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멸망, 그 최후의 날 이야기
[가야문화권 답사 25] 금관가야의 멸망과 구형왕
작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활발한 국제교역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듯이, 멸망이라는 역사적 종결은 역시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수로왕의 나라로 한때는 신라와 경쟁을 하던 강국 가야는 세월의 흐름 앞에 쇠퇴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야는 6세기에 이르러 종언을 하게 된다. 가야제국 중 그 멸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나라는 금관가야와 대가야이다. 특히 금관가야의 경우 <삼국사기>와 <가락국기>에서 그 멸망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럼 금관가야는 과연 어떻게 멸망하였고, 마지막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당시 가야의 멸망은 무엇을 의미하였고, 가야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멸망으로 치닫는 금관가야의 운명
금관가야는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광개토태왕의 군대는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고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의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신라로 온다. 그리고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며 종벌성에 이르러 항복을 받게 된다.
이 사건 등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고구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백제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함으로써 경쟁구도에서 더 뒤처지게 된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간접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고, 문화 전파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성장할 만한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가야제국의 상황은 또 달랐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금관가야는 쉽게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후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여기에서 철산지와 농경지를 확보한 대가야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나중엔 가야제국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부상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금관가야의 유적지들을 살펴보면 그동안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왕과 귀족 등의 지배층의 묘가 조성되며, 번성하였던 당대 문화들을 반영하는 유물들도 출토된다. 하지만 5세기 초 이후로는 대형 고분군의 축조가 단절되었으며 김해 능동 고분군이나 덕정고분군, 두곡고분군, 예안리고분군 등이 조성된다. 이들의 규모는 대성동고분군에서 보이는 고총고분이 아닌 축소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정황들은 사실 기록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가락국기>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하지만 구전설화에 의하면 이 당시 신라와 잦은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황세와 여의 설화의 배경은 겸지왕 때로서, 겸지왕은 가야 9번째 왕으로 구형왕의 아버지가 된다. 황세는 이 당시 활약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활약을 한다고 할지라도 달처럼 기우는 가야의 운명마저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관가야는 군사적 충돌 없이 항복으로 멸망했다?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서 흔히 가야가 무력적으로 대항한 것이 아닌, 왕과 왕자들의 자진 항복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신라 귀족 중 진골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있다.
19년, 금관국주 김 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법흥왕 19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김구해, 즉 구형왕과 세 아들이 금관국, 즉 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는 내용이다. 법흥왕은 이에 기뻐하면서 직위와 식읍을 내려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사실 그동안 이 기록이 중시되어왔기에, 우리는 흔히 가야가 군사적 충돌 없이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락국기>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전승이 전해진다.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에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를 보면 구형왕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법흥왕의 군대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금관가야와 신라의 국력차이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힘을 떨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그 첫 대상으로 가야를 선정한 것이었다.
반면 광개토태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금관가야로서는 이러한 신라에 섣불리 대응하기엔 그 힘이 미력하였다. 수로왕이 세운 나라이자 과거 전기가야연맹체의 맹주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였고, 이미 그러한 맹주의 지위는 대가야로 넘어 간지 오래였다. 이렇게 금관가야는 신라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깨닫는다. 그리고는 스스로 멸망을 준비하게 된다.
금관가야멸망, 그 최후의 날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구형왕은 탈지이질금을 본국으로 보낸다. 여기에서 탈지이질금을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당시 가야의 멸망을 가야제국들의 연합군으로 막으려고 하였지만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고 스스로의 영토를 지키려는 데에 더 중점을 두게 된 상황을 반영한다.
동맹국까지 모두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금관가야의 구형왕과 그의 가족들은 항복을 위한 준비를 했으리라. 사실 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당시의 항복의례가 어떠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구형왕과 가족들, 그리고 신하들은 당시의 항복 의례에 맞춰 준비하였을 것이고 신라로서는 크게 싸우지 않고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의 세력은 대가야나 아라가야에 비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 신라가 이득을 취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명분 상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확이었다. 가야제국을 대표하던 금관가야의 항복은 다른 소국들에게도 알려졌으며, 신라의 강성함을 드러낼 만한 좋은 기회였다.
그 때문에라도 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들에게 특별히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진흥왕은 그에 맞춰 예를 갖추었고,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한다. 또한 마지막 왕자인 막내아들 김무력 또한 가야 땅을 벗어나, 당시 최전선이었던 한강유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는 김무력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기회를 준 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무력의 고향에서 멀리 떨쳐냄으로써 김해 토착세력과의 연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이로서 금관가야의 짧지 않은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조성된 구산동고분군에서는 더 이상 가야의 유물들이 나오는 게 아닌, 신라의 유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변화상을 직접 볼 수 있다. 달이 기울고 차는 것과 같은 게 국가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역사적 수순을 밟고, 결국 역사가 된 셈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야는 6세기에 이르러 종언을 하게 된다. 가야제국 중 그 멸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나라는 금관가야와 대가야이다. 특히 금관가야의 경우 <삼국사기>와 <가락국기>에서 그 멸망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멸망으로 치닫는 금관가야의 운명
▲ 김해 대성동고분군 일부 모습대성동고분군 내의 노출전시관의 모습. 이곳에 출토된 유물들을 바탕으로 금관가야가 번성하던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사적 341호) ⓒ 오은석
금관가야는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광개토태왕의 군대는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고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의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신라로 온다. 그리고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며 종벌성에 이르러 항복을 받게 된다.
