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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분청사기 속의 물고기

계룡산 도예촌 기행기

등록|2010.01.10 15:00 수정|2010.01.10 15:00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계룡산 도예촌. 산을 휘 둘러보니 멀리 앞으로 기기묘묘한 계룡 산봉들이 첩첩이 늘어서 있고 한기 품은 겨울 싸늘한 바람이 낯선 객의 옷깃을 파고든다. 그러나 왠지 겨울 날씨같지 않게 바람이 차갑지 않고 맑고 청아했다. 산의 완만한 구릉과 잔가지를 드러낸 활엽수 능선, 마을 뒤로 펼쳐진 신싱한 소나무 숲이 고향 수풀마냥 정겹게 느껴졌다. 또 멀리 계룡산정 위로 돋아난 닭벼슬 같은 봉우리는 아늑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 계룡산 도예촌의 가마 ⓒ 강형구


도예촌에 자리 잡은 도예가들 집들은 자신의 전시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물론 관람도 자유로웠다. 작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집, 별모양의 작고 하얀 도자기를 빚어 예쁜 글을 써놓고 여럿을 걸어놓은 담, 하늘을 날아가듯 지붕위에 놓인 자전거 등이 여기가 그냥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소도예 대표 임성호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임성호씨에게 따끈한 차 대접을 받으며 도자기에 얽힌 귀한 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혼란기 때,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청자를 굽던 도공들이 이쪽 계룡산 쪽으로 들어와 분청사기를 빚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철화분청은 흑갈색의 추상화된 물고기나 초화문이 힘찬 필치로 거침없이 장식된 도자기지요. 학봉리의 철화분청사기는 아마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다고 보는데 연꽃, 물고기, 모란, 넝쿨 등의 독특한 무늬로 장식을 했고 표현은 간결하지만 대범하고 해학적이어서 서민적인지요."

작업장 안에는 그가 만들고 있는 도자기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연탄난로 옆 소박한 나무 탁자에 자리하고 앉자 찻물을 부어주면서 임성호씨가 이야기를 꺼낸다.

▲ 임성호-도예가/계룡산 도예촌 이소도예 대표 ⓒ 강형구


계룡산 흙은 암갈색, 적갈색, 검정색으로 청자유약이 나오지 않는다. 그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 상감기법처럼 하얀 분 백토를 바른다. 그런데 계룡산 주변에서는 백토를 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묽게 타서 바를 수밖에 없다. 분청만 발라놓고 보니 어쩐지 생뚱맞다. 철이 많은 동네라서 붉은색 석간주(石間朱-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안료-검은색가루, 검지만 붉게 나온다)로 당초문이나 물고기 등의 그림을 단순화 시켜 해학적이면서 대담한 필치로 그려 넣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그림은 왜 탄생했을까. 아마도 그림만 그리는 사람은 그림만 그렸고 또 물레를 돌리는 사람은 물레만 돌리고 이렇게 분업화 되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 숙달되어 대담한 필치가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워 만들어 탄생한 것이 철화분청사기다. 그런데 왜 계룡산 철화분청사기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도자기에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색깔이 칙칙하여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가치가 더 있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 초기에 시작하여 약 1세기정도 만들어지다가 점차적으로 나온 백자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도 청자나 백차처럼 분청사기는 도자기의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없었을 혼란기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토가 만약 먼 지방에 있다고 가정할 때 발품을 팔아 그것을 가지고 와야할 텐데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 때라 미처 가져올 수가 없었기에 우선 확보된 재료로 만들어 팔아 생활도 유지하고 실생활에 썼을 것이다.

▲ 철화분청사기(임성호 작품) ⓒ 강형구


그렇다면 왜 사기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불 때는 온도와 도자기를 빚는 흙의 재질과 관계가 있다. 섭씨 1300도 이상으로 구우면 자기가 되고, 1300도에서 1250도 사이에서 구우면 석기, 1100도에서 950도 사이의 온도에서 구우면 도기, 900도에서 700도 사이에서 구우면 토기가 된다. 그렇다면 사기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사기는 도기 정도의 온도에서 굽기에 도기에 해당한다.     

