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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탑사 동지팥죽은 연등 새알심 팥죽

동지팥죽, 함께 먹으니 훨씬 더 맛있습니다

등록|2009.12.22 18:56 수정|2009.12.22 18:56

▲ 팥죽에 곁들여 먹는 동치미, 정말 맛있습니다. ⓒ 임윤수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지 않으면 동지섣달 내내 허전할 것 같아 기웃거리는 마음으로 산사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자주 들르던 곳이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뜸했던 발걸음 끝이라서 그런지 눈길은 여기저기를 살피느라 어슬렁거립니다.  
조붓한 산길을 지나 보탑사 경내로 들어서니 눈과 마음에 익숙한 풍경입니다. 보탑에 모셔진 사방불에 참배를 하고,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김 줄기를 따라가니 팥죽 익어가는 냄새가 달콤합니다.

무쇠솥단지를 걸고 팥죽을 쑤고 있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했고 부지런을 떨었는지가 눈에 선합니다. 팥은 하루 전쯤에 삶았을 거고, 무쇠솥단지를 걸어놓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준비하고 끓였을 게 분명합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팥죽이 커다란 통 두 개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 여러사람들이 맛나게 먹을 팥죽을 끓인 가슴 따뜻한 사람들 ⓒ 임윤수



▲ 새알심 대신 연등새알심을 듬뿍 넣어주고 있는 봉사자들 ⓒ 임윤수



▲ 팥죽을 담아줄 그릇도 깨끗하게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 임윤수




팥죽을 담아 나눠줄 그릇도 깨끗하게 씻어 바구니에 엎어놓았고, 노랗게 삭은 고추와 노릇노릇하게 맛든 무가 동동 떠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시원해지는 동치미도 커다란 양동이 두 통이나 담겨 있습니다. 

깔끔하게 준비된 배식대 저만큼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아궁이에서는 장작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고 부뚜막에는 커다란 무쇠솥단지가 올려있습니다. 솥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뜨거운 김이 펄펄 뿜어 오르고 있지만 팥죽을 저어주는 손길은 멈추질 않습니다. 연기 때문에 눈도 맵고, 뜨겁기도 하겠지만 팥죽을 끓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행복하기만 합니다.

밀린 숙제처럼 남겨두었던 봉사와 자비를 맛난 팥죽을 쑤는 것으로 대신하려는 듯이 뜨거우면 몸 한 번 돌리고, 매우면 팔뚝으로 눈언저리 한번 쓰윽 훔치며 기다란 나무주걱을 기껍게 젓고 있었습니다. 

▲ 동지팥죽, 함께 먹어서 더 맛있습니다. ⓒ 임윤수



▲ 부처님에게도 팥죽 한 그릇 올렸습니다. ⓒ 임윤수




11시부터 동지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로 법당이 가득합니다. 법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게 서성거리다 보니 팥죽 배식이 시작됩니다.

팥죽 한 그릇에 동치미 한 사발, 팥고물을 얹은 시루떡 한 덩이씩을 배식 받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장보살님이 관조하고 계시는 지장전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어떤 사람들은 몽돌자갈이 깔린 마당에 선 채 맛나게 먹습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뚝딱 먹는 사람도 있고, 팥죽의 달콤함과 팥죽을 쑨 이들의 정성을 음미하려는 듯이 천천히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대로 넣어 먹으면 되는 연등새알심

그런데 사람들이 먹는 팥죽에서 새알심이 보이질 않습니다. 동글동글하고 쫀득쫀득한 새알심이 보이지 않아 팥죽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허전해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두루두루 살펴보니 전혀 아닙니다.

▲ 새알심 대신 연등새알심을 넣어 맛나게 먹고 있는 사람들 ⓒ 임윤수




▲ 팥죽 한 그릇, 뚝딱 비웁니다. ⓒ 임윤수



삼삼오오, 무더기무더기 모여앉아 맛난 표정을 지으며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서너 숟가락 의 팥죽을 먹고 나면 입가심을 하듯 동치미를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행복한 표정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팥죽을 먹고 있는 사람들 머리 위는 온통이 연등입니다. 빨갛거나 파란색 연등, 노랗거나 분홍빛 연등, 연두색을 띤 연등이 무지개처럼 걸려 하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찹쌀가루로 만드는 새알심 대신 빨간색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빨간색 연등을 새알심으로 넣고, 파란색을 건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파란색 연등을 새알심으로 넣어 먹는가 봅니다.

▲ 연등은 새알심으로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을 대신하는 불심이 되기도 합니다. ⓒ 임윤수



사람들이 들고 있는 팥죽 그릇에는 새알심이 들어있지 않았지만 팥죽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새알심보다 더 동글동글하고 쫀득쫀득한 연등 새알심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나 봅니다.

팥죽을 맛나게 먹고 있는 사람들 곁에 앉아 함께 팥죽을 먹으니 저절로 행복해지고 갑절로 맛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서너 숟갈의 팥죽을 먹을 때 마다 동치미 한 숟가락씩도 먹었습니다. 노랗게 삭은 고추는 아사삭거리며 씹히고, 노릇노릇한 무에서는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물 풍선 터지듯 뿜어져 나왔습니다.

푹 뜬 팥죽 숟가락에 새알심 대신 빨간색 연등새알심을 넣으니 홍역처럼 앓았던 첫사랑이 떠오르고, 분홍빛 연등을 새알심으로 얹으니 그림자 뒤에 감춰둔 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연등 새알심을 넣은 동지 팥죽

ⓒ 임윤수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니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며 올린 연등새알심이 얼굴빛조차 오방색으로 물들일까봐 입맛만 다시며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오십 나이를 살아오면서 처음 구경하고 맛보는 연등 새알심이라서 그런지 더 없이 맛나고, 더 없이 행복합니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 서서 먹는 팥죽 한 그릇이 이토록 맛나고 행복한 것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 수고해준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기회,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행복과 맛남을 선사해 준 삼라만상의 모든 분들께 두루두루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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