이는 무엇을 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큰 의지가 되어주는 친정은 그래서 결혼한 여인에게 영원한 베이스캠프다.
친정은 어머니가 살아계셔야 진정한 의미를 안다. 친정을 지척에 두고도 종가맏며느리로 시집살이 하느라 가지 못하고 애만 탈 때 가슴에 그득한 것은 오직 친정어머니 얼굴이었다. 눈앞에 좋은 음식만 보아도 맛난 것 못 드시고 좋은 옷 못 입으시고 평생을 고생만 하신 친정어머니 드리고 싶은 마음에 눈물 훔치곤 했었다.
이야기를 잘 하시는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이 자랄 때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책 읽다가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깊이 젖어들곤 한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들은 최명희의 <혼불>에 많이 나와 있다. 그래서 내가 <혼불>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생전에 들려주신 이야기 중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 여인은 시댁에서 쫓겨날 때 다 헤어진 옷 보따리를 끌고 나왔다고 한다. 그 보따리를 끌고 가는 여인에게 그거 오래되어 쓰지도 못할텐데 버리고 가지 어디다 쓰려고 무겁게 가지고 나왔느냐고 하니까 "우리 어머니가 나 시집보낼 때 이 옷 장만해주려고 아버지와 싸우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하면 버리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 기어이 가지고 갔다고 한다.
혼수와 시집살이가 비례하는 우리문화에 가난한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살아온 같은 길을 가는 딸에 대한 측은지심이 친정어머니 마음에 비할 수 없다. 그때는 가난한 살림에 딸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과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딸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온다.
어머니를 대신할 어머니의 글
친정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한의사라 친정에서 글공부를 많이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웅혼한 꿈은 가난한 집으로 시집오면서 모두 끝나버렸다. 그동안 공부하며 썼던 책은 장속에 간직해오시다가 어느 날, 우리들이 자라는 방의 벽지로 발라버렸다.
어머니가 쓴 글씨로 도배한 방에서 철없는 우리 형제자매는 자랐다. 그 책을 처음 본 순간, 어머니가 썼다고 하셔서 내가 믿지 못하니까 아버지께서 "네 엄마가 쓴 것 맞다"고 하셨다. 그래서 왜 그 귀한 걸 벽지로 쓰느냐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허망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간직할 수 있도록 몇 권이라도 남겨놓으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해서 몇 권이 살아남았다. 다행히 남겨둔 것을 오빠가 복사해 줘서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어머니를 보듯 들여다보곤 한다.
자신의 꿈을 자식들이 이루어주길 바라셨으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실망감은 어머니의 몸에 깊은 병을 남겼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려 식음을 전폐하시다가 조용히 가셨다. 운보 김기창 화백에 대한 우향의 원망처럼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아버지와의 이별 모습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마도 이루지 못한 꿈들로 가슴에 깊이 맺힌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항암주사 기간인데도 컨디션이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도 나의 태를 묻은 자리인 베이스캠프에 와서 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와 오빠가 계시니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예전에 아무리 몸이 아파도 친정에만 가면 언제 아팠냐는 듯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짱해 이것저것 손봐드리고 오곤 했다. 생각할수록 참 신기했다. 그것은 친정이라는 베이스캠프가 주는 마법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그리우면 어머니가 남기신 글을 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친정엘 가면 되리라. 내 영원한 베이스캠프인 친정에.
▲ 어머니의 글씨친정어머니께서 혼 전에 쓰신 글씨 일부 ⓒ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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