당시 도공들이 온도를 올리는 불 때는 기술이 없어서 사기를 만들었을까. 아니다. 흙의 재질과도 관계가 깊다. 실제로 유럽에는 재질이 좋은 흙이 많았지만 섭씨 1300도 이상 온도를 올려 굽는 불 때는 기술이 없어 훌륭한 자기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는 불 때는 기술은 있었어도 좋은 재질의 흙이 없었다. A급의 흙은 백자, B급의 흙은 청자, C급의 흙은 분청사기, D급의 흙으로는 옹기토를 구웠다.

그러니까 철화분청사기는 C급의 흙으로 섭씨 1100도에서 950도 사이의 온도에서 구워졌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는 굽는 온도가 낮고 흙의 재질이 좋지 않을 수록 잘 깨진다.

도자기는 석간주 항아리 태토와 재와 약토를 섞어 불에 구워 만드는데 참나무재와 소나무재는 알카리성으로 유약이 되고 약토로 석회질이나 규산질이 들어있는 나뭇잎 썩은 것이나 논흙 혹은 황토를 사용한다. 그렇게 만들어 불을 때면 과연 문양이며 빛깔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 못한다. 그러기에 도자기는 불이 구워 만들어 내는 불의 예술인 것이다. 

임성호씨는 철화분청사기에 대하여 거침없이 말한다. 그의 해박한 달변은 가히 압도적이다. 임성호씨는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다시 더운 찻물을 부어 채우고는 여러 종류의 도자기 찻사발을 가져와 보여주며 비교 설명해 준다.

첫 번째, 푸른빛이 도는 사발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구워낸 찻사발인데 강도가 약하고 물이 배어나온다. 오직 찻사발로만 쓰는데 옹기토에 해당된다. 찻물이 잘 들어 선호한다. 두 번째, 문양이 곱게 새겨진 푸른 찻사발은 청자다. 청나라의 기술로 만들어 두께가 얇고 최상의 흙으로 빚었다. 세 번째, 유적천목으로 검은색 바탕에 기름이 떠다니는 모습이 생생하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졌다. 석기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 네 번째, 붉은 색이 감도는 서양 찻사발이다. 소 뼛가루나 나트륨(소금)이 들어갔고 분청도 발랐다. 다섯 째, 회색 토기 찻사발로 기와를 굽는 방법에서 창안한 일본 라쿠 기법으로 만들었다. 여섯 째, 계룡산 분청사기로 물고기 그림이 인상적이다. 석간주와 단미를 섞어 만들었다. 화학재료를 쓰지 않고 계룡산 흙으로 만들었다.

▲ 손에 든 것(경상남도 산청 찻사발), 좌로부터 청자,계룡산 철화분청사기,유적천목,회색 토기 찻사발,서양 찻사발 ⓒ 강형구


임성호씨는 차례로 찻사발을 들고 비교 설명해 주며 여기에서 백자만 빠졌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오늘 도자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공부를 한 느낌이다. 임성호씨는 날개를 펴고 휙 날아오를 듯한 날치가 그려진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를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는 서민을 대표하는 도자기이지요. 서민적인 투박한 질감에 민예적이면서도 소박하고 해학적이면서도 대담하지 않나요. 어느 나라나 문화예술품이 빛을 발할 때가 가장 훌륭한 시대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를 일본이 더 많이 가지고 있지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의 차(茶)의 신(神) 센노리큐가 조선의 질박하고 소박한 도자기를 좋아했지요. 실제로 오늘날 일본이 우리보다 도자기 기술이 더 발달했어요. 그리고 일본인들의 도자기 사랑은 대단해요. 오늘날 일본인들의 그러한 도자기에 대한 심미안을 갖는데는 일본의 차의 신 센노리큐의 영향이 매우 크지요."

임성호씨는 일본의 차의 신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반전 평화주의자 센노리큐는 만년에 조선을 침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었다. 사무라이 즉 칼 찬 무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 전쟁 속에서도 간소한 차를 즐기며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절도 있는 다도(茶道)의 세계를 열었던 센노리큐는 사카이의 어물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23세에 출가한다. 출가 후 다도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높은 경지의 인격에 도달한 다도의 세계를 연다.

