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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고흐를 죽였을까(1)

세계문화탐방 2

등록|2009.12.15 16:23 수정|2009.12.15 16:23
지난 8월, 6년 만에 다시 고흐의 유적을 따라 서유럽 세계문화탐방을 떠났다.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로 접어들어 영하의 날씨가 되니 쓸쓸함이 느껴진다. '고독' 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때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빈센트'를 들으면서 고흐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고흐미술관 앞에서의 필자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미술관 앞은 고흐의 '자화상'과 '까마귀가 있는 밀밭' 그림을 큰 유리창에 새겨 놓아서 포토뷰 포인트로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박태상


고흐의 '자화상'고흐는 평생에 자화상을 40여 점 그렸다. 자화상에는 다양한 예술가의 초상이 담겨 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고흐, 귀를 자른 고흐 등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으며 자화상을 그린 예술가의 감정 기복이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정신분열증의 증세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어 작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박태상


오전에 루브르 박물관을 보고 점심을 먹은 후에 바로 버스에 올라 오베르-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로 향했다. 몇 차례 거듭 보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루브르를 반 나절 만에 본다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모독에 해당한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잠시 샤이오 박물관(샤이오궁, Palais de Chaillot) 앞에 정차하여 에펠탑을 감상하고 사진촬영도 마쳤다. 에펠탑의 야경은 저녁 7시쯤 에펠탑에 올라가서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동시에, 밤 9시 이후에 유람선을 타면서 조명이 들어온 에펠탑을 만끽하기로 했다. 

1937년 만국박람회 때 건축된 샤이오궁은 파리 국립극장과 4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건물 속에 건물을 집어넣는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건축 및 문화재 박물관(CIT´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이 13년의 공사 끝에 2007년에 문을 열었다. 박물관이 위치한 샤이오 궁은 파리에서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창밖에 '실물로 전시된' 에펠탑을 볼 수 있다.

샤이오박물관1937년 만국박람회 때 건축된 샤이오궁은 파리 국립극장과 4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샤이오 궁은 파리에서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손 꼽혀서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 박태상


샤이오궁은 좌우에 날개 같이 완만하게 구부러진 건물 외관이 아름답고 에펠탑과 가까워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든다. 트로카데로 광장의 정원과 분수 그리고 세느강변과 에펠탑의 조망을 가지고 있어 낮 시간대의 사진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동안 고흐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살았는데, 최근 미국에서 개인이 소장하던 고흐 작품이 도난 당하면서 다시 고흐는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인 화가가 되었다. 물론 고흐의 그림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렘브란트, 마티스, 르느와르, 미로, 폴록 등의 그림도 동시에 잃어 버렸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전문절도범은 지난 9월 25일 명화 2700만달러(약 320억원) 상당의 작품을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는 파리 북서쪽으로 15번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여를 나가면 도달한다. 이곳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고흐마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고흐를 찾아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조용한 시골마을을 찾아온다. 특히 전체 관광객의 1/3 정도가 일본인일 정도로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그 이유는 고흐가 한때 일본 현대판화에 영향을 받고 그 강렬한 색채감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하숙집고흐가 권총자살을 하기 직전 2개월 반 정도 거주했던 하숙집. ⓒ 박태상


오베르-쉬르 우와즈에 접어들면 먼저 고흐가 살다가 자살한 여인숙 건물을 찾아가게 된다. 빈센트는 1890년 5월 중순에 이 마을에 와서 7월 말에 자살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고흐마을을 방문한 날이 8월 2일이니 고흐가 죽었을 때와 계절과 시간이 일치한다. 무당은 무당을 알아본다고나 할까?

사실 오베르 쉬르 우와즈와 멀지 않은 곳(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한 명의 후기 인상파의 거장이 살았다. 바로 모네다. 또 동시대 남쪽 엑상프로방스에는 고흐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세잔느가 살고 있었다. 그들과 고흐의 관계를 씨줄과 날줄로 연결하여 서양미술사를 살펴보아야 미적인 영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흐가 2~3개월 살면서 그림을 미친 듯이 그렸던 여인숙은 몇 년 전부터 개인이 그 집을 구입하여 자그마한 고흐 방을 만들어서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공개하고 있다.  입장료는 4유로로 그렇게 싸지 않은데 비해, 볼거리는 고흐와 그의 친구가 살았던 방 두 개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하숙집 내부고흐가 근처 밀밭에서 권총자살을 하기 직전 2월 반 정도 머물며 70여 점의 그림을 그리면서 마지막 삶을 불태운 곳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 박태상


마을 도처에는 고흐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애정 어린 손길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고흐 공원이다. 유치하기는 하지만 화구를 매고 서 있는 고흐의 동상이 공원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다. 사실 공원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없는 곳이니 더욱 고흐의 동상이 외롭게 느껴졌다. 죽어서도 고흐는 외롭기만 한 것일까?

