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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예수를 광대나 창녀로 그렸나

'색채의 연금술사 루오전'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 28일까지

등록|2010.01.11 16:04 수정|2010.01.12 09:45

▲ 예술의전당입구 루오전 대형포스터(위). '성안(그리스도의 얼굴)' 1932. 도록표지사진 ⓒ 김형순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작가로 형태와 색채의 하모니를 주장한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신성과 세속(le sacré et le profane)'전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는 3월28일까지 열린다.

그의 대표작 '견습생(1925)', '성안(聖顔, 그리스도의 얼굴 1932)', '베로니카(1945)' 등 회화 120점과 판화 등 170여 점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는 회고전의 성격도 있지만 파리퐁피두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어디에서도 공개하지 않는 14점의 미완성작품도 볼 수 있다. 

예수와 광대의 구별이 없는 종교화

▲ '소녀마술사' 종이를 덧댄 나무판에 유채 88×72cm 1939-1949. '그리스도의 수난(이 사람을 보라)' 캔버스에 유채 84×56cm 1947-1949 ⓒ 김형순


루오는 '소녀마술사'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보듯 예수를 변방의 광대처럼 그린다. 그에게 광대는 세속적 성자이고 예수는 성자적 세속자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의 주제가 '성속(聖俗)전'이 된 건 바로 이런 연유일 것이다. 그는 서커스단원, 곡예사, 곡마사, 무용수, 마술사, 피에로 등 다양한 광대를 선보인다.

예수도 "창녀나 세리가 너희 종교지도자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 21장 31-32절)"고 했지만 이런 '세속적 영성'은 성서적 메시지와 딱 맞아떨어진다. 루오의 천재성은 바로 이렇게 세속화와 종교화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있다.

미술사가 여문주씨는 '루오에 대한 경외'라는 글에서 "슬픈 표정의 광대, 살인자의 괴상한 얼굴, 비장한 알코올중독자, 지친 창녀 이렇게 관심도 끌지 못하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들의 영혼에서 루오는 예수의 얼굴을 본다"라고 적고 있다.

루오가 경멸한 사람, 옹호한 사람

▲ '발표자' 종이를 덧댄 캔버스에 유채, 잉크, 과슈 106×85cm 1908-1910년경. '폴리치넬' 종이를 덧댄 캔버스에 유채, 잉크, 과슈 71×56cm 1910년경. '거울 앞 여자' 1906 ⓒ 김형순 C. Pompidou Adagp


루오에게 경멸하는 사람, 옹호하는 사람은 뚜렷이 구별된다. 어려서부터 풍자화의 대가 도미에(H. Daumier)의 작품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당시 사회모순과 부조리가 너무 심해서 그런지 세상을 쥐락펴락하며 권위적인 판사나 의원들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내며 그린 작품이 많다.

희한한 붓질로 위선자의 모습을 예리하게 묘사한 '발표자'도 바로 그런 맥락의 작품이다. 머리와 펜대나 굴리며 사는 사람을 상징하는 종이 한 뭉치와 찌푸린 시선, 흘러내린 코안경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잘난 척하고 거만을 떠는 기득권층을 희화한다.

반면 루오가 옹호하는 사람은 바로 광대와 창녀다. 힘겹게 살아가는 광대나 괴로운 창녀의 모습이 그의 작품에선 거룩하게 보인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 주는 존재라는 면에서 예수와 닮았다. 루오가 창녀를 그린 건 모델료가 싸서라기보다는 그들과 같이 삶의 짐을 나누려는 의도가 컸으리라. 

루오시대의 정신과 그에게 영향 준 사람들

▲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스테인드글라스 106×78cm 1939-1941년경. 작가의 자화상인 '견습공' 68×52cm 1925(아래) ⓒ 김형순


루오는 1871년에 가구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14세 때부터 낮에는 스테인드글라스 견습공이고, 밤에는 공예미술학교를 다닌다. 이런 경험이 후에 색채조합의 귀재가 된다. 이번 전에서 유일하게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인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도 그 당시에 배운 기술 덕이다.

그는 10살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인다. 1890년에는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거기서 귀스타브 모로(G. Moreau)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는다. 또한 블루아(L. Bloy)와 위스망스(Huysmans)와 같은 당시 진보적 가톨릭문인과도 교류하며 '종교적(교리적) 예수'와 다른 '성서적(역사적) 예수'를 발견한다.

