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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많이 하지 마라

웬수 같은 자식, 마녀 같은 엄마 23

등록|2009.12.23 17:41 수정|2009.12.23 17:41
부유한 대감댁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인근 각처의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다 보니, 차려 놓은 음식도 대단했지만 음식을 먹고 난 다음 치워야 할 그릇도 장난이 아니었다. 잔치가 다 끝난 후, 하인들이 모여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그릇을 보며 누구도 선뜻 일을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이걸 언제 다 하나'하는 생각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개 중에 나이가 지긋한 하인 한 사람이 슬며시 일어나더니 그릇 하나를 집어들고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하인 한사람이 '그렇게 해서 언제 이걸 다 닦아요?'라며 한숨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나이 지긋한 하인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씩 닦으면 되지."

'언제 이걸 다하지.' 공부에 지친 아이들 입에서 흔히 나오는 푸념이다. 두꺼운 수학책을 펼쳐 놓고,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언제 이걸 다 떼나. 도저히 시험 때까지 끝낸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지레 주눅이 들어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모든 과목이 한결 같이 골고루 낮은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있노라면, 한두 과목도 아니고 언제 이걸 다 공부시킬 수 있겠나 싶어 난감하기만 하다. 벌써 2학년인데, 국, 영, 수 기초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것 같으니 어쩌면 좋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생각 같아서는 학년을 거꾸로 돌려놓았으면 싶기도 하다.

3학년 교실에 들어가 보면 교실 앞쪽에 'D-day ***'이라고 적혀 있는 달력을 종종 보게 된다. 세 자리 숫자였던 날짜가 어느새 두 자리 숫자로 줄어들고,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아이들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해야 할 건 많고, 달리 뾰족한 수도 보이지 않고, 점수는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이쯤 되면 서서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들이 일어선다.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빨리 시험이나 치르고 싶다. 되든 안 되든 시험이라는 압박감으로부터 어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이다. 잘 보는 것도 좋지만 할 걸 많은데 날은 얼마 안 남았고 어차피 다 하지 못할 것이라면 맘만이라도 빨리 편해지고 싶다는 심정이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서 한마디 던진다.

"아직도 415일이나 남았네. 널널하구만."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제 고작 50일 남았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는 눈치다.

"50일에다 365일 더하면 415일 이잖아. 내년에 시험 보면 되지. 뭐 꼭 올해 끝낼려고 하냐. 여유를 가져라. 여유를..."

금세 아이들 얼굴에 웃음보가 터진다. 무슨 코미디 같은 소리냐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 내년도 있지'라는 생각에 다소 안도감이 생기는 듯도 하다. 꽉 막힌 줄 알았던 앞길에 숨통이 좀 틔인 것이다.

백 미터 달리기는 순간의 질주를 통해 승부를 낸다. 따라서 짧은 순간에 온 힘을 다 짜내야만 한다. 하지만 마라톤은 다르다. 순식간에 열을 내서 남을 따라 잡는다고 마지막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종일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지속해 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백 미터 달리기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단숨에 책을 떼고, 점수를 올리고, 대학엘 가야 한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매 시험 때마다 손에 받아 쥐는 성적표에 확실한 성과가 드러나야 한다. 그게 아니면 죽자사자하고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을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하고 있는지를 다른 집애들과 비교해가며 따지게 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오늘 하루 몇 페이지나 진도를 나갔는지 따지느라 책장을 자꾸만 넘겨보게 된다. 그러다가 성이 안 차면 공부량을 늘리겠다고 잠도 줄이고 밤을 새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 지속하지는 못한다. 작심 삼일이란 흔해 빠진 말도 있듯이 며칠간 해보다가 지쳐서 중도하차 한다.

아이들은 항상 두꺼운 책을 보면서 '이걸 언제 다 하지'라는 물음 앞에 스스로 좌절하고 만다. 한꺼번에 그걸 다 떼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을 한번 바꿔보라. 한 페이지씩은 해 나갈 수 있지 않은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한 번에 다 해낼 수는 없다. 어차피 할 수 없는 것을 못 한다고 안타까워할 이유는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냥 쿨하게 한 페이지씩만 해 나가면 된다.

하루에 한 문제씩 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당장 몇 날 뒤면 시험을 봐야 하는데, 한 문제씩 해서 어쩌겠냐는 논리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백 개도 하나씩 모아서 되는 것이고, 만 개도 하나씩 모아서 되는 것이다. 그게 자연과 인생의 법칙이다.

한 문제가 1년이면 365문제고 10년이면 3650문제가 된다. 내가 한 만큼 내 것이 된다. 당장은 한 문제가 아무런 해결책도 안 된다는 생각에 하릴 없이 세월만 보낸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냐?' 는 말은 절대 하지 마라. 누구나 다 한 문제씩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핵심은 얼마나 오래 지속할 끈기가 있느냐의 문제다.

못한 것은 못한 것대로, 한 것은 한 것대로 어차피 시험은 보게 되어 있다. 언제 다 끝내냐는 걱정 속에 공부를 안 하고 있다고 해서 시험을 안 보는 것도 아니다. 내가 공부한 만큼만 내 것이 된다.

"공부, 절대로 많이 하지 마라. 오직 꾸준히 해라."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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