사실 고흐만큼 외로웠던 예술가도 드물다. 고흐에게는 여복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삶을 살펴볼 때 독자들이 재미에 빠지게 되는 것은 파란만장한 여성 편력 등의 낭만성 때문이다. 요즈음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관련되는 섹스 스캔들에 전 세계 호사가들이 입맛을 다시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고흐의 전기적 생애에서는 그러한 묘미를 느낄 수 없다. 고흐의 생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1930년대 식민지시대 작가 김유정처럼 '짝사랑'밖에 없다. 런던에서의 하숙집 딸 외제니 오이어와 요절한 목사의 미망인으로 나타난 사촌 케이 보스 스트리커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하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한다.

심지어 고독했던 화가 고흐는 한 창녀에게 빠져 청혼하기까지에 이른다. 1881년 8월부터 넉 달 동안 고흐는 헤이그의 모베의 화실에서 같이 보낼 때, 창녀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 즉 시엔을 만나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와 테오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하면서 생활비마저 지급을 중단한다. 창녀 시엔은 고흐의 삶의 고통 속에서 <슬픔>이라는 1882년 작품으로 부활한다.

고흐가 자살했던 집의 뒷골목을 따라 길을 올라가면 오베르 교회가 나온다. 유명한 고흐의 그림인 '오베르 교회'의 배경이 된 명소이다. 몇 년 동안 공사 중이어서 오베르교회는 고흐 그림의 원형으로서 사진에 그대로 담는 데 어려움이 뒤따른다.

고흐동상오베르 쉬르 우와즈의 고흐 공원 내에 있는 고흐의 화구 맨 동상. ⓒ 박태상


고흐가 1890년 6월과 7월 사이에 그렸다고 하는 '오베르교회'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명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전통적으로 그의 작품 기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붓의 터치를 통해 강렬한 색채대비와 동적인 질감을 보다 극대화 시키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고흐는 '오베르교회'를 그리면서도 평소 존경했던 밀레의 '그레빌의 교회'를 참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그림에서 오베르교회는 찌그러져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교회 자체가 흔들려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고 당시 고흐 자신의 고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오베르교회'고흐가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머물면서 그린 오베르교회에는 당시 이즘의 기본색인 3색이 모두 동원된 동시에 몇몇 녹색의 밝음이 노랑색의 밀밭과 접촉하면서 교회가 뒤틀어지는 형상으로 놓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흐의 열정적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 ⓒ 박태상


오베르교회고흐 그림의 실제 모습인 오베르교회는 현재 몇 년째 공사 중이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 박태상


흔히 고흐의 삶과 미술세계는 5기로 나눈다. 물론 성장기까지를 포함하면 6기로 구분될 것이다.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이 발행한 화집에도 그렇게 나누고 있다. 성장기- 드렌데,  누에넨, 안트워프 시기- 파리 시기- 아를르 시기- 쌩 레미 시기- 오베르 쉬르 우와즈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네덜란드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만이 예외적으로 비교적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테오도루스는 여섯 아들 중 유일하게 빈센트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었지만, 목사 노릇을 하기엔 말주변이 없어서 평생을 시골 교회의 목사로 살았다.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 동생 테오와 함께 구필화랑의 직원, 교회의 보조교사, 책방 점원, 전도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한때는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기 위해 전도사 코스를 밟았다. 구필화랑과 서점에서 해고된 고흐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어와 리틴어 공부를 싫어했으므로 시험에 합격할 수가 없었다.

