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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장 큰 소리를 듣고 가장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방법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버지를 고백하다

등록|2009.12.25 19:06 수정|2009.12.25 19:06
크리스마스이브, 깊은 밤에 헤이리 인근 카페 '오로라'에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몇 분이 모였습니다. 2년 전 은퇴하신 김주정 선생님의 색소폰연주를 감상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카페에서 알코올을 넣지 않은 칵테일을 한 잔씩 앞에 두고 연주에 몰두했습니다. 아다모Salvatore Adamo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를 김 선생님의 색소폰 버전으로 듣는 맛은 화이트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니라도 충분히 감상적이었습니다. 오래된 사람들의 오래된 노래, 오래된 추억들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색소폰을 연주중인 김주정선생님 ⓒ 이안수




김낙용 선생님이 불쑥 아버지와의 추억을 얘기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참 미웠어요. 제가 어릴 적에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기 위해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일부터 대학의 진학까지 모든 것을 제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제 처지는 도무지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와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63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10년 전의 일이지요. 그런데 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해가 거듭될수록 아버지가 점점 더 그리워지는 거예요. 요즘은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제가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말을 마친 김 선생님이 말을 다시 잇도록 재촉했습니다.

"그 미웠던 아버지가 왜 지금에 와서 그리움의 덩어리가 되어서 또 다시 김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걸까요?"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무관심으로 저를 단련했던 것 같아요. 제가 힘든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의 제 회사를 꾸리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침묵했던 아버지 때문인 것 같아요."

김낙용 선생님은 연대 농구부의 농구선수였고 지금은 차가 400대나 되는 중견 물류회사인 정화로직스의 대표입니다.

▲ 벽난로의 참나무 장작불이 겨울밤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 이안수



막 무대에서 내려오신 김주정 선생님이 말을 받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엄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숙제를 하기 위해 마루에서 책을 펴고 있으면 들로 나가지 않는다고 매를 들었습니다. 가을 추수 후 벼를 말리기 위해 마당에 펴놓고 제게 닭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라 했습니다. 저는 멍석 옆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말았지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닭들이 멍석 위의 우케를 온통 헤집어 버렸습니다. 들에서 들어오시다가 그 광경을 본 아버지는 지게 작대기로 저를 인정사정없이 매질했습니다. 옛날의 아버지는 엄한 존재였지요."

신정균 선생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행복한 경우입니다. 제게는 무관심할 아버지도, 엄한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6.25때 납북되었고 생사도 모른 채 살았지요."

다시 김 선생님께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젊은 시절 색소폰에 관심이 많았던 김 선생님은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중고 색소폰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렇지만 경기도 일원의 경찰서 지구대장과 정보과장, 경비교통과장 등 재직 시에는 밤낮이 없는 직장의 업무 성격상 색소폰을 배울 틈을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평소에 소원이었던 그 색소폰과 2년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팝송과 가요는 소화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 김주정선생님의 색소폰을 연주 솜씨는 최근 2년간 연마한 실력입니다. ⓒ 이안수



크리스마스이브의 감상적인 밤 탓인지, 김 선생님의 애절한 색소폰 연주 탓인지는 모르지만 지난 수년간 가장 측근이었던 박희주 촬영감독님에게도 입을 연 적이 없었던 가족의 비밀을 말했습니다.

"박 감독님이 아시다시피 저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우리집의 큰 기둥인 첫째아들은 저와 함께 운동을 하던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사고무친이 된 이 아들을 즉시 저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아들로 삼았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운동에 출중한 소질을 보였고 지금은 한 축구구단의 프로축구선수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다섯살 때였으므로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잘 적응했고 저의 처도 이 큰 아들에게 제일 깊은 애정을 보여서 이 아들이 러시아나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도 따라가서 밥을 해주곤 했습니다. 지금 집안의 대들보로서의 역할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부 모두가 서로 집안을 오가는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전혀 몰랐던 김낙용 선생님의 고백에 박희주 감독님이 제일 놀랐습니다.

▲ 김낙용, 박희주, 신정균 선생님과 함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 이안수



아버지이야기에 이어 할아버지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종조부께서는 충북 진천에서 평생 농사를 하면서 사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못자리에 발을 담가보신 적은 없습니다. 양반으로서 뒷짐을 지고 농사를 하셨지요. 이 할아버지는 고려 사문박사四門博士 섬한暹漢을 시조로 하는 연안김씨의 25대손이셨습니다. 윗대할아버지께서는 조선의 개국에 참여해 조선시대에만 정승 6명, 대제학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163명을 낸 명문가의 기개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집안사람들에게는 절대 단산斷産을 못하게 했습니다. 인구가 많아야 나라가 힘이 있다는 생각이셨지요. 그래서 그 아들들은 모두 자녀들은 아홉이나 열 명을 두곤 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서울에 오시곤 했는데 꼭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때가 경복궁에서 조상님의 제사를 모실 때입니다. 진천에서 서울까지가 300리인데 하루만에 걸어오시고 다시 만 하루를 걸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부부가 모두 화목하고 건강하셨습니다. 할머니는 102세에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잔병을 앓지 않았습니다. 간혹 방문 드리면 얼굴이 얼마나 건강하신지 제가 '할머니, 다시 시집가도 되시겠어요!'라고 인사를 건네곤 하셨습니다. 두 살이 많은 할아버지가 직접 두더지를 잡아서 할머니를 고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돌아오신 날 할아버지가 집안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나도 이제 살만큼 살았구나. 오늘 부터 내게 밥상을 들이지마라. 단지 물 한 대접씩만 두고 가도록 해라.' 곡기를 끊고 할머니를 뒤따르겠다는 말씀이었지요. 온 집안이 난리가 났고 할아버지의 뜻을 되돌리려고 모두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상을 들일 때마다 혼만 났습니다. '귀한 음식 버리지 말고 나를 욕되게 하려고 하지 마라'고……. 할아버지는 7일째부터 물도 드시지 않으셨고 곡기를 끊은 지 열흘만에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104세였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정신이 맑았고 두 가지 말을 유언처럼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단산을 하지 말고, 어디에서 살던 그곳을 고향으로 여겨라.'"

100세의 생일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지상에서의 자신의 삶을 마감한 스콧 니어링의 죽음과 동일했습니다.

▲ 참나무 장작불은 이 침묵과 묵시의 비밀을 알고 있는듯 싶습니다. ⓒ 이안수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겨 크리스마스 날이 되었습니다.
김주정 선생님이 일행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가장 큰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의 가청 주파수는 20hz에서 20,000hz입니다. 그 음역을 벗어나는 소리는 우리의 청각으로는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입니다. 침묵함으로서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가장 큰 그림인 우주를 우리가 어떻게 한눈에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사람의 눈에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묵시默示뿐입니다. 눈을 감으므로서 가장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은퇴 후 대원인력개발 대표와 파주 ubipark 보안팀장으로 인생2막을 살아가고 계신 김주정 선생님은 명일의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에 다시 올라 색소폰을 챙겼습니다. 두개나 되는 그 색소폰박스를 박희주 감독이 건네받았습니다. 올 46회 대종상시상식에서 미인도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촬영현장에서는 수백 명을 호령하는 야전사령관으로 살고 계신 박 감독님이 오늘밤, 포터를 자처했습니다.

▲ 박희주촬영감독님이 색소폰 박스의 포터를 자처했습니다. ⓒ 이안수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 걸친 밤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어쩌면 '아버지의 무관심'은 아들에게 '침묵'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이며 '아버지의 엄격함'은 '묵시'로만 볼 수 있는 '가장 큰 그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1.co.kr 과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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