이 사건 등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고구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백제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함으로써 경쟁구도에서 더 뒤처지게 된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간접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고, 문화 전파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성장할 만한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가야제국의 상황은 또 달랐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금관가야는 쉽게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후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여기에서 철산지와 농경지를 확보한 대가야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나중엔 가야제국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부상한다.
▲ 김해 예안리고분군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김해의 중심 고분군인 대성동고분군의 축조는 중단되었다. 대신 주변의 중소고분군에서 고분들이 조성된다.(사적 261호) ⓒ 문화재청
이러한 정황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금관가야의 유적지들을 살펴보면 그동안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왕과 귀족 등의 지배층의 묘가 조성되며, 번성하였던 당대 문화들을 반영하는 유물들도 출토된다. 하지만 5세기 초 이후로는 대형 고분군의 축조가 단절되었으며 김해 능동 고분군이나 덕정고분군, 두곡고분군, 예안리고분군 등이 조성된다. 이들의 규모는 대성동고분군에서 보이는 고총고분이 아닌 축소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정황들은 사실 기록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가락국기>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하지만 구전설화에 의하면 이 당시 신라와 잦은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황세와 여의 설화의 배경은 겸지왕 때로서, 겸지왕은 가야 9번째 왕으로 구형왕의 아버지가 된다. 황세는 이 당시 활약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활약을 한다고 할지라도 달처럼 기우는 가야의 운명마저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관가야는 군사적 충돌 없이 항복으로 멸망했다?
▲ 구형왕 영정금관가야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영정이다. 신라에 맞서 싸우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항복하였다. ⓒ 선현의 표준영정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서 흔히 가야가 무력적으로 대항한 것이 아닌, 왕과 왕자들의 자진 항복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신라 귀족 중 진골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있다.
19년, 금관국주 김 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법흥왕 19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김구해, 즉 구형왕과 세 아들이 금관국, 즉 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는 내용이다. 법흥왕은 이에 기뻐하면서 직위와 식읍을 내려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사실 그동안 이 기록이 중시되어왔기에, 우리는 흔히 가야가 군사적 충돌 없이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락국기>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전승이 전해진다.
▲ 삼국유사삼국유사 내에 수록된 <가락국기>를 통해 우리는 당시 가야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게 된다.(국보 306호) ⓒ 문화재청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에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를 보면 구형왕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법흥왕의 군대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금관가야와 신라의 국력차이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힘을 떨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그 첫 대상으로 가야를 선정한 것이었다.
반면 광개토태왕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금관가야로서는 이러한 신라에 섣불리 대응하기엔 그 힘이 미력하였다. 수로왕이 세운 나라이자 과거 전기가야연맹체의 맹주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였고, 이미 그러한 맹주의 지위는 대가야로 넘어 간지 오래였다. 이렇게 금관가야는 신라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깨닫는다. 그리고는 스스로 멸망을 준비하게 된다.
금관가야멸망, 그 최후의 날
▲ 전구형왕릉경남 산청에 있는 전 구형왕릉의 모습이다. 돌로 쌓은 모습이 기존의 고분군과는 달라 별도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사적 214호) ⓒ 문화재청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구형왕은 탈지이질금을 본국으로 보낸다. 여기에서 탈지이질금을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당시 가야의 멸망을 가야제국들의 연합군으로 막으려고 하였지만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고 스스로의 영토를 지키려는 데에 더 중점을 두게 된 상황을 반영한다.
동맹국까지 모두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금관가야의 구형왕과 그의 가족들은 항복을 위한 준비를 했으리라. 사실 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당시의 항복의례가 어떠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구형왕과 가족들, 그리고 신하들은 당시의 항복 의례에 맞춰 준비하였을 것이고 신라로서는 크게 싸우지 않고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의 세력은 대가야나 아라가야에 비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부분에서 신라가 이득을 취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명분 상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확이었다. 가야제국을 대표하던 금관가야의 항복은 다른 소국들에게도 알려졌으며, 신라의 강성함을 드러낼 만한 좋은 기회였다.
▲ 김해 구산동고분군가야 멸망 뒤에 조성된 무덤으로 보인다. 가야의 유물보다는 신라의 유물이 주로 출토됨으로 인하여, 이 지역이 신라에게 복속되었음을 가르쳐준다.(사적 75호) ⓒ 부경대학교박물관
그 때문에라도 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들에게 특별히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진흥왕은 그에 맞춰 예를 갖추었고,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한다. 또한 마지막 왕자인 막내아들 김무력 또한 가야 땅을 벗어나, 당시 최전선이었던 한강유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는 김무력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기회를 준 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무력의 고향에서 멀리 떨쳐냄으로써 김해 토착세력과의 연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이로서 금관가야의 짧지 않은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조성된 구산동고분군에서는 더 이상 가야의 유물들이 나오는 게 아닌, 신라의 유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변화상을 직접 볼 수 있다. 달이 기울고 차는 것과 같은 게 국가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역사적 수순을 밟고, 결국 역사가 된 셈이다.
덧붙이는 글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루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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