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 선고받고 166일 도보여행 떠나다
[여행기중독자 26] 쿠르트 파이페의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
▲ 책표지 ⓒ 서해문집
여행기중독자는 여행기를 통해 '만남과 애증과 헤어짐'을 유사 체험하면서 한해를 가까스로 살아 낸 것 같다. (적어도 여행기중독자에게) 여행기는 감내하기 힘든 좌절과 슬픔이 찾아올 때마다 깨달음과 위안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
전 여정에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까?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절이라서 그럴까? 감동의 여운이 유난히 강했다. 책을 읽는 내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절실한 순간인지, 지금 내 곁의 가족이 얼마나 가슴 저리도록 소중한 존재인지,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 도보 여행길 'E1'과 'GR'
저자가 선택한 여정은 'E1'이다. 이 여행기에는 그가 'E1'이라는 코스를 걸었다고만 나와 있을 뿐 자세한 설명은 없으므로 이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는 것이 독자들에게나, 여행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유럽의 장거리 도보 여행길은 'E루트'(European walking route)와 'GR루트'(Grande Route)'로 체계화되어 있다. 'E루트'는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도보 여행길로 E1에서 E11까지 조성되어 있으며, 'GR루트'는 각 나라 안에서의 장거리 도보 여행길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저자가 걸어 간 'E1루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출발, 독일과 스위스를 종단하여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는 길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과 유사한 길이고, 로마로 향하는 '성 프란체스카 순례길'이 그 마지막 구간을 이룬다. (저자는 독일의 북단 '쿠퍼뮐레'에서 출발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의 경우는 'E3'에 해당한다. 'E3'는 최장 10개국(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체코,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스페인)에 걸친 도보 여행길로 현재 포르투갈의 '성 빈센트 곶'까지 확장하는 중이다.
GR루트는 각 나라의 도보 여행길이다. 스페인에는 500여 루트가, 프랑스의 경우에는 70여 루트가 있는 식이다. 이 길들은 E루트와 이어지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길도 있다. 유럽 도보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관광지화 논쟁 속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 말고, 다른 루트를 계획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행기중독자가 가고 싶은 길은 그리스를 횡단해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E6루트'. 이유는 그 길이 터키로 향하는 유일한 도보 여행길이기 때문이고, 터키에는 대 시인 '잘랄루딘 루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보 여행길도 이런 식으로 체계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도보여행길이 속속 조성되고 있는 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의 국토대장정 길을 각 지역의 도보 여행길과 연결하는 것은 어떨까?
고속도로나 고가도로로 가로막힌 도보 여행길을 잇고, 그 오솔길로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을 연결한다면 도로나 운하보다 친환경적이면서 관광활성화에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길(K루트)은 결국, 통일 후 아시아(A루트)를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생애 마지막 대여정
이제 'E1'으로 떠나보자. '쿠르트 파이페'는 1941년에 출생한 독일 사람이다. 그는 58년 간 조경사로 일했으며 몇 년 전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자연요법으로 병이 악화되는 것을 지연시키기는 하였으나, 결국 증상이 악화되어 2007년 수술을 시도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의사는 "고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면 오십시오"라는 말로 그를 퇴원시켰다.
저자는 화학요법과 방사능치료를 받으며 다른 식구들에게 신경만 쓰이게 하는 환자가 되기는 싫었다고 한다. 차라리 반년이나 일 년 일찍 죽고 남은 시간을 원하는 대로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오랜 열망이었던 유럽 종단 여행을 결심한다. 저자는 수술한 자리가 아무는 3주 동안, 아내를 설득하고 여행을 준비를 해서 장도에 오른다.
"아내가 나의 부재를 통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얼마간 멀리 떠나게 된다면..., 그리고 언젠가는 영원히... 그러나 아내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일종의 시험 기간이었다. 나는 바보같이 아내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난 감쪽같이 숨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람이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한없이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출발을 꿈꾸다'에서
가족
166일에 걸친 긴 여행은 여러 가지로 힘든 고난의 길이었다. 수술 결과 인공항문 장치와 비닐주머니를 달고 다녀야 했고, 몸 안에 번식하는 암세포와 싸워야 했으며, 넉넉지 못한 경비 때문에 대부분 텐트에서 잠을 자고, 식당에서 식사는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깨달음, 지난 인생에 대한 추억, 그리고 짧은 가족들과의 동행이 이 여행을 지속시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 여행기의 감동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감동은 '가족들과의 동행'에 있다.
저자는 아내, 동생, 세 딸, 손자와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구간을 3박4일이나 4박5일씩 동행하며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추억을 만든다. 그의 마음속에서 "걱정 말고, 살아라. 걱정 말고, 걸어라"라고 계속 응원하는 그의 어머니도 언제나 함께였다.
저자는 가족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한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 온 아내와의 여행도 감동적이고, 21살의 외손자 '올리버'와의 동행도 인상 깊다.
