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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변호한 사람치고 징역 안 간 사람 없어"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54]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등록|2010.01.04 16:24 수정|2010.01.04 16:24

▲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겉그림. ⓒ 한겨레출판

이에 대해 검찰은 "어느 간첩이 '내가 간첩이다'라며 정체를 드러내겠느냐"라고 했다. 참 어이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한 마디 했다. "그렇다고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간첩이라는 논법은 성립될 수 있는가?" (책 속에서)

권력을 움켜쥔 세력이 즐겨 사용하던 권력 유지 수단 중의 하나가 무시무시한 낙인을 찍어 반대 세력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왕이라는 절대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 '반역'이란 낙인이 그랬고, 일제 지배 속에서 '불령선인'이란 낙인이 그랬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빼앗은 쪽에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넘보려는 자들이 없을까 의심하면서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애를 쓴다. 고려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병처럼 활용했다. 마찬가지로 해방 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그들의 정권 유지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내란음모'니 '체제전복'이니 낙인을 찍고 간첩죄를 들씌워 제거했다. 그러다보니 사실과 전혀 다른 만들어진 간첩이 양산되었다.

말솜씨가 뛰어난 변호사, 형사소송 패소율 높은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의 말솜씨는 아무도 당해낼 재간이 없을 정도였다고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회고한다. 간결하고 세련된 꼭지따기 형태의 변호인 반대신문을 통해 사건의 핵심을 간결한 한두 마디의 질문을 통해 폭로해 버리는 방식이다.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에 연루된 박형규 목사와 법정에서 주고받은 변호인 반대 신문을 살펴보자.

문 : 부활절 연합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오는가?
답 :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온다.
문 : 혹시 흉기를 가지고 오지는 않는가?
답 : 그런 경우는 없다. (방청석에서 폭소) (책 속에서)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연행자들이 '내란 예비음모'죄로 구속된 것의 부당성을 간결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호를 받은 피고인이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의 변론이 주로 시국사범 피고인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야당 탄압이 진행되던 때 '투표 간섭죄'와 '뇌물죄'로 구속된 김상현 의원 역시 그의 변론을 받았지만 구속되어 2년간 복역했다. 석방된 뒤 김의원은 "한승헌 변호사가 변호한 사람치고 징역 안 간 사람 없다"고 해서 청중을 웃겼다.

정찰제 군법회의, 구속된 변호사

1974년 발표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비방, 왜곡만 해도 징역 15년을 구형하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였다. 그 조치가 발표된 지 닷새만에 장준하, 백기완 두 사람이 끌려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한승헌 변호사의 반대 신문을 살펴보자.

한승헌 : 이번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는가요?
백기완 : 예.
한승헌 : 그때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는 단돈 5천원 뿐이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기완 : 예, 5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한승헌 : 그동안 개헌운동을 주도해오면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요.
백기완 : 네, 돈이 별로 필요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엄청난 민심이 바로 우리의 자금이요, 힘이었으니까요. (책 속에서)

함께 끌려간 장준하의 주머니에서는 단돈 180원이 나왔다. 이 두 사람은 징역 15년을 구형받았고, 하룻밤 지난 뒤 난 판결에서도 징역 15년이었다. 이를 빗대어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군법회의에서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라고 했던 한 변호사의 말이 '정찰제 판결'이란 말로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수많은 시국사범의 변론을 맡아 헌신적으로 활동하면 할수록 그를 향한 위협의 강도 또한 점점 높아졌다. 정보 수사기관의 감시 대상이 되어 도청, 미행, 탐문, 위협, 방문의 객체가 되었다. 처음에는 몰래 하더니 나중에는 드러내놓고 이루어졌다. 남산(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적도 많았다. 그리고 끝내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동료 변호사들이 그를 적극 변호했지만 역시 패소하고 말았다.

구속 수감, 석방 그 후

한승헌 변호사는 구속되어 세 곳의 교도소를 순례했다. 서울구치소, 육군교도소, 그리고 김천 소년교도소였다. 자신의 교도소 생활을 돌아보면서 "청주여자교도소만은 하느님 소관이어서 갈 수 없었다"고 유머를 날린다.

시국사범을 변호하다 구속 수감된 생활이 어찌 순탄하기만 했을까. 주먹질, 발길질, 침대봉 세례, 무릎 안쪽에 각목 끼어 넣고 짓누르기…. 점잖게 명사로 나열한 것이 이 정도다. 동사, 형용사, 부사까지 등장하면 말하는 사람이 더 치욕스러워진다며 입을 다문다.

사법고시를 합격한 변호사로서 양지만 찾아 살려 애썼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왜 이런 길을 택했을까.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속에 그 답이 있다.

양지보다 음지가 더 짙게 배어있던 삶이라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가 아닐까 지레짐작할 수 있지만, 아니다. <한승헌의 유머산책>, <한승헌의 유머기행> 등 저서를 남길 정도로 남다른 유머감각을 가진 저자는 자신과 자신이 변호했던 사람들의 삶을 맛깔스럽게 보여준다. 음지가 짙게 배인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달았고, 인간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덧붙이는 글 한승헌/한겨레출판/2009.11/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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