2차 대전 후 프랑스사회는 격변기였다. 레지스탕스운동의 선봉이었던 코뮤니즘이 가톨릭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커진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가톨릭은 성당작업에 무신론 작가까지 참가시키고, 신부가 현장노동자가 되는 '노동신부제'를 도입하는 등 혁신을 꾀한다. 루오의 화풍은 이런 사회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 '그는 학대당하고 멸시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종이에 에칭과 애쿼틴트 7×41cm 1923-1948 ⓒ 김형순


70년대 예수를 인간적으로 조명한 록뮤지컬 '슈퍼스타'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지만 루오는 이미 20-30년대부터 '인간예수'를 화폭에 담았다. 하긴 예수 스스로도 자신을 '사람의 아들'(마태오 20장 28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학대당하고 멸시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에서 보듯 루오는 예수를 '고통 받고 조롱당하는 민중'으로 그렸다.   

종교시집 <미제레레>에 루오가 판화제작
 

▲ 루오가 10년(1917~1927)에 걸쳐 제작한 58개 판화 '미제레레연작' ⓒ 김형순


종교와 예술을 찬미한 앙드레 쉬아레스(A. Suarès 1868∼1948)는 종교시집 <미제레레-Miserere Nobis의 약자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를 내게 되는데 루오는 이 책의 삽화를 맡는다. 58개로 된 이 작업은 10년(1917~1927)이나 걸린다. 수난 속 부활의 메시지 담겨서인지 1차 대전 후 좌절과 허탈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루오도 "신도로서 나는 이 무모한 시대에 십자가 위의 예수만 믿는다"라며 관념적 신앙에 빠진 자신을 탓한다. 루오는 성서적 이미지를 투박한 테두리선과 검은 잉크와 흑백에칭 등을 써 관객들이 더 절박한 리얼리티를 맛보게 하려 한다.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화가

▲ '부상당한 광대' 종이를 덧댄 캔버스에 유채 199×119cm 1932년. '곡예사' 종이에 덧댄 캔버스에 유채, 잉크, 과슈 104×73cm 1913년경 ⓒ 김형순


루오는 입체파와 야수파,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됐으나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부상당한 광대'나 '곡예사'는 그런 점이 보인다. 입체적 분위기와 야수파적 색채, 표현주의적 기법과 유사하나 그와 차별되는 골이 깊게 패인 굵은 선을 쓴다.

다만 루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강박증이 있었다. 한 일화로 당시의 드가, 세잔, 마티스, 피카소의 수집가로 유명한 화상 볼라르(A. Vollard 1865~1939)가 있었는데 그는 루오를 높이 평가해 그 작업실을 통째로 산다. 그런데 그 화상이 1939년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 이후 루오와 볼라르집안 사이에 소유권문제로 재판이 열리고 1944년 루오가 승소해 그의 작업실작품을 돌려받으나 그 중 315점은 공증인이 보는 데서 태워버린다. 1958년 루오가 죽자 그의 미망인이 그림을 1963년 국가에 기증했고 퐁피두미술관에서 보관해왔다.

한국 근현대작가들에도 많은 영감 주다

▲ 구본웅 I '여인' 65×53cm 1940'. '친구의 초상(李箱)' 캔버스에 유화 65×53cm 1930(아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김형순


루오의 이런 화풍은 일본은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다. 이중섭은 30년대 일본유학 중 루오를 알게 되어 그의 힘차고 굵은 선을 차용한다. 또한 시인 이상의 친구였던 구본웅도 일본작가 사토미 가즈오을 통해 그의 화풍에 접한다. '연인'이나 '친구의 초상'같은 작품은 바로 그때 나온 것이다. 그밖에도 황유엽 등 한국작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성속(聖俗) 넘어, 예술 통한 인간구원 노래

▲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기도 하다' 판화에 과슈 37×50cm 1922년 이후 미완성작품. '베로니카' 판에 덧댄 캔버스에 유채 50×36cm 1945년경(왼쪽) ⓒ 김형순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루오는 가장 높은 단계의 영성은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그런 신념 속에서 독특한 화풍을 낳는다. 그는 '독백'이라는 글에서는 "예술은 해방(délivrance, 감옥에서 석방)"이라고 언급했는데 이처럼 예술은 그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통로가 된다.

그의 화풍은 요즘 작가들이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침울하고 진지하다. 그러나 '여정이 아름답기도 하다'에서 보듯 그런 애수와 슬픔이 어린 분위기는 어느 샌가 붉게 타는 노을처럼 가슴 물들이는 감동으로 바꾼다. 이것이 바로 루오의 매력이자 미덕이다.

루오는 말년으로 갈수록 '베로니카'에서 보듯 인간을 보는 시선이 더 평온하고 따뜻해진다. 그리고 비잔틴성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도상(이콘)화로 기운다. 예수가 수난을 영광으로 바꾸듯 그는 세속적 영성을 숭고한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는 렘브란트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최고의 종교화가가 된다.
덧붙이는 글 예술의 전당 루오전 공식홈페이지 http://www.rouaul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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