"나는 오늘만큼은 돈을 아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마른 빵만 먹고 지내는 일이 있어도 말이다. 올리버가 나와 보내는 이 시간을 아름답고 유일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올리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하고 같이 긴 산행을 했었지. 하나 밖에 없는 내 할아버지하고.'" -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 산길에서
저자가 무사히 로마에 도착하자 그의 가족들은 로마에 모인다. 아름다운 추억이 완성된 것이다. 언젠가 여행기중독자가 죽음의 예고장을 받아들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이 여행을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나는 걷고자 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고통이라는 놈이 찾아온다. 고약한 놈이 도무지 쉴 줄도 모른다. 암세포의 전이가 무자비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 시간이 있어'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약은 먹지 않는다. 내 영혼이야말로 암에 맞서는 나의 유일한 자본이니까" - '의지와 믿음이라는 약'에서
깨달음
41년생인 그는 2차 대전 직후의 독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전쟁의 가해국인 독일은 엄청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는 앞선 세대의 죄를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정규교육 대신 이웃 동네의 정원사에게 도제 수업을 받아 일찌감치 정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일평생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섯 식구가 식당에서 음식 값 걱정 없이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노후자금도 충분치 않았으며, 따라서 여행자금도 턱없이 모자랐다.
가족들과의 동행은 짧고 혼자만의 길은 멀기만 했다. 하지만 저자의 여정은 우울하지 않았다. 저자는 죽음을 선고받은 칠십 세가 넘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통해 끊임없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는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의 첫 번째 깨달음은 자신이 완고하게 지켜 왔던 원칙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그는 밤마다 텐트를 펼 자리를 찾아 땅 주인이나 집주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고,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를 주문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면 친절한 사람들은 무상으로 잠잘 방이나 음식을 제공해주기도 하는 바, 고집 센 독일 노인인 저자는 번번이 그 호의를 거절한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거절을 거쳐 그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타인의 진심 어린 도움을 거절하는 행위는 뺨을 때리는 짓과 다름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 도대체 나이가 몇이나 되어서야 가능했는가!... 앞으로는 타인에게 뭔가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즐거움을 수용하리라. 또한 선물을 받는 자체가 바로 보답이라는 것도 모르고, 몇 푼 안 되는 돈푼으로 보답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나의 보잘것 없는 결벽증을 완전히 버릴 것이다." - 비스핑겐 에서
더 이상 선거에 나올 일이 없다는 사실이 진정성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지 말자. 죽음을 앞 둔 이 여행기의 저자 정도는 돼야 순도 100% 진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그의 진솔한 깨달음에는 의심이나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틈이 없이 마음으로 흘러들어온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자주 겪었던 것은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베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하거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게 어떤 건지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거나 조금밖에 가진 게 없다는 게 도무지 어떤 것인지를 아예 상상할 수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은 인색하다기보다는 생각이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 오테른하겐 에서
춥고 비가 자주 내리는 독일에서의 축축한 잠자리들, 가시덤불에 찢긴 상처로 달려드는 모기들, 극악한 순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만남의 행운, 아내와 함께 한 스위스의 '스트라스 알타' 등반, 40도가 넘는 뜨거운 이탈리아에서의 여정... 그리고 무엇보다 몸속에서 쉬지 않고 자라고 있는 암세포와의 사투를 통해 저자는 끝없이 교훈을 던져준다.
마침내 '도착했다'라는 짧은 구절을 읽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퍼졌다. 대장정을 마친 그는 에필로그에서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해 말한다. 밑도 끝도 없는 거대한 긍정에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가슴 떨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의식적으로 알고 한 행위가 아니듯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생각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자아를 펼치고, 기존의 것을 모두 몰아내고, 나를 다시 형성했다. 나는 다만 맡기고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했다. 보라,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듯 세상은 그렇게 나쁘고 이기적이지 않다... 당신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이 분명히 그리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되리라." - 에필로그 에서
그렇다. 새해를 맞는 지금,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여행기중독자는 책을 덮으며 새해에는 나의 머리가 아니라 나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한 걸음씩 걸어가 보자고 마음먹는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터무니없어 보이는 길일지라도 그길이 희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리라.
연재를 마치며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를 끝으로 '여행기중독자'의 연재를 마칩니다. '여행기중독자'는 30편을 예정하고 시작한 연재기사입니다. 필자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마저 서평을 쓰지 못한 네 권의 여행기를 짤막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올해 50년 만에 번역본이 출간된 '잭 캐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민음사)입니다. 비트제너레이션의 화신, 밥 딜런과 조니 뎁이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 잭 케루악의 폭발적인 감성과 문체가 인상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서를 들고 씨름하던 차에 출간된 관계로 더욱 반가웠습니다.
다음은 존경해 마지않는 작가 서경식의 <쁘레모 레비를 찾아서>(창비)입니다. '쁘레모 레비'라는 인물을 통해 20세기 폭력의 현장을 추적합니다. 작가의 냉철한 시선이 마치 '칼에 베인 것 같은' 감동을 남기는 '다크 투어리즘의 정수'라 할만한 여행기 입니다.
19세기 초, 맹인의 몸으로 도보와 마차와 항해로만 40만km(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를 능가하는 거리)를 여행한 전설적인 여행가 '제임스 홀먼'의 전기 <세계를 더듬다>(까치)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보지는 못했지만 느낄 수 없는 것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책 덕에 역사의 현장과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고전 여행서의 세계가 친숙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예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우아한 예술기행서입니다.
덧붙이는 글
그 동안 졸고에 관심과 점수와 원고료로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면을 할애해 주신 오마이뉴스에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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