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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가사키'와 사랑에 빠졌다

[나가사키에서 온 편지①] 빛으로 가릴 수 없는 '선진국'의 어둠과 절망

등록|2010.01.15 17:56 수정|2010.01.17 09:58
1570년 일본 최초의 무역항으로서의 개항, 전국적인 쇄국 정책의 시대에도 유일하게 네덜란드 상관을 인정했던 국제도시, 일본의 네덜란드학과 외국어 학습의 장, 막부시대 말기 뜻을 품은 지사들이 꿈과 열망을 품고 방문했던 혁신과 세계화의 원조 도시, 일본 근대화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메이지 유신의 맹아가 싹트던 시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군 군사학을 배우며 부국강병을 꿈꾸던 땅, 유일신 사상이 꽃피울 수 없는 일본에서 이례적으로 인구 대비 기독교인(특히 가톨릭)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유서깊은 가톨릭의 도시.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울 만큼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 풍광과 '천만 달러의 야경'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을 만큼 일본에서 밤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 그래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찾았고 수많은 외국 기업이 서양의 문물을 전했고, 그 와중에 서양인과 일본 여인 사이의 수많은 절절한 사랑이 싹텄으며 비련의 사랑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최초이면서 유일하게 전쟁용으로 핵무기가 실제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던 두 도시 중 하나이며,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오욕과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폭 투하의 땅, 당시 약 3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연행 당하여 고된 노동과 노예같은 삶에 무너져 내려갔던 한민족에게도 가슴 저린 아픔의 도시 나가사키.

나가사키를 설명할 때, 한두 개의 단어로는 결코 수식을 할 수 없다. 수도 도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일본식 KTX라 할 수 있는 초고속 열차 신칸센이 통하지 않는 인구 45만 명(나가사키시)의 작은 지방 소도시이면서도, 나가사키에는 역사와 문화, 예술, 종교, 정치, 과학과 기술, 학문과 혁명, 사랑, 그리고 전쟁과 폭력의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수년 전부터 '다문화 시대'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고 있지만, 중국과 네덜란드, 영국, 포르투갈, 한국에 이르기까지 나가사키의 문화는 '국제도시'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이며,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음식인 '나가사키 짬뽕'처럼 다양한 문화가 섞여 그 색채를 잃지 않고 흥미롭게 공존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 한국에 폭설과 한파가 몰아치는 동안, 나가사키도 몹시 추웠고 함박눈이 내렸다. 일본의 북부지역과는 반대로 나가사키를 포함한 규슈에 이 정도의 함박눈이 내리고 쌓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 전은옥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도 찬란한 빛으로 전부 가릴 수도 없고, 가려서도 안 되는 어둠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내가 이곳 나가사키에 온 지 어느덧 10개월째.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은 내가 알던 일본이 아니었다. 나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차고, 오만에 가득 차고, 사물의 진실을 보지 못한 얄팍한 무지였는지. 그러나 내가 무엇을 몰랐고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소크라테스는 "네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진전된 앎"이라고 칭찬할까?

일본에 오기 전에 내가 상상했던 일본은 '선진국, 돈 많은 나라, 깨끗하고 친환경적인 나라, 안전한 나라, 사회복지제도가 최상급 수준이어서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고 젊었을 때 성실하게 일하기만 하면 퇴직 후에는 연금을 넉넉하게 받으면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여행할 수 있는 여유로운' 일본인의 이미지가 강했다.

