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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연쇄살인] "벼엉신, 남자 구실도 못하는 게..."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45회) 야합한 범인

등록|2009.12.18 11:01 수정|2009.12.18 13:26
조수경은 주철식을 자극하기로 했다.
"당신은 바보야."
주철식이 고개를 들었다.
"바보라고?"
"그래 이 머저리야!"

갑자기 험악해진 조수경의 말투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가 1년 동안이나 어디 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보 머저리가 아니고 뭐니?"
주철식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말해 봐."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조수경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벼엉신, 남자 구실도 못하는 게..."
주철식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이 년! 니가 남조선 갈보라는 것을 나는 다 안단 말이야."

다음부터 얘기가 조금 풀리기 시작하는 듯했다. 하지만 주철식의 말은 횡설수설이었다.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요컨대 진술에 일관성이나 객관성이 거의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연기인지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조수경은 약물 중독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일정 기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면 그의 기억이 되살려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수경은 유천일과 상의하여 그를 일단 전망 좋은 병실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조수경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호텔로 돌아온 조수경은 텔레비전을 켜 보았다. 그녀는 조선중앙텔레비전에 채널을 맞추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속극'이라는 소개 자막이 나왔다. 드라마에서는 직업 없이 놀고 있는 남편과 유치원 교양원(교사)을 하다가 그만두고 시장에 나가 밀가루 장사를 하는 아내의 대화가 나오고 있었다.

"당신 밀가루 장사 그만하고 유치원 교양원 일을 다시 하시오."
"뭐라구요? 난들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세요? 장사 안 하면 뭘 먹고 살 것이오? 보기 싫으면 당신이 나가 일하시오. 식객 주제에 잔소리까지 하다니."
"식객이라고?"
"식객이지. 당신이 집에 들여오는 게 뭐 있는가?"

남편이 벌떡 일어나 아내를 노려보았다. 아내도 지지 않고 악을 쓴다.
"때릴 테요? 때려요, 때려."
"좋소. 당장 갈라치자. 나도 이런 가정생활에 신물이 난다."
"누가 무섭나? 입도 줄고 좋지. 당장 갈라서자우."

조수경은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마마는 이혼 위기를 극복하고 부부가 화합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내용으로 보아 북한에서도 경제적인 문제가 중시되고 있으며 여성이 드센 것도 남한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이혼이 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조수경이 본 다른 드라마 <가정>에서는 아예 갈라서기 위해 법정에 서는 부부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자강도의 한 기계공장에서 일하던 아내가 도 예술단원으로 특채된 후, 기계공장 선반공인 남편과 갈등을 겪다가 파국을 맞는 이야기였다. 북한에서도 돈 못 버는 남편은 남한 못지않게 찬밥이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조수경은 대학 시절 남한 가수 심수봉의 노랫말 중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남학생들이 '남자는 배, 여자는 암초'라고 바꿔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북한 여자들은 '남편은 불편, 아내는 인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반해, 북한 남자들은 '남편은 가장, 아내는 황소'로 바꿔 부른다고 했다. 아내가 황소처럼 무섭다는 뜻일 터였다.

북한 청년들이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도 크게 변했다고 했다. 유천일은 과거에는 당이나 군에 관련된 직업, 즉 자기 같은 사람이 인기였는데 이제는 아니라고 했다. 돈을 잘 벌어 오는 무역 관련 종사자가 최고 인기라고 그는 말했다.

조수경이 만난 호텔 여종업원은, "호텔에서 일하면 외부 사람들을 많이 접할 수 있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답니다. 호텔에서 일하려면 과거에는 대학만 나오면 되었는데 이제는 대학 나온 지원자가 많아 전문 봉사원 과정을 밟고 자격을 취득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북한은, 최소한 조수경이 본 평양은 더 이상 집단주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였다. 종합시장이 늘고 개인에게도 장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서 능력에 따라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있었다.

"개인 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철이나 수산물을 중국에다 팔고 큰 돈을 법니다."
"우리 아들은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에 열중이어서 걱정입니다."
"2만 달러만 있으면 여기에서 큰 무역회사의 사장이 됩니다. 자가용도 굴리고 땅을 사서 집도 지을 수 있습니다."

조수경은 평양 거리에서 주민들의 빈부 격차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흰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려한 한복이나 서양식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7·1 경제 조치 이후 여행의 제한도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부유층 주민들은 남한 텔레비전을 최고로 치며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기도 한다고 했다. 

아무튼 사람 사는 데는 본질적으로 비슷한 모양이었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잘 모르듯이 남한 사람들도 북한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북한의 남부지방에서는 남한의 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하고 북한 당국이 그것을 묵인하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북한인의 이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노크와 함께 김인철이 들어왔다.
"선배님, 북한에도 예쁜 여자들 참 많아요."
"남남북녀라고 말하면 진부하다고 하겠지?"
"유천일 대좌와 안동준이 언제 술 한 잔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먼저 사건이 해결돼야 하겠지."
"그 동안 주철식 때문에 미뤄 놓았던 일은 언제 할까요?"

김인철은 북한의 소련파와 테러 집단의 연구를 끝내 놓고 있었다.
"내일 오후쯤이 어떨까?"
"오늘은요?"
"오늘은 북한 연속극 봐야지."
조수경과 김인철은 마주보고 웃었다.

김인철이 나가자 조수경은 노트북을 부팅하고 수사파일을 열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희생자와 그들의 몸에 쓰인 단어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1. GREED(탐욕) - 부동산 투기꾼
2. HYPOCRITE(위선) - 시민단체 간부 겸 경제학 교수
3. THE CONSERVATIVES(수구주의자) - 안보전문가
4. EXTREMERIGHTIST(극우주의자) - 전 CIA 요원, 자유반공연합회이사장.
                   <이상 남한 희생자 4명>

1. IGNORANCE(무지) - 인민 여배우
2. THE TOTALITARIAN(전체주의자) - 동화작가 겸 아리랑축제 카드섹션 책임자
3. SELF RIGHTEOUS(독선) - 김일성대학 정치학 교수
4. THE ULTRA-LEFT(극좌), - 국가안전보위부 간부
                    <이상 북한 희생자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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