질박하고 소박하고 절제미 있는 고요한 선과 같은 와비차의 세계를 열었던 센노리큐는 조선의 찻사발을 매우 찬미했다. 자신을 부러 뽐내지도 않고 은근한 모습으로 마치 인격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순일무잡한 꾸밈없는 미소처럼 보이는 조선의 찻사발(이도다완)을 흠모했다.

모든 사람이 무릎 꿇고 평등하게 앉아 차를 나누는 초암의 간소하고 좁은 다실을 지어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빈부귀천이 따로 없이 모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도록 좁은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금속성의 반지뿐만 아니라 칼을 찬 무사들도 모두 그것을 밖에 두고 가야만 했다. 그 속에는 센노리큐만의 만인에 대한 평등사상과 평화주의 사상이 깃들어 있었다. 

▲ 이소도예 앞 풍경 ⓒ 강형구


센노리큐는 다인을 보통인, 애호가, 명인 등의 세 부류로 분류했다. 다인의 자세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 마음 둘째, 인내 셋째, 그릇 즉 훌륭한 인격이었다. 그러니까 센노리큐의 다도는 차 생활을 통한 수준 높은 명상과 청아한 인격 수양을 의미했다. 오직 칼 찬 무사나 상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차를 나누면서 사교에 치중하고 이익이나 도모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그친 것을 일대 혁신하여 심미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것이었다.  

어느 날 제자가 센노리큐에게 차모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말에 센노리큐는 그냥 물을 끓여 차를 마시는 거라고 말한다. 제자는 그거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자 센노리큐는 그러나 그러한 다도 행사를 진행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이는 센노리큐가 그저 차나 마시는 그런 행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면서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이냐가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는 말이다.

이 정도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센노리큐가 조선의 질박한 찻사발을 들고 예술을 논하며 무식하고 포악한 칼 찬 무사들을 감히 발아래 굴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흠이 있는 찻사발을 보고는 숨김없는 솔직함과 자연미를 보고 논하였을 것이었고, 색깔이 선명하지 않는 찻사발에서는 검소함을 읽어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센노리큐가 본 찻사발은 상품성으로서의 그 흠결 없는 완벽한 상품으로서의 찻사발이 아니라 주로 이형으로 잘못 만들어진 것들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독창적이고도 철학적인 심미안의 세계를 열어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센노리큐에게 전국의 1600명의 막부들을 긁어모아놓고 사위에 황금 번쩍거리는 다실에서 값비싼 송나라의 고급 도자기를 놓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다회를 열도록 한다. 과연 정복욕에 빠진 천박하고 잔인한 출세주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다회에서 무슨 말을 지껄였을까.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니 훌륭한 인격이니 평화니 사랑이니 하는 그런 고상한 말들이 나올 수나 있었을까. 

▲ 이소도예 전시실에서 바라보이는 바깥 풍경 ⓒ 강형구


몇 해가 지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센노리큐의 집에 나팔꽃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보기를 원한다. 센노리큐는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오라고 말한다. 다음날 아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센노리큐의 집에 갔을 때 그 집에는 한 송이의 나팔꽃도 없었다. 센노리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자신의 소박한 차실로 들게 한다.

그 곳 화병에 한 송이 나팔꽃이 꽂혀 있었다. 질박하고 소박한 그리고 단아한 차실의 화병에 꽂힌 단 한 송이 나팔꽃!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황금다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센노리큐의 조촐한 다실의 풍경을 보고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아마도 그날 아침 단 한 송이만 제외하고 모든 나팔꽃을 잘라버린 센노리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천하디 천한 출세밖에 모르는 추저분한 속물덩어리야! 화려한 황금다실이나 지어 물질적인 부나 과시할 줄 아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정복자야! 네놈이 진정 자연 속에 핀 청아한 나팔꽃의 아름다움을 알기나 한단 말이냐!'

