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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칼국수 먹으며

등록|2010.01.15 16:46 수정|2010.01.15 16:46

칼국수의 추억 ⓒ 송유미






어느 시인의 말처럼
칼국수는 아픈 음식이다.
혼자 먹는 칼국수는 추억의 음식,
이렇게 추운 날 뜨거운 칼국수 먹으면,

구멍난 창호지 밖에는
밀가루 같은 하얀 눈이 내리고
30촉 백열등 희미한 부엌방에는 
냄새나는 메주들이
주렁주렁 천정에서 그네를 탔지.

개미 허리를 가진 엄마는
저녁 찬이 마땅치 않다고,
솔가비 태우며 큰 가마솥에 
멸치국물 끓이며 칼국수를 맛있게 끓이는 법을
어린 동생과 내게 이상하게 일러주었지. 

"얘들아 칼국수의 반죽은 너희들 엉덩이에 땀이 날때까지 
오래 오래 반죽을 치대야 칼국수가 쫄깃쫄깃 한단다."

나와 아무 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동생들은 
좋아라 하얀 밀가루를 눈처럼 뒤집어 쓰고
깔깔거리며 엉덩이에 땀이 나는지 보자고
온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지.

긴 겨울방학처럼 눈은 좀처럼 끄치지 않고
대청마루 밑에 숨어사는 누렁이 강아지는 
공사판에서 척추뼈 다쳐 앓아누운 
아버지의 털신을 베고 납작 엎드려,  
펑펑 눈이 쏟아지는 먼 산만 쳐다보며
온 동네 시끄럽게 컹컹 밤낮으로 짖어댔지. 

돌아오는 봄이면 읍내 방직공장에 취직해야 할 
언니는 무슨 까닭인지 다락방에서 꼼짝 않고 
온종일 꼬부랑 영어 알파벳만
가나다라마바사처럼 소리내서 외웠지. 

목포로 고기잡이 떠난 작은 오빠는
석 달이나 편지 한장 없고... 
카랑카랑 아버지 기침소리 북처럼 
울리는 양철 지붕 위에 눈 내리는 소리는, 
다락방에서 숨어서 코배기도 안 보이는 언니가
몰래 몰래 연필 깎는 소리처럼 사각사각 들리곤 했지.

오래 가마솥에 달인 멸치 국물에 
온종일 수선 떨며 신문지 위에 썰어 말린
칼국수를, 김장 배추 김치를
총총 고기처럼 다져 넣어서
그걸 누가 다 먹는다고 엄마는
큰 가마솥이 넘치도록 끓이셨지.

부글부글 넘치는 가마솥의 칼국수는
오래 끓일수록 많아져서 그릇그릇 담아도
남아서, 담 너머 돌이네 앞집 순이네에도
막 이사온 집처럼 돌렸지.

마치 먼 먼 옛날처럼
아득한 내 유년의 아랫목에
길게 병들어 누운 늙은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기침 소리 들으며
칼국수 먹는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처럼 젓가락에
돌돌 실타래처럼 감아도 먹고
가닥가닥 길처럼 끊어 먹기도 한다. 

먹을수록 퉁퉁 불어서 줄어들지 않는,
옛날 칼국수 한그릇 앞에 시켜 놓고
젊은 엄마처럼 고개 푹 떨구고
뚝뚝 눈물 몇 방울 소금처럼
섞어 가며 먹고 또 먹는다.

먹어도 좀처럼 배가 부르지 않는
추억의 칼국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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