또 서비스 정신이 강하고 교통과 관광 시스템이 발달해서 전국 어디라도 외국인과 나그네가 여행하기 참 좋은 나라, 식당에 가면 음식 나오는 모양이 조금은 야박하고 너무 깔끔떠는 나라, 화산폭발이나 지진, 태풍 피해 등의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 변태적인 성문화가 발전한 나라, 혼네(진심)을 감추는 다테마에(겉으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취하는 언행) 문화 때문에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문화, 그러나 그만큼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고 예의를 지키고 남의 의견을 최대한 겉으로는 매우 존중하는 나라, 남의 의견을 잘 청취하는 나라, 무엇이든 하나에 몰입해서 그 분야의 달인이 많이 탄생하는 일본사람들.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많고, 정치적으로는 작년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익이 일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시민들의 성향도 매우 보수적이고 혁명과 개혁의 열망, 젊은이 정신이라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늙은 정신의 나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해 타 아시아국가를 무시하고 일본 우월주의와 내셔널리즘이 강한 나라,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언제나 요동치는 나라란 느낌, 이런 정도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동안 수많은 방송과 책 등을 통해서 전해져 온 일본문화라고 하는 것, 일본인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부분도 있으나, 편견도 많았고, 또 일본은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사실이었으나 지금은 진실과 거리가 먼 것도 많다. 내가 가장 피부로 느낀 것은 일본이 '부자 나라'이고 '안전하고 안정성 있는 나라', 노후에는 연금으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이미 붕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나가사키를 상징하는 조형물인 평화공원 평화기념상 앞에서 열린 설날 정기 집회. 매년 1월 1일 오전 10시30분에 같은 자리에서 나가사키 시민과 피폭자들이 모여 평화를 염원하는 집회를 연다. 나가사키에 미군에 의한 원자폭탄이 투하된 8월 9일을 기억해, 매월 9일에 지역 노조활동가들이 평화집회를 열기 시작한 이래 매월 9일에 집회가 지속되고 있으며, 한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에도 매해 특별집회가 열린다. ⓒ 전은옥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도 실업률이나 빈곤율이 높고 고용없는 성장이 심각한 사회 문제이니, 일본 사회도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일본의 사회적 안전망이란 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격차 사회' '빈곤' '프리터(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 '파견직' '워킹 푸어(근로 빈곤층) '노숙자'와 '실업' 등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도 알게 되었다.

한국 사회와 너무나 닮아 있는 곳, 일본. 요동치고 변화하는 일본의 현재는 경제와 사회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줄곧 일본의 뒤를 쫓아왔던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리고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고통은 도쿄, 나고야,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보다 지방으로 파고들수록 그 어려움과 생활고가 더욱 뼈를 깎는 듯이 아프다. 사회가 힘들고 아플수록, 더 약한 자들에게 고통이 더 많이 전가되듯이.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칼날이 몰아치면 언제나 여성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해고되듯이.

내가 서울을 떠나 있는 10개월 동안 한국 사회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의 이십대를 함께 했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고 남북관계에도 엄청난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으며, 생활현장도 정치와 사회 곳곳이 전반적으로 날마다 아슬아슬하다. 이국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은 매일같이 칼날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어서, 조마조마하다.

한편, 일본에서는 거꾸로 전후 55년 동안 거의 독주해온 자민당 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라는 단어 등은 감동적이었다. 과연 일본 사회는 변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 나가사키를 거쳐간 일본의 역사적 인물들. 사카모토 료마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사진이 눈에 띄인다. ⓒ 전은옥


나는 오늘부터 나가사키로부터 편지를 쓰려 한다. 이방인의 펜끝으로, 나그네의 노래로, 한국사회와 너무도 닮은 듯, 그러나 역시 낯선 일본 속 나가사키에 대해서 '혼네'의 글을 써보려 한다. 나의 글이 어떤 글이 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일본 전체를 조망하려 하는 과도한 욕심보다, 철저하게 나가사키로부터 일본의 속살을 깊숙히 파고들면서 나가사키의 희망과 절망을 함께 노래하고 싶다. 나는 나가사키와 사랑에 빠졌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지난해 3월부터 나가사키에 체류하며, 한일역사와 일본사회, 일본의 시민운동과 평화박물관 운동 등 다양한 테마를 연구 중입니다. 현재 오직 시민들의 힘으로만 세워지고 운영되고 있는 건립15주년째의 비영리법인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자원활동가 겸 객원연구원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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