그것은 곧 야비한 출세주의자이자이며 잔인한 칼잡이이며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       

"그대는 그대가 그토록 숭앙해 마지않는 미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렇게 말했고 센노리큐는 아마도 '그렇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했을 것이었다. 다이묘들의 존경심을 한 몸에 받는 센노리큐, 칼에도 돈에도 권력에도 지위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사카이 사람의 기질을 지닌 센노리큐는 절대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도 결코 굽힘없이 고개를 바로 들고 그를 바라보았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그런 센노리큐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크나큰 문제 거리였을 것이다. 결과는 대덕사의 절 산문인 금모각에 센노리큐의 목상을 안치했다는 점과 다도구의 거래에 부정이 있었다는 두 가지 죄목을 들어 할복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정벌이라는 피의 전쟁, 임진왜란을 정면으로 반대하던 센노리큐는 결국 70세의 나이에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의 배를 가르고 자결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그 센노리큐의 다도에 대한 특별한 심미안이 도자기를 보는 각별한 미학으로 지금도 일본인의 마음에 남아있기에 여기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를 보러 일본인들이 더러 찾아오기도 하지요."

한 사람의 뛰어난 사람으로 인하여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이 변하기도 하고 그 덕분으로 깊이 있는 삶의 세계가 새로이 열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 도예촌에 있는 도예가들도 한눈 팔 지 않고 꿋꿋하게 도예가의 길만을 고집하고 가는 사람들이지요. 생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입은 적지만 전업 작가로서 꾸준히 연구 하면서 자기 길을 가는 것이지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기가 참 힘든데 아마 그것은 시대에 따라가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시대를 앞서 가는 삶을 살 것이냐가 문제인 것 같아요."

임성호씨가 순수한 도예가로서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하고 또 시대를 앞서가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단순히 시대를 따라가는 삶을 살려면 대중들이 좋아하는 도자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고 눈먼 나랏돈 타내 볼거리 쇼 하면서 크게 광고하고 떠들면 되겠지만 실제로 그 속에는 진실한 예술가의 그 무엇도 깃들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음이지 않겠는가.

 "여기 남자들 다 신선이지요. 다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옆에 서서 손으로 도자기 컵을 만들고 있던 임성호씨의 아내 권명희씨가 불쑥 끼어들어 말한다. 

 "생각해보면 공부다운 공부를 다들 제대로 안해서 먹고 살려고만 하며 사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도자기 발전을 위해서 자기 개발을 하고 그래야 하는데.........자! 이제 전시실로 가서 작품 한번 보죠."

임성호씨가 말한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시실로 갔다.

▲ 이소도예 전시실 ⓒ 강형구


임성호씨의 해학적이면서도 해박한 설명이 깃든 작품 설명을 들으며 이소도예 전시실을 관람한 후 작별인사를 했다.

돌아가는 길에 차창 너머로 솟아오른 겨울 계룡산을 바라본다. 역시 자연 속에 사는 자연스러움 그것이 최고로 좋을 것이려니. 계룡산 맑은 물길을 사납게 가르며 제 갈 길로 날쌔게 나아가는 계룡산 흙으로 빚어 구운 거칠고 투박한 철화분청사기 속의 물고기처럼 말이다.

문득 센노리큐의 일화가 떠오른다.

센노리큐가 어느 가을날 양아들에게 다실 주변의 청소를 하라고 시켰다. 양아들은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센노리큐에게 다 끝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센노리큐가 다실 주변을 돌아보고나서는 대뜸 청소가 잘못되었으니 다시 하라고 말했다. 양아들은 꼼꼼히 청소를 하고 나서 한참 후 다시 말했다.

 "아버지, 세 번이나 샅샅이 비질을 하고 세 번이나 물을 뿌려 바위 위에 이끼가 새파랗게 빛이 납니다."

그 말을 들은 센노리큐가 말했다.

 "아들아! 청소가 잘못되었다."

그러면서 센노리큐는 다실 옆의 빨갛고 노랗게 낙엽이 물든 나무 밑으로 가더니 그 나무를 세게 흔들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센노리큐가 말했다.

 "가을에는 나무 밑에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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