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헌책방마실 하며 이런 책 찾아볼까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47] 숨은 책 줄줄줄 1
▲ <신, 엄마손이 속삭일 때> 11권 겉그림. ⓒ 최종규
준코 카루베 님이 그린 만화 <新ㆍ엄마 손이 속삭일 때>(세주문화,2001)는 나온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책이지만, 금세 판이 끊어지고 사라졌기 때문에 새책으로도 못 사고 있었고, 또 새책으로 사서 본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여 헌책방에서도 찾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이가 앞서 그린 <당신의 손이 따뜻할 때>를 흐뭇하게 보았던 분이라면 저절로 <新ㆍ엄마 손이 속삭일 때> 열두 권도 찾아보고 싶어하리라 믿습니다.
토로테 죌레라는 사람이 쓴 <사랑과 노동>(한국신학연구소,1987)는 그럭저럭 찾아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책이름이 그리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안 믿는 분이라면 '한국신학연구소' 같은 데에서 낸 책은 내키지 않으려나요.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우리 살아가는 삶터에서 옳고 바른 목소리를 들려주려는 책이라 한다면 우리 눈길과 손길은 사뭇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 책이름부터 남다른 인문책. 무척 오래 묵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읽다 보면 바로 오늘날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 최종규
김남주 시인도 '시 비평'을 썼음을 아는 분이 몹시 드뭅니다. 아마 <시와 혁명>(나루,1991) 같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기 때문일 텐데, 어쩌면 김남주라는 이름만 알 뿐, 김남주 시를 제대로 안 읽은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는, 몇 꼭지는 읽어 보았어도 조각조각 '철지난 시'로 여길 뿐, 세상을 읽는 눈과 세상을 뜯어고치려는 몸부림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랴 싶어요. 책이름 그대로 시와 혁명, 이 두 가지만을 붙잡은 김남주 님입니다.
일본사람 이노우에 요지라는 분이 쓴 <사람은 왜 사는가>(분도출판사,1995)라는 작은 책을 만났을 때에는 참 당돌한 책이름이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거룩하다고 우러르는 분들만 이런 이름을 앞세울 수 있겠습니까. 나어린 사람도 사람은 왜 사는가를 따질 수 있고, 학문이 얕거나 믿음이 깊지 않은 사람도 사람은 왜 사는가 돌아볼 수 있어요. 그리고 온갖 사람이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우리 사람을 보고 우리 이웃을 느끼고 우리 스스로를 깨달으려 한다면, 우리 나라뿐 아니라 이웃나라 모두 아름다운 길머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김남주 님 문학비평을 모은 책. ⓒ 최종규
우리 옆지기는 저한테 '세계명작이 될 만한 작품이 아니라면 소설은 안 써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참말 옳다 싶었고, 어영부영 끄적이려는 문학은 제발 안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이런 말은 섣불리 꺼내서는 돌 맞기 딱 좋겠지만.
남난희라는 분이 쓴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1990)은 처음 나오던 때 꽤 사랑받고 널리 읽힌 듯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안 읽힐 뿐더러, 헌책방마다 한두 권 먼지만 잔뜩 먹고 있더군요. 이 책이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는데, 한국사람들은 다들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잖아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책을 책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껴안지 못하니까.
▲ 고리끼 님 소설책 하나. 헌책방에서 값싸게 만나서 읽어도 훌륭합니다. ⓒ 최종규
이름난 다음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맛이 가 버리지는 않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이름이 나고 돈을 벌고 싶어 책을 내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얕은 매무새로 쓰는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읽고 삭이느냐에 따라 보배를 건질 수도 있고 거울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M.램이라는 사람이 쓴 <2분 간의 녹색운동>(성바오로출판사,1991)은 다른 누구보다도 천주교회 다니는 분들이라면 으레 사서 읽거나 돌려 읽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했습니다. 천주교회 다니는 분뿐 아니라 개신교회를 다니건 성공회교회를 다니건 이만한 책은 우리 삶을 알뜰히 가꾸려는 몸가짐을 세우자면 마땅히 곁에 놓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헌책방에서 보일 때마다 한 권쯤 더 사서 둘레에 선물해 주고 있습니다.
▲ 남난희 님이 쓴 '산 탄 이야기'. ⓒ 최종규
참 얄딱구리하지요?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때에는 보이지 않더니, 이제 없어도 된다고 할 때 나타나고. 그래서 부탁한 분한테 드리지 않고 제가 읽기로 했어요. 야금야금 뜯어먹듯 조금씩 읽어나가며 가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습니다.
박형규 목사가 쓴 <해방의 길목에서>(사상사,1974)는 그저 케케묵은 책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흔히들 헌책방 헌책은 케케묵었다고 여깁니다. 뭐하러 그 낡은 책을 되읽으려 하느냐 말합니다. 그런데 예나 이제나 우리 삶터가 얼마나 달라지거나 나아지거나 거듭났을까요.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 책을 죽이고 있지 않을까요.
김태준 님이 쓴 <홍대용과 그의 시대>(일지사,1982)는 대단히 멋진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늘 책상맡에 놓아 두고 있습니다. 알아보는 사람 많지 않을 뿐더러, 홍대용을 새로 읽으려는 사람도 많지 않고, 굳이 홍대용 같은 사람을 파고들려는 사람도 얼마 없지만, 저는 이런 책을 하나둘 캐내고 넘기면서 제 마음밭을 가꿉니다. 롤랑 바르트를 모르면 어떻고, 지젝을 모르면 어떻습니까. 아무개이든 저무개이든 읽어내며 우리 삶과 생각을 일굴 수 있어도 반갑지만, 내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 목소리에 눈감고 귀닫고 입막으면서 내 멀리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만 찾아나서고 싶지 않습니다. 둘 모두 고르게 찾아나서고 싶습니다.
▲ 추송웅 님 산문을 모은 책. ⓒ 최종규
그런데 헌책방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나요? 헌책방을 어떻게 찾아가야 좋을지 모르시나요? 그렇다면 제가 오마이뉴스에 그동안 올린 '헌책방 나들이' 기사를 죽 살펴보시면 됩니다. 또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헌책방'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시면 돼요. 헌책방 찾아가는 길까지만 인터넷에서 살펴보시고, 내 마음밭 넉넉하게 채울 책은 몸소 책방마실을 하면서 찾아보면 좋겠어요. 책은 우리가 두 손으로 쥐어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어야 하니까요.
다만, 이렇게 소개하는 책들을 헌책방에서 '쉽게' 찾아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 해 걸릴는지 모르고, 열 해 만에 찾아낼 수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책들은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다른 좋은 책을 넉넉히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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