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폭탄 핑계 재택근무... "인간은 역시 약해"
눈이 와서 신난 건 아이들뿐, 언덕 빼기가 눈썰매장으로
▲ 눈 ⓒ 강찬희
오전 9시20분에 아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이 문자를 받고 난 자동차를 집 방향으로 돌렸다. 아내가 집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전 8시, 집에서 안양 여고 사거리 까지는 불과 500m 거리다. 1시간 20분 동안 겨우 500m 간 것이다.
'눈 폭탄'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도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다. 이따금 자동차가 한 대 씩 지나다닐 뿐이다. 사방이 온통 새 하얗다.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 그게 더 빠를 거야"라고.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핑계 김에 '재택근무'라는 것을 하기로 했다. 자동차를 몰고 출근 하는 것은 이미 포기 한 터,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이미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있는 아내에게 도로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가자니 너무 먼 거리였다.
집에도 컴퓨터는 있고 내 일을 방해 할 다섯 살 호연이 녀석은 이미 어린이 집에 데려다 준 상황. 집에서 일을 해도 그럭저럭 업무 분위기는 잡힐 것 같았다. 신년 초하루 첫 출근은 이렇게 정리 됐다. '재택근무' 로.
멀리 출장 갈 일은 모두 뒤로 미루고 앉아서 해결 할 수 있는 일만 처리했다. 전화 하고 급한 서류 처리하고.
동사무소에 서류를 떼러 갈 일이 생겼다. 평소 하지 않던 목도리까지 두르고 집을 나섰다. 부녀회장님, 통장님, 평소 알고 지내던 음식점 사장님이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눈 오는 날, 내가 출근하고 없는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함께 눈을 치우지 못한다는 미안함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눈 이 와서 신이 난 것은 역시 아이들이다. 차가 다니지 않는 한산한 도로는 '눈썰매장'으로 변해 있다. 안양시 석수 도서관 앞 언덕 빼기는 제법 그럴듯한 눈썰매장이다. 비료 부대가 눈썰매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심에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어렸을 적에는 흔한 광경 이었다. 눈만 오면 비료 부대에 짚단을 넣어서 언덕 빼기로 달려 가곤 했다. 눈 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단순한 놀이에 빠져 추운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몰랐다. '동심'이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 하나 둘 점점 없어져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음 날, 고민에 빠졌다. 도로는 아직도 빙판길이다. 쌓였던 눈이 추운 날씨에 그대로 얼어 버린 탓에 오히려 어제보다 더 미끄러워 보인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차를 가지고 나가기로 했다. 이틀씩이나 눈 핑계대고 '재택근무'를 할 수는 없었다.
도로에 나가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차가 쭉 미끄러진다.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가는 데도 불안하기만 하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껴진다. 눈만 많이 와도 일상이 바뀌어 버린다. 뉴스를 보니 출근 을 못해 난리다. 도로가 미끄러워 운행이 불가능해지자 차를 도로에 버리고 간 사람들이 많아서 더 막힌다고 한다. 또 수도권 지하철 중 91개가 출입문에 눈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지연·운휴 되고 있다고 한다.
지자체가 늑장대응을 해서, 일기예보가 맞지 않아서, 시민 의식이 결여돼서 '교통대란'이 났다고 원인규명 하는 소리도 들린다. 맞는 말이다. 시청에서 좀 더 빨리 눈을 치웠더라면, 일기 예보가 정확했더라면, 시민들이 무책임 하게 도로에 차를 버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좀 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본래 대 자연 앞에서 무기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약한 존재다. 대 자연이 작은 조화만 부려도 꼼짝을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한 없이 오만하다. 그래서 문제다. 대기 오염으로 인한 이상 기후로 매년 '난리' 를 겪으면서도 쓰레기를 쏟아내고 각종 유해 가스를 배출한다.
눈 폭탄 핑계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젖어본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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