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 아직 간직합니다
어려운 아이들 초대해 크리스마스 파티한 누나, 만나고 싶어요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납니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어 늘 동상이 걸려 빨갛게 된 내 귀를 보면서, "이 귀마개가 너의 귀를 따뜻하게 해줄 거야" 하고 건네 준 그 누나의 선물을 28년이 지난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며 잊을 수 없는 정을 만나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방과 후면 지역의 한 석간 신문을 배달 했습니다. 지금은 어린이나 청소년이 신문 배달을 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지만 그 시절에는 참으로 흔한 일이었습니다.
80년대 초의 신문배달 방식은 지금과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최소한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배달을 했지만 그때는 걸어서 배달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달하는 시간도 참 많이 걸렸습니다.
신문 100여 부를 끈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독자의 집 대문 아래로 신문을 던져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는 아파트가 드물었고 일반 주택이 대부분이라 집을 찾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구독하는 집 대문에 분필로 별도의 표시를 해 두고 배달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달 부수에 따라 금액이 달랐지만 당시 받은 월급은 7800여 원. 198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의 자장면 가격이 300원 정도였으니, 지금 물가로 환산한다면 약 7~8만 원 정도의 화폐가치라 생각 됩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신문지국에 도착하면 자기가 배달할 부수를 먼저 세어 챙깁니다. 새로 신문을 배달할 곳이 생기면 번지수를 메모하고, 또 전단지 삽지가 있는 날은 한쪽에 쪼그려 앉아서 신문 속에 일일이 전단지를 삽지하며 배달 준비를 합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더욱 분주해 집니다. 지국에서 나눠주는 우의를 입고, 신문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덮거나 감싸는 등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가오면 신문 1부 마다 비닐에 포장되어서 배달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장치가 없었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배달을 해야 했습니다.
평소에는 대문 아래도 던져 넣던 신문이었지만, 비오는 날이면 초인종을 눌러 주인에게 직접 신문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오는 날 신문 배달은 평소 인정이 넘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우의를 입었지만 비에 흠쩍 젖은 저에게 새 우산을 고이 내주신 아주머니도 있었고, 거금 5천원을 주시며 학용품을 사 쓰라는 고마운 분도 계셨습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분들의 고마움을 성인이 된 지금도 그리움으로 정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
그 고마운 분들 중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꼭 만나보고 싶은 그 누나가 생각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에게 귀마개를 선물해 주었던 그 누나를 다시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누나의 나이는 당시 20대 초반 정도로 기억됩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 누나는 대구 동구의 한 아파트(태양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위치한 '한샘부엌가구'라는 사무실에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 곳의 직원이었던 누나는 신문을 배달하러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상 웃는 얼굴로 "고생 많다"며 따뜻하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누나는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추석 설날에도 선물을 잊지않고 챙겨 주었습니다. 연필 한 다스와 필통, 노트와 짓기장 등 학용품을 때가 되면 항상 선물해 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누나는 저에게 '귀마개'와 '털장갑'을 선물 하며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놀러 오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누나 집에 와서 케이크도 먹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자"고 말입니다.
그 누나는 당시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라고 약도를 저에게 그려 주었습니다.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와서 내리면 OO아파트가 보일거야. 그 아파트의 OO동 201호(2층 이었던 것으로 기억남)로 오면, 문이 열려 있을 거야" 하고 설명하면서 시간 맞춰서 꼭 오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당일, 저는 그 누나가 그려 준 약도를 손에 꼭 쥐고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를 전혀 타보지 않았던 저는 멀리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 누나가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멀리까지 그 누나를 찾아 갔습니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아파트 앞에 도착한 저는 동과 호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엘리베이트가 없는 시절이라 계단을 통해 2층에 올라 가니 누나의 말대로 현관문이 반 정도 열려 있었습니다.
아파트 안에서는 반가운 누나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생각하고 열린 현관문을 통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저 또래의 많은 아이들(약 10~15명 정도)이 음식과 다과를 먹으면서 즐겁게 웃고 있었고, 그 누나는 음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간 1층으로 다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많은 사람속을 뚫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나는 저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 처럼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있던 많은 아이들을 초대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 하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보고 싶은 그 누나의 모습
다음날, 신문 배달을 갔더니 그 누나는 "왜, 어제 왜 안왔었냐"고 물었고, 저는 집에 일이 있어서 못 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누나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주며 후원을 하였고, 또 그런 아이들을 집에까지 초대해서 함께 밥 먹는 등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누나였던 것입니다.
그 누나가 당시 20대 초반이었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벌써 50세가 훨씬 넘은 중년의 아주머니로 변신해 있을것입니다. '한샘부엌가구'의 그 누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많은 아이들을 위해 살고 있을지도 모를 그 누나가 보고 싶습니다.