고흐의 하숙집 뒷 모습 고흐의 하숙집은 현재는 고흐의 복사그림을 걸어놓고 하숙방과 침대를 보여주면서 기념관 역할을 하고 있다. ⓒ 박태상


이 무렵 고흐는 제도적인 종교에 회의를 품었고, 예술과 종교가 똑같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복음 속에 렘브란트가 있고, 렘브란트 안에 복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낡은 탄광과 가난한 광부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특히 렘브란트보다도 밀레에 영향을 받아 심취했다. 누에넨으로 돌아온 고흐는 사제관에서 아버지와 불편하게 지냈다. 동생 테오와도 갈등이 많았지만, 이 무렵 고흐의 그림에는 새로운 주제, 직조공과 낡은 교회탑이 등장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누에넨 시절의 고흐 초기작이다. 밀레의 영향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전도사를 꿈 꾸었던 고흐의 영혼이 서려 있는 작품이다. ⓒ 박태상


특히 1885년작 <감자 먹는 사람들>은 누에넨 시대의 절정이었다. 신성한 노동과 무미건조한 아름다움보다는 진정한 거침이 우위에 있다는 고흐의 오랜 예술적 확신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1886년 2월, 반 고흐는 새로운 자극을 위해 파리로 떠난다. 인상파 미술을 접하면서 그의 팔레트는 점점 밝아졌으며, 붓의 터치는 강렬한 색채로 진동했다. 테오의 도움으로 고흐는 파리에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 교류를 하게 되었고 당시 유행이었던 점묘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흐는 세잔느의 인상주의와 쇠라의 점묘법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고흐는 원색의 색점과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단지 색채를 분할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파리 시기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이때의 자화상은 색채 분할 기법의 규범에 따라 그렸다.

고흐의 대표작 '해바라기'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고갱도 가장 좋아했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단순한 형식과 열정적인 붓놀림 때문에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1987년 5월 30일 런던 크리스티경매에서 종전 최고 경매가의 세 배 이상인 3,990 만 달러라는 전무후무한 가격에 일본의 야스다 해운에 낙찰되어 세계 언론에 크게 주목을 받았다. ⓒ 박태상


또 고흐는 파리 시기 두 개의 중요한 전시회를 기획했다. 하나는 그가 좋아했던 일본 판화 전시회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과 툴루즈 로트렉,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케탱 및 여러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였다.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고흐의 인기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고흐 미술관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 박태상


하지만 고흐는 곧 파리에 싫증을 느낀다. 추운 겨울과 과로, 퇴폐적인 생활로 인한 신체적·정신적인 피로는 그로 하여금 다시 파리를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평생의 목표였던 농민미술의 추구, 자연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그는 1888년 2월 19일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로 향했다. 아를르에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고흐는 정신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1889년 5월 드디어 생 레미의 정신병자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를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미술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인 고갱과의 공동체 생활이다. 하지만 고갱과의 공동체 생활은 불과 두 달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고갱은 다시 남태평양 섬으로 떠나려고 했고 충격을 받은 고흐는 자기 귀를 면도칼로 자른다(고갱의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에 대해 고흐가 화가 났다고 함). 결국 아를르 사람들은 이러한 고흐를 미치광이로 판단했고 그를 생 레미의 정신자 수용소로 입원시킨다.  

그러면 고흐는 왜 화가들의 공동체생활을 꿈꾸었을까? 고흐가 공동생활을 원했던 것은 깊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프로방스 사투리를 알지 못해 친구도 없었고, 카페의 종업원에게 건네는 몇 마디 말을 제외하고는 며칠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또 테오의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는 죄책감도 갖고 있었다. 

또 하나 고갱과 고흐는 다른 의미의 화가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고흐는 종교단체처럼 시골에서 함께 정직하게 일하는 화가 공동체를 꿈꾼 반면, 고갱은 도시적이고 미술 시장과 연결되며 금전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 화가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러한 동상이몽이 고흐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오베르 쉬르 우와즈 시절의 대표작이다.고흐의 그림은 구도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하여 역동성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밀밭의 노란색이 주는 열정에 비해 붓의 터치가 주는 떨림이 삶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까마귀의 비상을 통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의 모호성을 나타내고 있다. 왠지 모르게 삶의 순간성과 비극성을 극대화하고 있는 느낌을 주어 작가의 인생처럼 더욱 슬픔에 젖게 만든다. ⓒ 박태상


(*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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