많은 아이들의 천사였고, 참 좋은 누나로 아이들에게 기억 되는 이제는 중년이 된 그 누나가 참 보고 싶습니다. 올해도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며 그 귀마개를 다시한번 꺼내 봅니다.
매년 이맘때면 생각나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크리스마스 산타인 그 누나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 헤드폰 귀마개추운겨울 신문배달을 하는 어린 나에게 그 누나가 선물한 귀마개. ⓒ 전득렬
신문 배달을 하며 잊을 수 없는 정을 만나다
▲ 80년대 신문배달끈으로 묶어 메고 배달했다. ⓒ 전득렬
80년대 초의 신문배달 방식은 지금과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최소한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배달을 했지만 그때는 걸어서 배달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달하는 시간도 참 많이 걸렸습니다.
신문 100여 부를 끈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독자의 집 대문 아래로 신문을 던져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는 아파트가 드물었고 일반 주택이 대부분이라 집을 찾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구독하는 집 대문에 분필로 별도의 표시를 해 두고 배달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달 부수에 따라 금액이 달랐지만 당시 받은 월급은 7800여 원. 198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의 자장면 가격이 300원 정도였으니, 지금 물가로 환산한다면 약 7~8만 원 정도의 화폐가치라 생각 됩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신문지국에 도착하면 자기가 배달할 부수를 먼저 세어 챙깁니다. 새로 신문을 배달할 곳이 생기면 번지수를 메모하고, 또 전단지 삽지가 있는 날은 한쪽에 쪼그려 앉아서 신문 속에 일일이 전단지를 삽지하며 배달 준비를 합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더욱 분주해 집니다. 지국에서 나눠주는 우의를 입고, 신문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덮거나 감싸는 등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가오면 신문 1부 마다 비닐에 포장되어서 배달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장치가 없었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배달을 해야 했습니다.
평소에는 대문 아래도 던져 넣던 신문이었지만, 비오는 날이면 초인종을 눌러 주인에게 직접 신문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오는 날 신문 배달은 평소 인정이 넘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우의를 입었지만 비에 흠쩍 젖은 저에게 새 우산을 고이 내주신 아주머니도 있었고, 거금 5천원을 주시며 학용품을 사 쓰라는 고마운 분도 계셨습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분들의 고마움을 성인이 된 지금도 그리움으로 정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
▲ 한샘부엌가구당시 누나가 근무했던 곳. 지금은 셔트가 내려져 있다. ⓒ 전득렬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에게 귀마개를 선물해 주었던 그 누나를 다시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누나의 나이는 당시 20대 초반 정도로 기억됩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 누나는 대구 동구의 한 아파트(태양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위치한 '한샘부엌가구'라는 사무실에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 곳의 직원이었던 누나는 신문을 배달하러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상 웃는 얼굴로 "고생 많다"며 따뜻하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누나는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추석 설날에도 선물을 잊지않고 챙겨 주었습니다. 연필 한 다스와 필통, 노트와 짓기장 등 학용품을 때가 되면 항상 선물해 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누나는 저에게 '귀마개'와 '털장갑'을 선물 하며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놀러 오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누나 집에 와서 케이크도 먹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자"고 말입니다.
그 누나는 당시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라고 약도를 저에게 그려 주었습니다.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와서 내리면 OO아파트가 보일거야. 그 아파트의 OO동 201호(2층 이었던 것으로 기억남)로 오면, 문이 열려 있을 거야" 하고 설명하면서 시간 맞춰서 꼭 오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당일, 저는 그 누나가 그려 준 약도를 손에 꼭 쥐고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를 전혀 타보지 않았던 저는 멀리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 누나가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멀리까지 그 누나를 찾아 갔습니다.
▲ 짓기장누나가 선물했던 학용품 공책. ⓒ 전득렬
아파트 안에서는 반가운 누나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생각하고 열린 현관문을 통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저 또래의 많은 아이들(약 10~15명 정도)이 음식과 다과를 먹으면서 즐겁게 웃고 있었고, 그 누나는 음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간 1층으로 다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많은 사람속을 뚫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나는 저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 처럼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있던 많은 아이들을 초대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 하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보고 싶은 그 누나의 모습
▲ 귀마개 포장누나가 선물했던 귀마개 포장박스. ⓒ 전득렬
그 누나가 당시 20대 초반이었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벌써 50세가 훨씬 넘은 중년의 아주머니로 변신해 있을것입니다. '한샘부엌가구'의 그 누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많은 아이들을 위해 살고 있을지도 모를 그 누나가 보고 싶습니다.
많은 아이들의 천사였고, 참 좋은 누나로 아이들에게 기억 되는 이제는 중년이 된 그 누나가 참 보고 싶습니다. 올해도 그 누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며 그 귀마개를 다시한번 꺼내 봅니다.
매년 이맘때면 생각나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크리스마스 산타인 그 누나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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